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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집 - 연극무대
< 시의 청문회법(聽聞會法) > - 유종인
시는 귀[耳]의 대형화(enlagement)다. 언뜻 봐서는 입[口]이나 눈[目]일 듯 싶으나 그리고 후각(嗅覺)의 코[鼻]와 가만한 손길의 감촉일 듯 싶으나 이 모두를 아루르는 귀의 이미지가 완연하다. 속엣말을 주워섬김으로써 듣고 유심히 응시하듯 봄으로써 들으며 오감을 한데 모은 듯 촉지(觸指)함으로써 또 듣는다. 어느 한 신체 부위의 편파적인 감각이나 내부적인 인지기능의 사용이 아닌 몸과 맘 전체의 운용이 가져오는 귀의 일체화, 그 전면화(全面化)된 귀의 활용이 시의 작용이 아닐까.
청문회(hearing)는 그렇게 펼쳐지듯 갈마들며 또 번지듯 세상을 향해 시의 대상 상관물(相關物)을 향해 오감(五感)과 생각을 열어놓는 귀의 성찬과도 같다. 그런데 이런 성찬이 하나의 맛과 아름다움에만 한정되지 않아서 다양한 맛과 멋의 진설(陳設)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런 귀의 관심사에는 마뜩하고 미쁜 것들만 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미스럽고 불만스러운 문제적 양상을 띤 현실의 내홍(內訌)들까지도 과감하게 붙안고 고민하는 냅뜰성이 전제되어야 마땅하다.
박종인 시인은 삶의 길흉(吉凶)이 갈마드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현상적 지표(指標)들을 간과하지 않고 그걸 시적 품으로 받아 궁구하듯 살피는 예리한 감식안을 가졌다. 언뜻 봐서는 일상적으로 지나치기 쉬운 난망한 현실의 여줄가리로 치부할 수 있는 것들도 그 안에 도사린 범상치 않은 유의미한 존재의 실상이나 실제(實際)에 시적 촉수(tentacle)를 드리우는 남다른 결행이 돋보인다. 그만큼 관성적인 삶의 소재에 쉽게 매몰되지 않고 불안과 실존의 심기를 건드리는 여러 대내외적인 이슈들을 선점하려는 남다른 의욕으로 일상적 삶의 평면에 입체적 인식의 파급을 얻어내곤 한다.
죽은 듯이 앙상한 나무가 날씨의 위로를 받자 부스스 눈을 뜨기 시작했다 봄볕 한 사발로 메마른 입술에 생기가 돌았다 이것은 가능성이다
예상은 빗나가거나 적중한다 절반이 확률을 넘었을 때 봄이다 잘려진 목을 접목하는 기술자들, 전문가의 손이 빛나는 철이다
무르익어 번창한 시기는 봄의 중년, 중년은 녹음과 그늘로 이어진다 봄의 뿌리에서 출발한 계절의 마디들, 네 개의 뿌리는 네 개의 매듭을 지닌다
되풀이되는 기술에 나이테가 그려진다 봄의 고리에 들러붙은 수많은 죽음들, 한 번의 죽음 위에 안간힘이 다녀가고 바람의 피가 서늘해진다
그늘을 좇아 모여든 것들은 그늘의 변심으로 다시 흩어지고 부활을 꿈꾸
는 가능성은 어둠 속에 웅크린다
<뿌리의 방식> 전문
삶의 현황(現況)과 자연현상의 변이(變移)는 서로 궤적이 다른 듯하나 어느 순간 하나의 완숙한 비유체계로 겹쳐지는 대목을 맞이한다. 숱한 대내외적 요인들을 상정하더라도 삶이건 자연이건 "예상은 빗나가거나 적중한"다는 진술의 실제적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이 무슨 예상이든 삶에 집중한 것이거나 자연현상에 대한 예감이건 간에 그 변화의 향방은 완벽한(perfect) 예상의 적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가역적(可逆的)이고 유동적인 흐름을 통해 사실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곤 한다.
박종인의 시적 응시(凝視)가 빛나는 대목은 가변적(可變的)인 외부 혹은 외형의 변동성을 주재(主宰)하는 근원성, 즉 삶의 시공간적 주재자(主宰者)로서의 '네 개의 뿌리'를 간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면의 통찰을 통해서 가변성과 항상성(恒常性)이 서로 별개로 작용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 둘은 연동시키는 "접목하는 기술"로서의 존재 만물의 표리관계(表裏關係)를 포괄하고 있는 점은 남다른 시선이 아닐 수 없다. 사계절의 변화와 특징을 삶의 특징적인 국면으로 비유하면서 그런 계절의 순환, 즉 "되풀이되는 기술에 나이테가 그려진다"는 원숙함과 순환의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그런 생명 순환의 변화 속에도 '들러붙은 수많은 죽음들'을 간과하지 않고 숨탄것들과 같은 순환 속에 범주화(categorization)한다는 것은 제목처럼 "뿌리"라는 상징성을 웅숭깊게 바라보는 시선과 궤(軌)를 같이 한다. 그러기에 "흩어지고 부활을 꿈꾸는 가능성"은 막연한 관념을 벗어나 실제적 존재의 방식으로 바뀌는 계기를 만들기에 이른다.
나는 매일 상을 받는다 이미 상에 중독되었다 숨이 붙어있는 한 이 상을 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는 남이 주는 상만 받았다 이제 나 스스로에게도 주고 남에게도 준다 남에게 주는 위치이니 상 주는 재미가 쏠쏠해야 하는데 마지못해 주는 날이 더 많다 그런 날이면 상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짜증을 낸다 허구한 날 주는 상, 줄 때마다 부상을 챙기란 말인가
상이란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것 웃음꽃이 피어나야 한다. 남녀노소 경쟁률이 가장 높은 상 마음과 육체가 갈망하는 피와 살을 만드는 상 그 상이 행복을 업그레이드시킨다. 그래서 즐겨 찾기 하게 한다.
오늘도 상을 차린다 메뉴를 바꾸고 입맛을 정리한다
배고픈 식구들이 올 시간이다
-<즐겨찾기-매일 타는 상> 전문
앞서 일상의 소재나 현상들을 관성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화자가 그려내거나 목도(目睹)하게 되는 현실에의 청문(聽聞)은 일상적 존재와 부각된 존재를 왕복하는 현실의 아이러니(irony)를 재밌게 희화화(戱畵化)하기도 한다. 이 시편은 그야말로 상(賞)의 남발과 그 상의 귀중함에 대한 이중적인 심사를 하나로 버무린 요지경의 현실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상은 그야말로 격려와 상찬의 의도이며 그 대상과 주체에 대한 진정한 정진(精進)의 효과를 기대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관례화되고 요식화되며 정치적 혹은 상업적 잇속이 이면에 깔린 저급한 수상(受賞)의 뒷거래 그 관습적인 커넥션은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닌 씁쓸한 요지경으로 횡행한다. 그런 계제에 "상이란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것 웃음꽃이 피어나야 한다”라는 평범하면서도 올곧은 화자의 진술에 새삼 공명하지 않을 수 없다. "상 주는 재미가 쏠쏠하”지 못하고 "상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짜증을 낸"다면 그것은 애초의 시상(施賞)의 취지나 의도와는 자못 거리가 먼 것이 아닐 수 없다. 끌밋한 존재의 회복과 위로, 격려와 용기의 북돋움이자 그 대상이 지닌 미학적 우수성의 발굴이라는 측면은 어떤 상이든 그 선정의 덕목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화자가 "오늘도 상을 차린다" 라고 했을 때, 그 상은 단순히 먹을거리를 진설한 밥상일 수도 있지만 그 동음이어의(同音異義語)의 상(賞)도 그 본질적인 의미는 겹쳐질 수 있다. 시인이 바라는 상은 단순히 경쟁서열을 매기는 순위로써의 저급한 상보다는 "마음과 육체가 갈망하는 피와 살을 만드는 상"에 대한 속깊은 갈망이 우선할 것이다. 이런 상이라면 우리는 좀 더 세상에 미만(彌滿)해 있는 저열하고 저급한 각종 상(賞)들의 존재방식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고민이 화자가 직정적으로 언술한 본래적인 상의 가치에 부합하는 존재의 형식이자, 현실에서 듣고 보고 싶은 수상문화의 전범이 아닐까 싶다.
매일 소위 존재감을 느끼도록 관계의 양상을 조율하고 부정성보다 긍정성을 높이는 심리적 고양(高揚)이야말로 시적 공명의 한 형태이며 상(賞)의 본래적 기능의 일상화가 아닌가 다.
빙글빙글 공연이 펼쳐진다 TV 속에 꽃이 피었다 싱싱한 생화가 눈길을 끈다 손발의 극적인 연출은 한 편의 드라마, 나비처럼 팔랑거리던 몸은 회오리를 일으키고 공중으로 치솟는 순간, 시청률이 상승한다 얼음판 팽이가 되기까지 제 몸을 얼마나 후려쳤을까
한쪽으로 돌고 돌아, 몸은 한쪽으로 쏠렸단다 반대편으로는 회전할 수 없는 몸, 생의 반은 병원 침대에 누워 팽이가 되려 했단다
꽃이다가
나비이다가
다시 팽이가 되는 여자,
수없이 넘어지고 쓰러져 얼음판에 뿌리를 내렸다
-<스타스토리-김연아> 전문
삶의 표층이 아니라 그 심층이나 이면(裏面)에 대한 관심과 청문(聽聞)은 화자가 즐겨 그리고 의미있게 귀를 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토리"는 범박하고 상투적인 성공담보다는 가혹하고 어딘가 으늑한 생(生)의 곡절을 여사여사하게 포착될 여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TV 속에 꽃이" 피고 세간엔 "싱싱한 생화가 눈길을 끈다"는 대목에서 안이하게 눈요기로 끝날 공산은 거의 없다. 그 화려한 "손발의 극적인 연출" 뒤에는 "한쪽으로 쏠"린 "반대편으로 회전할 수 없는 몸"의 불구성(不具性)을 간취한다. 즉 화려한 불구라는 말, 즉 그 말에는 실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불수의근(不隨意筋)의 이면(background)이 도사린다는 것을 발굴하듯 첨예하게 목도하기에 이른다.
이 뒷면에 감춰진 듯한 곡절은 화려하고 수려한 "얼음판 팽이"가 얼마나 숱한 고통과 병증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스타"의 고된 수련의 과정인가를 새삼 깨우쳐준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김연아"라는 피겨 스타가 지닌 화려한 성공의 플레이가 순행(順行)에의 절정의 연기에 보내는 갈채와 환호이지만 그 역행(逆行)의 불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피땀 어린 대가(代價)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다. 능란함과 능숙함의 연기라는 것은 이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불구적이고 불가역적(不可逆的)인 동작을 희생의 담보로 잡는 수련과정 속에 태동한다는 점을 화자는 시인은 명민하게 보아낸다.
얼음판의 "팽이"가 된 스타의 잘 드러나지 않는 곡절을 엿보듯 귀기울이는 시의 귀는 표면과 이면을 종합하고 "꽃이다가/나비이다가/다시 팽이가" 된 스타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실체적 진실을 획득한다. 시를 청문회라는 형식에서 본다면 이런 실체적 진실이라는 관용적 수사(修辭)를 관철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단면적이지 않고 다면적(多面的)인 눈길이 대중적 존재의 스토리를 부각시키고 그 실체적 진실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포장되고 레토릭(rethoric)으로 장식된 이야기라면 그것은 굳이 시의 눈길이나 발언이 아니어도 될 것이니, 냉철한 포용력으로 화자는 시적 상황을 구성하는 층위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누구 배를 채워 줄까?
억으로 바뀔 숫자가 준비 중이다
예측된 번호들이 대기 중인데
행운은 늘 비켜 간다
행운을 탐구하고 숫자를 맞추는
사람들이 늘어나도 행운은 쉽게 오지 않는다
필요한 것만 골라내는 신기한 기술을
어디 가면 살까?
도심 한가운데 명당이 있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줄을 짓는다
복권방은 명당으로 자리 잡고
태연하게 복을 팔고 있다
주머니 마지막 비상금 한 장
지갑 깊숙이 복을 사서 넣는 사내
이미 복에 중독되었다
일주일 치의 행복을 구매해 살아가는 사람들
유효기간이 지난 복은 중독의 후유증이다. 갈가리 찢겨 버려진다
버리기 위해 사야 하는 행운들이
날마다 판매되고 날마다 독이 되어 버려진다
일, 천, 만, 억…
이곳에 오면 대수롭지 않게 입에 오르내리는 숫자들
종이 한 장이
단숨에 인생 역전 시킨다고
명당은 큰소리를 치고
회전목마의 재미는 福을 제대로 선사한다
점점 늘어나는 고객, 복을 찾는
복 속 독의 힘으로 복권방은
마음껏 복을 누린다
당신은 복입니까?
독입니까?
-<당신은 복입니까? 독입니까?> 전문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 삶의 길흉화복에 대한 선택적 기호(嗜好)는 별반 큰 차이가 없다. 상서(祥瑞)로움과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현실적 욕망은 지극히 당연한 지향이나 본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인의 시각은 이런 현대화된 일확천금의 대박 꿈을 제도화한 복권의 의미를 중층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과연 천민자본주의가 대중들을 상대로 파는 복권은 어느 만큼 실효성과 실질 가치가 있는 시스템인가를 점검하듯 들여다 본다. 그럴 때 가장 먼저 숙고하게 되는 것이 "복(福)" 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한 새삼스러운 규명이자 그 실체적 특징을 얼마만큼 대중(mass)들이 인지하고 있느냐 이다. 화자는 그런 "복권방은 명당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는 대중적 시각의 맹점을 간파하듯 "예측된 번호들이 대기 중"이지만 실제는 "행운은 늘 비켜 간다"는 사후적인 명제를 실감케 한다. 사행심(射倖心)이나 요행심이 그나마 서민 대중들의 소위 희망고문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면 타당한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해 못할 측면이 없지도 않지만 언제나 "버리기 위해 사야하는 행운들"은 일종의 "중독(中毒)" 이라는 언술이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화자는 대중 각자가 의지적인 실행력으로 가꿔나가는 복이 아닌 독(毒)이라고 일갈한다. 오히려 화자의 냉철한 현실인식은 복권이 구매자를 위한 생산이나 판매방식이 아니라 "복 속 독의 힘으로 복권방은 /마음껏 복을 누린다" 는 예리하고 신선한 통찰력을 선보인다.
삶의 중심에서 선량한 인간관계와 정신적 정서적 이타심(利他心)에서 발원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사행산업은 결코 완전한 복(福)으로 인간사회 공동체에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새삼 각성시키기에 이른다. 요행으로 구매하는 복이 아니라 베풀고 짓는 복의 고전적 의미를 시인의 냉철한 비판적 안목에 의해서 도도록해지는 국면이 아닐 수 없다.
담벼락을 따라 침범해 있던 어둠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는 물체를 당기는 정중앙, 눈여겨보니 그가 내게 관심 있어 한다는 걸 알겠다 어둠은 자신 안에 나를 가둔다 그런 어둠을 나는 조금 열고 본다 그의 움직임은 맘 얻기 위한 몸부림, 나를 향해 완전한 사육을 얘기하고, 나는 빛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린다 내가 다시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사랑한 이 어둠은 늘 그림자가 되어 내 옆에 붙어 있었고 해가, 질 무렵에는 외투가 되어 나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그에게 나도 점점 빠져든다 내가 나를 벗어 던지자 어둠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나는 그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창밖으로 어둠이 번지고 있다 우린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그와의 빈틈없는 이런 사랑이 나는 좋다 이제 어둠은 더는 어둠이 아니다
-<불륜의 심리학> 전문
앞서의 시편이 복권(lottery)에 관한 대사회적 관심과 흥행의 속내를 통해 대중심리학( 大衆心理學)적 측면을 갈파하는 시인의 통찰력을 보여줬다면 이번의 "불륜(immorality)"에 관한 상황적 제시는 그 자체로 심층심리학(深層心理學)적 측면을 건드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불륜으로 비유되는 위선이나 악덕, 부도덕 같은 심리적 기제(機制)를 이 시에서는 "어둠"으로 통칭하고 있는 바 이 부정성의 심리가 어떻게 인간의 심층심리를 은연중에 "사육"하듯 "조금 열고" 보듯이 처음의 그 어둠의 부정성과의 대척적인 관계를 완화하고 이완시키며 궁극에는 "내 옆에 붙어 있"는 대상으로까지 친밀화시키는가를 보여준다.
앞서 통칭된 "어둠"은 자연적 현상으로서의 어둠과 부도덕한 인륜의 상징으로서의 "어둠"이 혼재하는데 이 뒤섞인 어둠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이 시에서는 종내 무분별(無分別)의 식별(識別)의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교류되는 지점을 확보한다. 미묘하고 아이러니하다. 단순히 도덕률의 차원에서 보면 거부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행위들인데 그 대척점의 대상에 순치(馴致)된다는 것이 시인이 파악한 존재의 내면인 듯하다.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윤리적 대상과의 합일보다는 비윤리적 악당과의 연대(連帶)에 더 심리적 끌림을 강조하는 심리적 기후는 무엇보다 그 심리적 기저(基底)에 소외(疎外)에 대한 방어적인 기제가 완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는 "나를 벗어 던지자 어둠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 한 가운데 "그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는 그 말없는 존재의 교감, 그 교응(交應)의 심리는 다른 어떤 정신적 가치보다 우월한 경우를 점유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측 가능하고 상식적 범주의 예단(豫斷)이 때론 빗나가는 이런 심리학적 정황의 추이를 파헤치듯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썰미 속에서 심리학과 시학(poetics)은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기에 이른다.
1. 보고
항아리가 하나 /간장이든 고추장이든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먹어 치움/조금씩 속이 차면서 키가 늘어나
어느 날/단지로 변해 있음. /생각이 커지고 만물의 이치가 몸 안으로 들어오고 /단지가 윤이 나고 눈길을 끌기도 함
어느 날부터 잘못된 것들까지 받아 넣고 있음/가득 찼다고 착각함
2, 조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감/시나브로 미세한 구멍들이 생겨 /채우는 것 보다 빠져나가는 양이 더 많아짐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 /어느새 밑 빠진 항아리로 변함
3. 기재 사항
점점 소리가 커지고 /거미가 집을 짓고 들어앉음 /건망증과 불면에 시달림
4. 각성
채워지는 것은 세월과 고독 /점점 윤기를 잃고 /뎅그렁뎅그렁 /건어물이라도 넣어 존재 가치를 높일 필요가 있음
-<어느 단지에 대한 보고> 부분
삶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이나 숨탄것들의 소위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변화적 인상을 제기한 이 시편은 마치 모든 존재가 겪어야 할 숙명적인 프로그램을 예시해 놓은 듯하다. 그것은 "어느 단지" 라고 하는 기명(器皿)을 통해서 예시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샘플링의 경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실존이 겪어야 할 단계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재기발랄함과 윤이 나는 생기가 점차 쇠락하면서 종국에는 "채워지는 것은 세월과 고독"이라는 피치 못한 멜랑콜리의 상태를 개괄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런 사물과 생물의 막장에 이른 그 국면을 여는 장명(章名)이 예사롭지 않다. 다분히 몬존해진 실존의 상황을 적시하는 다소 우울한 호명이어야 하는데, 시인은 오히려 더 웅숭깊고 영특한 작명을 얻는다.
"각성(覺醒)" 이 바로 그것이다. 시르죽듯 생물학적이든 정신적이든 쇠락의 기미가 완연한 가운데서도 이런 국면을 타개하듯 새뜻하게 개척해 나가는 모토를 선취하는 듯하다. 그러니 "거미가 집을 짓고 들어앉'은 그 퇴락함을 걷어내고 "건어물이라도 넣어 존재가치를 높일" 의지를 천명하는 것. 이것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넘어 의지와 결기의 정신적 나이를 확보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단지" 라고 하는 기명의 시적 뉘앙스나 이미지적 인상만을 추수(追隨)한 것이 아니라 그걸 매개로 한 생명 존재의 자각과 긍정적인 타개의 의미가 배어든 실존적 보고서의 양식을 취한다 볼 수 있다.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되길 원했어 금과 향료의 나라 동양을 그리는 그의 가슴엔 검은 대서양만이 파도치고 있었지 땅이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자르시오 기꺼이 목을 내놓았지 육지다 외치는 순간 목은 살아나고 역사의 새 새벽이 오고 있었지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넌 그의 역사 속에 종일 파도가 넘실거리고 저어가던 뱃머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어 창밖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어 달을 타려고 이마에 수평선을 만들었지 초승달은 수평선을 그어놓았어 바다가 요동하고 마스트가 심하게 펄럭이는 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그는 정수리에 닻을 내렸어
신대륙을 여왕께 바치는 순간
새 역사의 페이지마다
가혹한 식민지로 물들고 있었어
-<콜럼버스와 초승달-스토킹> 전문
발견(discovery)과 개척지 소유(所有)에 관한 역사적 혹은 거시적인 관점을 인간의 관계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측면이 이 시편에는 도드라진다. 대항해의 역사와 그 신대륙의 발견과 소유 및 개척에 관해 새로운 관계의 패러다임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는 이 시편은, 콜럼버스의 선언적(宣言的)인 언술이 미지(未知)의 영역을 이미 확신하고 소유하고 모종의 억압적 기제(機制)로 작용하는 측면을 예리하게 보아내고 있다. 부제로 붙은 "스토킹" 은 그런 측면에서 존재의 혹은 사물의 발견이라는 것은 소유나 일방적인 간섭의 영역이 아니라 창의적인 소통의 관계 대상이라는 것을 반대급부(反對給付)로 암시하기에 이른다. 신대륙의 새벽을 향한 호헌장담은 '내 머리를 자르시오 기꺼이 목을 내놓'는 결단과 용기를 높이 살 수도 있지만 그 결행과 만용의 뒤끝에는 일방적인 소유와 탈취, 억압과 약탈의 '가혹한 식민지'가 예정돼 있다는 흉포함이 도사린다. 이것이 비록 대항해 시대의 역사에만 한정된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시인의 눈길인 것 같다. 소유가 아닌 상생(cohabitation)의 관계적 모색을 회피한 야만적 탈취의 사냥 행각의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아직도 현실적인 상황으로 횡행할 수 있다는 화자의 시각이 갈마들어 있다.
"역사의 새 새벽"이 어떻게 특정되고 희망의 참된 주제가 되느냐는 그 주체의 의지에 달렸다는 선언적인 함의도 물론 포함하지만 무엇보다 핍박받는 "가혹한" 흑역사 만큼은 개척자 및 약탈자의 심중에서 자행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면 이런 심리적 폭압과 약탈의 무자비함은 인간의 내재적 심리 속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악행을 도모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지. 그래도 피아노 건반은
서로 다른 음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나오잖아.
인류 사회의 공동체도
두 개의 동굴이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리고
동그랗고 투명한 뚜껑을 같이 덮고 닫힌 뚜껑 속으로 더 잘
보는 그게 곧 리듬에 맞춘 조화 아닐까?
두 개의 다리로 얼굴을 같이 붙잡고 같이 보이는 것을
잡아당겨 풍경들을 같이 빨아들이는 공동체의 극치
그리고 언제나 같이 허기진 듯 희생을 채워 넣고 넣어도
넣어도 차지 않지만 사이좋게 두 동굴로 나란히
짝 맞추어 한 곳을 바라보는 그런 아름다움 말이야.
마치 일란성쌍둥이처럼 같이 팀웍을 자랑하고.
동굴과 뚜껑이 맞춤형 제짝으로 만난 연분이기에
같이 울고 웃고 도전하고 격려하는 그런
그래서 시너지가 하모니를
이뤄 동굴은 동굴대로 각각 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로 잠을 잘 땐
그 문을 닫고 잠이 들면 그때서야
동굴을 떠난 안경은 안경집에서
잠이 드는 이처럼 성공적인
팀웍이 진정한 가족관계로
증명되는 것 아닐까?
-<가족관계증명서> 전문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이해관계와 욕망의 상충과 야합으로 얽힌 세상사를 바라보는 시적 기준이랄까 존재의 처신(behavior)의 매개를 화자는 '안경'이라는 사물의 메뉴얼을 통해 짐작하고 긍정한다. 그런 안경의 기능적 역할을 규정하는데 화자는 그걸 '두 다리로 얼굴을 같이 붙잡고 같이 보이는 것을/잡아당겨 풍경들을 같이 빨아들이는 공동체의 극치'라는 언술을 통해 나름 규명하고 있는 듯하다. 소위 균형과 조화라는 공동체적 덕목(moral principles)을 지향하는 바 '사이좋게 두 동굴로 나란히/짝 맞추어 한 곳을 바라보는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소명을 갖추고자 한다. 거기엔 두 개의 눈이 하나의 균형 잡힌 주관적 시야와 객관성의 확보를 통해 나름의 미학적(美學的) 대상과의 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는 '팀웍(team-work)'의 의미를 강조하는 바가 여실하다. 외골수의 시각만이 아니라 두 개의 시야가 하나의 안목(眼目)으로 적절히 운용되고 눈썰미있게 사물과 현상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준거이자 매개로서의 안경은 '동굴'의 이미지를 통해 독립적이면서도 상통하는 협력의 관계망을 드러낸다.
현대사회의 가족해체와 그 구성원의 복수(複數)에서 단수(單數)로의 감소 등의 현황 속에서도 가족이라면 존재증명의 속내는 "같이 울고 웃고 도전하고 격려하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족관에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안경"이라고 하는 사물의 적절하고 통일된 시야 확보라는 기능적 지향성의 이미지를 화자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시너지가 하모니"를 이뤄내는 일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안경이라는 사물의 기능적 측면과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연대적 특징을 비유적으로 연계(連繫)시킨 측면이 새뜻한 경우이다. 비록 두 개의 안경알이 서로 다른 도수와 개별적 처치를 거쳐 동일한 질적 수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눈에게 맞는 적절한 시야의 확보를 담보할 수 있다는 측면을 이해하는 것, 아마도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의 구성원 각자가 이 서로 다른 안경알처럼 서로를 이해하는 심중(心中)은 이런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이해하는 측면도 종요롭지 싶다.
70억 밥줄 에너지 저장고, 세상에서 가장 큰 공장이 지금 가동 중이다
매년 천오백억 톤 당분의 생산을 맡은 암실에서 녹색식물을 위해 수백 가지 맛을 선보이는 어머니 사계절 맛이 다르다
차츰 어머니의 미각이 변해간다
자식들은 스프레이를 뿌리고 무스를 바르고 매연을 뿜어대며 질주한다 과속에 길든 쇳덩이들 고속으로 빌딩이 치솟고 도시는 광란의 열기로 달아오른다 문명이라는 명목으로 흑자를 가장한 적자를 산출하고, 빙산이 녹고 유빙이 늘어난다 숲이 삭제되고 하늘은 구멍이 나고
면역은 약화되어 혈압은 올라가고 맥박은 느리다 녹색식물 공장을 구해보려 적자를 흑자로 자신의 몸을 이중장부로 약 대신 쓰는 지구, 결국 목숨을 담보삼아 몸을 호루라기처럼 분다
-<지구의 이중장부> 전문
시인의 관심의 대상과 초점은 미시적(microscopic) 대상에서부터 지구라는 땅별의 거대한 살림살이나 현황을 살피는 거시적(macroscopic)인 관점과 관심 대상을 시의 테이블 위에 올리곤 한다. 특히 생태적 관심과 우려의 시각에서 보면 "70억 밥줄 에너지 저장고"라고 볼 수 있는 지구의 생태(生態)는 짐짓 걱정스럽고 위험수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려와 심각 단계 수준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에 이른다. 지나치다고만 할 수 없는 이런 우려의 바탕엔 "문명이라는 명목으로 흑자를 가장한 적자를 산출'하고 있는 지구촌의 운영 회계의 부적확성과 부실, 생태적 배려나 고려의 희박성 등에 시인은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밑동이 잘린 느티나무, 나이테를 세어보니
긴 세월 바람의 손끝에서 번진 파문이
온몸에 녹음되었다
계절이 드나든 길, 헐벗은 채 추위에 떨던
음지의 시간은 길고 촘촘하다
빛이 쏟아지던 따뜻한 풍경은 느슨하게 감겼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미 알아버린 세상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늘과 낯선 목소리도
네 몸에 다 기록되었다
한 줄의 동그라미는 그가 걸었던 흔적
레코드판이 세선을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우듬지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간다
천천히 해를 따라 걷던 발자국들
제 몸에 갇힌 보행은 수많은 동그라미로 압축되었다
해가 지고 달이 지고
숱한 저녁이 오고 새벽이 오고 아침이 다녀가면
공중에 걸어둔 수많은 팔을 흔들며 춤을 추던 나무
그때마다 점점 가까워지던 하늘
그가 품던 둥지와 재재거리던 날개는 사라졌다
끝내 그가 닿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두툼한 뱃살의 시간들
푸른 옷 한 벌 어디에 벗어두고 맨몸으로 이곳에 멈추었을까
숨겨둔 나이를 실토하고 또 무엇이 되려나
막막한 그의 여생은 저 사나운 톱날에 달려있다
-<동그라미 사형장> 전문
앞서 시의 청음력(聽音力)은 하나의 감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주변에 생성되고 변이되며 새롭게 확장되는 현상들을 성찰하고 나름의 감각적 통찰의 언어로 규명하려는 내재적 힘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럴 때 시적 수용력은 협량한 생각이나 편협한 관념에 물들어 있으면 아무리 사실적인 대상이라도 왜곡된 규명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시는 새롭게 보되 그 이면적 진실에 최대한 개성적인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창의적인 시각과 그 언술에 정서와 감각, 생각을 도입하려는 행위 과정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여기엔 관성적인 시각이나 공정성을 결여한 판단, 공감력이 떨어진 고정관념의 반복으로는 존재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참다이 발견할 수 없는 상투적인 수용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잘려진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더운 계절과 추웠던 계절, 춘추(春秋)의 사소한 그리고 굵직한 생활의 역사를 보아내는 시인의 눈썰미는 "네 몸에 다 기록되었다"라는 단정 속에서 확장하듯 오롯해진다.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필수적이라 느꼈던 것과 부수적이라 외면하기 일쑤였던 것 등을 포함해 일체의 시공간의 흔적과 궤적이 "한 줄의 동그라미는 그가 걸었던 흔적"을 존재의 원형 바코드처럼 내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두툼한 뱃살의 시간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는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나운 톱날에 달려있다" 라는 화자의 시각이 혁신적이고 돌발적이다. 짐짓 이런 톱날의 작동은, 나무 자체에는 벌목의 시간이고 초록과 둥지를 잃어버리는 상실의 계절로 일단 예단할 수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심층(深層)의 환부(患部)와 내막을 밝히는 일종의 발굴이자 성찰의 계기로 앞서의 상실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다. 시에 있어서도 이런 벌목 뒤에 드러나는 나이테의 진경(珍景)은 외물의 현상 같은 외연(外延)에 한정하지 않고 그 표리(表裏)관계를 포함한 입체적인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발굴(發掘)의 노력으로 드러난 의미심장한 경물(景物)의 이미지로 오롯하다. 박종인 시인의 시편들은 이런 대상과 존재를 향한 열정적인 응시(gaze)의 열도(熱度)를 짐작하고 그 실제적인 실체를 밝히려는 꾸준한 시도(try) 자체를 우리는 시가 매순간 열어가는 청문회(聽聞會)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돌발적인 질문의 정곡(正鵠)과 의표를 찌르는 질의와 대답 속에 시인의 시편은 점차 치열한 삶의 현장과 그 거부할 수 없는 깨달음과 정서적 정신적 온축(蘊蓄)에 다가드는 매진을 거듭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