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지배는 그리스의 민족성을 변질시킬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유능한 그리스인은 살해되든지, 망명 또는 개종하였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농민은 토지를 투르크인 영주에게 빼앗기고 그 농노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어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고, 그 징세책(徵稅策)의 일환으로 그리스정교회의 존속이 겨우 허락되었다. 다만 투르크인이 능숙하지 못했던 상업분야에서만은 그리스인이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18세기 이후 베네치아의 쇠퇴에 대신하여 그리스의 상인들은 흑해·지중해에서 활약하게 되어 마침내 강력한 선박대(船舶隊)와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후의 독립전쟁에 큰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7세기 후반에 군사력이 쇠퇴한 투르크는 열강과의 외교교섭이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인을 통역관으로 등용하는데 이를 계기로 그리스인이 점차 외교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발라키아·몰다비아 등의 통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파나리옷(Fanariot)’이라는 그리스인의 특권계급이 형성되었다. 또한 산악지대에는 결사적으로 투르크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인들이 ‘클레프트(Kleft)’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며, 클레프트의 세력에 대비하여 ‘아르마톨(Armatol)’이라는 그리스인 경찰대가 각지에 조직되었으며, 클레프트는 후에 그리스 독립운동의 주요세력이 되었다.
18∼19세기의 러시아-투르크전쟁, 프랑스혁명, 알리파샤 술탄의 반란 등은 그리스 독립운동을 자극하였으며, 1770년 펠로폰네소스반란의 실패 후, 1821년 남부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이 애국 비밀결사 ‘필리키 에타레이아(Philiki Etareia)’는 그 지도자 P.A.입셀란테스의 지휘로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에 호응하여 일어난 펠레폰네소스의 반란이 파트라스의 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지도로 클레프트·아르마톨이 합세하여 성공을 거두자,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929)으로 발전했다. 독립군은 D.입셀란테스의 지휘로 여러곳에서 투르크군을 공격하였으며, 그리스 선대(船隊)도 이에 참가하여 투르크 함대에 타격을 주었다.
드디어 1822년 1월 그리스 독립이 선언되고, 파나리옷의 마브로코르다토스(1791∼1865)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클레프트파와의 내분이 일어났다. 투르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오스섬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 그리스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스인 학살을 계기로 유럽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그리스 편을 들게 되어, 시인 L.바이런을 비롯해서 사재(私財)를 털어 의용군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메테르니히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을 묵살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다만 영국만이 외상 캐닝을 중심으로 그리스를 교전국(交戰國)으로 인정하고 1823년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투르크는 이집트에게 구원을 청하여, 1824년 정예를 자랑하는 이브라힘파샤군(軍)이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해서 점령을 시작한 결과 미솔롱기는 1년간의 항전 끝에 결국 1826년 4월 함락되었고, 뒤이어 아테네도 포위되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프랑스를 동원하여 1827년 7월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조정하고, 3국의 함대를 파견하여 투르크·이집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1828년 4월 러시아가 투르크에 선전(宣戰)하고, 프랑스도 펠로폰네소스에 파병하였다.
그리스의 독립은 1829년 아드리아노플화약(和約), 1830년 런던회의에서 보장되었다. 그 동안에 그리스의 내분도 진정되고, 전(前)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암살되었고, 바이에른 출신의 오토 1세(재위 1832∼1962)가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리스는 원래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독립전쟁에 의한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경제강화를 도모하는 것이 오토 1세의 과업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테네로 옮기고, 경제의 확립과 국토의 확장정책에 진력했다.
국토확장의 최종목표는 1453년 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대그리스주의’라고 하였다. 즉 독립 후의 그리스사(史)는 밖으로는 국토확장책, 안으로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분쟁, 그 2가지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온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 당시의 그리스의 영토는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아르타만(灣)·볼로스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에 위치하는 본토와 키클라데스제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구(舊) 비잔틴 제국의 옛 땅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영토확장운동이 특히 활발히 진행되어 독립 당시 4만 9000㎢였던 국토면적이 1907년에는 6만 4000㎢에 이르렀다.
1854∼1956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였고, 1859년의 이탈리아혁명에 자극되어 1861년 그리스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오토 1세가 추방되었고, 덴마크 왕자 게오르그 1세(재위 1863∼1913)가 옹립되었다. 영국은 이때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었던 이오니아제도를 그리스에게 넘겨주었다. 1877∼19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회의에서 그리스의 국경이 개정되었다. 1909년 청년사관들의 ‘군인동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 후, 베니젤로스가 총리가 되어 그리스의 근대화와 대그리스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정치를 지도하였으며,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1912년과 1913년 2회에 걸친 발칸전쟁 때에는 세르비아·불가리아 등과 함께 투르크와 싸워 더욱 영토를 확대하여 마케도니아 남반(南半), 테살로니케 등을 획득하였고, 에피로스 지방의 남쪽, 크레타섬, 트라케 서부 등지를 영토로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게오르그 왕이 테살로니케에서 암살되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발칸전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품고 있었으며, 1914년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2세의 사촌인 콘스탄티노스 왕은 중립을 희망했으나, 베니젤로스는 삼국협상 편에 서야 된다고 주장하여 서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압력을 가하여 왕을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왕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리스는 독일에 선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승국이 된 그리스는 영국의 지지를 얻어 1919년 5월 소아시아의 이즈미르(스미르나)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투르크는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그리스주의는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케말 아타튀르크(케말파샤)가 출현하여 ‘터키’를 재건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고, 1922년 그리스군은 소아시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보다 앞서 1920년 11월의 선거 결과 베니젤로스는 실각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스 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대그리스주의를 성취할 수 없게 된 그리스는 그후 터키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즈미르와 트라케 동부 등을 포기하고 터키와의 인구교환을 도모했다. 그 결과 120만 명 이상의 그리스인이 터키로부터 돌아오게 되었고, 반대로 45만 명의 터키인이 터키로 귀환하였다. 그밖에 10만 명 가까운 불가리아인이 그리스를 떠났다. 그 결과 그리스의 인구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아울러 경제문제도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1924년 3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여전히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928년 베니젤로스가 다시 총리가 되었고, 1935년 혁명이 일어났으나 곧 진정되었다. 왕정이 부활되고 콘스탄티노스의 장남 게오르기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후 좌익 공화파가 우세하게 되었으나, 1938년 총리가 된 메타사스는 국회를 정지하고 계엄령을 공포했다.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알바니아 전선에서 그리스군에게 패전했다. 그러나 1941년 1월 메타사스가 급서(急逝)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해지기 시작했으며, 5월에 이르러 그리스는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왕은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카이로에는 망명 항전조직이 형성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지하운동·레지스탕스 등이 조직되어 게릴라전이 각지에서 빈발했다. 1944년 11월 그리스는 해방되었고, 한때 좌우 양파가 협조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곧 붕괴되고, 1946년 9월 국민투표의 결과 게오르기오스 2세가 귀국하게 되었다.
그후 그리스는 격심한 인플레와 좌우 양 파의 내란을 겪게 되었으나,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은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십수억 달러의 원조로 정부측을 지원했다. 그 결과 좌파는 세력을 잃고 1949년 10월 내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형편을 배경으로 왕당파·공화파 사이에 정쟁(政爭)이 계속되었고, 군부 쿠데타 등으로 강압적인 군사정권이 성립되는 등 정국불안이 계속되었다.
(잠도 덜깼는데 근대 그리스에 관한 문서를 읽다보니 왠지 답답해져서 긁적여 본 글이다. 너무 깊게 생각 하지는 않길 바란다. 그냥 "이런일도 있었구나." 하면서 담담하게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오랜 시간에 걸친 식민화와 사대의 역사를 거친 국가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들 국가가 국가적 영웅 혹은 단체가 등장하여 민족을 규합하고 이른바 혁명 - 그것이 폭력적인 형태이든, 비 폭력적인 형태이든 - 이라는 것을 일으키기 이전까지 지독한 당쟁과 뿌리깊이 자리잡은 타성에 의해 짧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작금의 조국이 그러하듯.
본문의 헬레닉 리퍼블릭의 경우엔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과 세계대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단합하여 적지않은 성과를 얻을수 있었다. 그들은 투르크에 의해 식민화 됐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동일하게 보일수도 있으나, 기실 그들과 우리의 상황은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먼저 그들에게는 자신의 선조들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자신들을 지배했던 적 투르크에 대한 적개심이 명확하게 잡혀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세세한 이념을 뛰어넘어 단합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헬레닉 리퍼블릭의 정신적인 이념에 더해 불안정한 세계의 정세가 기폭제가 되어 그들은 대그리스주의를 표방한 재도약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조국을 식민지화 시켰던 일제는 강탈과 지배만을 획책하던 투르크와는 달리 민족의 이념을 흔들어 놓는데 더욱 힘을 쏟았다. 그들은 결코 투르크에 못지 않은 수탈을 자행하면서도 결코 그에 대한 억지섞인 명분-변명을 잊지 않았다. 이것은 투르크가 그리스를 식민지화 했던 배경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 주를 이뤘다면, 일제의 식민화정책의 주요 목표는 그들의 좁은 영토와 적은 인력을 보완해줄 새로운 땅과 노예를 얻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이전의 제국들이 애써 얻은 식민지를 잃은 이유를 분석하려 노력했으며, 완벽한 그들의 노예를 만들기 위해 식민지 백성들의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황국신민화정책에 최대한 주력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시도의 첫 시작으로 헌병 경찰을 앞세운 공포정치 - 무단통치 - 를 실시하여 최우선적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붕괴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아울러 유치하면서도 잔혹한 마녀사냥을 행함과 동시에, 그들은 민족의 전통 문화와 토속 신앙을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시키려 노력하였고 그 이면으로는 민족의 전통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화재와 자연물들을 훼손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한 세대에 걸쳐 자행하여 당시의 대한제국에 자신들의 조상과 문화를 일체 전해받지 못하고 그저 부끄럽게만 생각하는 젊은세대를 등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그들은 공포정치를 완화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한 다음, 본격적인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 일본어를 말하는것을 자랑스레 여기게 하였으며, 창씨개명을 통해 민족의 근간을 흔들려 하였다. 허나 예상외로 민족의 거부가 심하자 개명을 하지 않은자에게 -직장취업 불가, 우선적 노무징용, 식량배급 금지, 우편배달 제외, 자녀 학교 입학 금지, 미행사찰 등의- 감당하기 힘든 불이익을 안겨주었으며, 개명 거부자의 일부를 본보기로 학살하는 동시에 현지의 유명인사들을 선동해 개명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 즈음 해서는 이미 전통적인 문화와 신앙들은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으며, 이는 오늘날 까지 문화적 괴리를 이어오게 하였다.
하지만 꺼져가는 불꽃이 더욱 화려하게 피어오르듯, 당시의 조국에서는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는 지식인들이 각지에서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일제에 회유당한 또다른 지식층과 대항하는 한편 식민 정부에 대한 테러행위를 통해 민족의 전통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의 여러 곳에서도 이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독립군과 한국광복군 등을 조직하여 조국의 해방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세계2차대전으로 말미암아 각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한국광복군 역시 군세를 정비하고 미군과 합동하여 1945년 8월 20일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한국광복군의 진격에 앞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격을 당한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고, 종전의 여파로 조국은 외세에 의해 해방되게 된다.
이후 국내의 지도세력은 크게 범우익 세력과 범좌익 세력으로 나뉘는데, 김구와 이승만,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범우익세력은 반탁을, 박헌영과 여운형등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은 찬탁을 주장해 팽팽하게 대립하게 된다.
당시 한국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 무산에의해 상대적으로 명분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던 김구선생은 자주적 남북합작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많은 난점과 경제적 불이익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민족의 안위와 미래를 생각하는 좌우세력의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는 당장의 민족통합 보다는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판단하였고, 미국 또한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자유를 쟁취한 국가로 믿을수 있는 국가라 생각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좌우세력의 신탁여부에 대한 대립이 짙어질 무렵 UN의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당하자 우익세력 내에서는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신탁통치를 주장하게 된다. 이에 범우익 세력은 정부수립 방식과 신탁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인해 새로운 대립의 양상을 띄게 되었으며, 이어진 UN의 개입으로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해 제헌의원을 선출하였고, 1948년 8월 15일 국회 의결을 통해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좌익세력도 9월 9일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게 되며, 통합을 외치던 김구선생은 이듬해 6월 26일 암살당하게 된다.
작금의 지식층과 젊은이들은 타성에 젖어 조국보다는 개인의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성향을 띄고 있다. 세계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해있다고는 하나 그것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사이에서는 민족을 운운하는 사람이 보이면 오히려 그들을 이상한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자신의 국가가 세계에서도 몇 안되는 휴전중인 국가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깊은 타성과 무사안일주의에 젖어 그 누구도 자신이 살고있는 이 곳에서 전쟁이 터질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눈을 떠 앞을 볼줄 알고 부당한 일을보고 분노할줄도 알지만, 보여주는 것만을 보며 가르쳐 주는것만을 알려한다.
자신의 조상과 민족이 가꾸었던 유구한 문화와 풍습들을 잊은채, 단지 새롭고 자극적인 외국의 신 문문들에 여과없는 관심을 보이며 부러워 할 뿐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일제 강점기 당시의 식민지화 정책과 해방 이후의 미국 및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침투는 분명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모습,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일테니 말이다.
첫댓글 와우// 너무 길다//ㅠ_ㅠ// 어려운 내용이군요/// 흠//ㅍ _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