에파타!
창세 3,1-8; 마르 7,31-37 / 연중 제5주간 금요일; 2025.2.14.
사람은 들어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말을 할 때에도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자신도 들으면서 말해야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는 두 개이지만 입은 한 개입니다. 청각 장애를 입으면 말소리의 크기도 조절하기 힘들어서 큰 소리로 말하기 때문에 길게 말할 수도 없고 어려운 말은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원만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러자면 잘 듣는 것이 먼저이고 말을 잘 하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티로와 시돈 그리고 데카폴리스 등 이방인 지역을 두루 돌아보시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와서 고쳐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는 동작과 함께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 즉 “열려라!”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는 치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에서도 서로 듣고 제대로 말하는 의사소통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듣지 못하고 말 못 하는 사람처럼 공동체도 병듭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역사상 여러 번에 걸쳐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3 참조).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에 들으라고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날씨만큼이나 시대의 징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들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6,3 참조).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가 들어야 할 말씀은 첫째가 예수님이요 둘째가 시대의 징표 속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세상과의 의사소통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이에 응답하는 사도직 활동으로 합니다. 여기서 기준은 당연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입니다. 시대에 만연한 사회악 현상이 과연 어떠한 공동선이 결핍되어 일어나는 것인지를 잘 식별해서 교회 공동체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도직을 일으켜서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선한 기운으로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와 세상의 의사소통입니다.
창세기에서 뱀으로 상징된 사탄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애초에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6-17)고 명령하셨는데, 사탄은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ㄴ) 하고 왜곡합니다. 하와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도 하와는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창세 3,3)고 하셨다고 한 술 더 뜹니다.
결정적인 왜곡은 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열매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셨고 그 죽음의 실체는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 즉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경고의 뜻을 이렇게 곡해했습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창세 3,4)이라고 유혹했습니다. 하느님은 관계 단절로서의 죽음을 경고하셨는데 사탄은 하느님처럼 되리라고 곡해하여 유혹한 것이지요. 이로써 첫 사람은 죄를 들여왔고 이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이 원죄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할 때 사해집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름이, 그분의 삶으로 살겠다는 약속이 가치로운 것입니다. 세례 때의 약속은 마귀를 끊어버리고 예수님을 믿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분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약속과 다짐이 세상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작용합니다. 그 약속과 다짐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 삶은 사회악에 대한 공동선의 실천이요 공동선을 위한 사도직 활동이며, 세상의 죄와 악에 대항하는 하느님의 선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로써 교회와 우리는 영적인 귀가 열리고 영적인 혀가 풀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시는 방식이 이것입니다.
또한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인은 7세기 경 슬라브족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슬라브 알파벳 문자를 창안하여 전례서도 번역하고 특히 체코 지방에서 활동했던 치릴로와 메토디오입니다. 이 문자는 그리스 문자를 기초로 슬라브족의 발음체계에 맞게끔 수정한 문자로서 현재 키릴 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와 동유럽 그리고 몽골 등의 나라에서 이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선교적 성과를 감안하여 보자면, 듣기와 말하기 그리고 읽기와 쓰기 같은 의사소통의 능력과 이에 바탕한 여러 가지 인문학적 성과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에 바탕 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역량과 이를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는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져야 개인들과 공동체의 구원 그리고 사회와 민족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치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들어야 말할 수 있고, 듣고 말하는 의사소통이 과정이 원활해야 공동체가 건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치는 한 사회 안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여기에 있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역사상의 모든 예언자들과 치릴로와 메토디오 같은 복음선포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세상에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게 귀를 열어주고 혀를 풀어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선포 즉 선교의 목적입니다. 이는 세례 받은 신자를 늘리고 교리를 가르치며 성사를 거행하는 좁은 의미의 직접적 종교활동이 결국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이상으로 세상에서 의사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근본적인 가르침, 즉 성경의 계시와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사회 안에서 의사 소통을 담당하고 있는 몫은 언론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현 시기 한국 언론의 현 주소를 진단하는 목소리를 소개하면서 아울러 교회의 가르침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오늘날 한국의 언론인은 사회의 엘리트가 아니다. 최민우 기자는 내가 언론에 대해서 한 주장의 근거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20세기 저널리즘 규범이 왜 생겼는지, 그 규범이 뉴미디어 시대에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 한국 언론이 그 규범을 지키는지, 왜 지키지 않는지, 신문사와 방송사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유튜브 저널리즘’ 활동이 어떻게 사회의 공론을 활성화하는지 이야기했다. 설마하니 내가 “언론이 편파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 편파적이지 않아서 문제”라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겠는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조사 연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왜곡해서 비평하는 기자를 엘리트라고 할 수는 없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행위를 ‘허수아비 논증’이라고 한다. 그는 내 견해를 비평한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허수아비를 무딘 칼로 내리쳤을 뿐이다.
둘째, 한국의 기성 언론은 기득권 집단의 일부이며 보수 정당과 한패이고 모든 부당한 기득권을 지키는 경비견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중립은 망상의 산물이거나 대중을 속이려고 하는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기성 언론은 소멸할지언정 스스로 혁신하지는 않는다. 누가 개혁해 줄 수도 없다. 최민우 기자는 안심하시라. 우리 편으로 안 오면 재미없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은 적도 없고 놓을 뜻도 없다. 우리 편이 아니라고 누군가를 재미없게 만들 힘이 있지도 않다. 아직은 그런 말을 할 정도로까지 멍청해지지 않았다. 내가 줄기차게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시민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 언론 보도를 대하면 언론이 세상에 끼치는 해악이 줄어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무기는 말과 글뿐이다. <중앙일보>처럼 ‘대단한 신문’의 정치부장이 겁먹은 표정으로 엄살을 떨 일은 없다.
셋째, ‘유튜브 저널리즘’은 사회의 공론을 활성화한다. 언론과 유튜브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기성 언론도 유튜브 플랫폼을 쓴다. 신문사와 방송사는 여러 분야의 콘텐츠를 생산한다. 그와 달리 유튜브에는 특정한 분야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다양한 채널이 무수히 존재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KBS와 MBC의 보도 프로그램과 경쟁한다. 교양, 문화, 예능, 오락 등 다른 분야에는 그 분야의 신문 방송 콘텐츠와 경쟁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유튜브는 언론을 대체하지 않지만 신문 방송의 정보 유통 독점은 확실하게 무너뜨렸다. 저널리즘을 ‘뉴스를 결정하는 과정’으로 정의(定義)한다면, 신문사와 방송사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도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언론 개혁은 이룰 수 없는 목표다. 유튜브에서 수준 높은 저널리즘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출처 : 유시민, “‘언론의 중립’이라는 망상”,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2024.8.8.>
언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방면에 걸쳐 현대 사회 속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언론은 정치적으로 여론 형성의 도구와 공동선의 추진 도구로서, 경제적으로 경제 정보의 교환 도구로서, 사회적으로 변화 및 진보 수단으로서, 문화적으로 문화 파급 및 자녀 교육을 위한 도구 등으로 활용된다.
국민은 알 권리를 가지며 언론인은 알릴 자유를 가진다. 알 권리와 알릴 자유는 천부 인권에 속하므로 이것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법령은 자연법에 배치된다. 알 권리와 알릴 자유는 자유 언론에 의해 매개된다. 언론은 자유로운 보도 활동을 통해 국민의 알 권리를 신장하여야 한다.
<출처: 전국 사목회의 의안집 사회 의안 중 언론 의안, 1, 3항>
교우 여러분!
결국 언론이 수행하는 의사 소통과 여론 형성의 기능에 대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한 언론 소비자들의 선택에 따라서 좋은 언론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