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로 아미타불 "십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이런 탄식의 말을 흔히 듣는다. 도로(徒勞)란 헛수고를 말한다. 보람없이 애만 쓰는 것을 도로라고 한다. 과대망상이나 신경과민도 도로에 포함된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님이다. 이 땅의 서쪽으로 10만억 국토에 아미타불의 정토세계가 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횟수이다. 십년동안 공부를 하면 자성속에 있는 아미타불과 만날 수 있고 마음속에 있는 극락정토 속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다. 십년 공부가 무너지기는 매우 간단하다. 한 번의 우둔한 판단은 이내 아귀, 아수라 축생에 떨어지고 만다. 근래 십년 공부가 도로로 떨어지는 짓들을 볼 수 있다. 어떠한 분야에서건 십년 공부가 도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2)건달(乾達) 하릴없이 빈둥대는 사람을 건달이라고 한다. 일하지 않고 먹으면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사람을 건달이라고 한다. 아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없이 허풍을 떨며 다니는 사람을 건달이라고 한다. 건달의 어원은 건달바에서 유래되었다. 건달바는 향을 먹고사는 하늘나라의 신이다. 건달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노래를 즐긴다. 그러니 건달이라는 뜻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건달'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세상을 건달처럼 살며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사회구성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건달임을 알아야하고 건달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곡차(穀茶)의 유래 곡차란 말 그대로 곡식으로 만든 차이다. 요즘엔 곡차라는 단어가 술 마시고 싶은 승속에게 편리하고 그럴싸한 빌미를 주는 것 같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계유이 곡차라는 이름의 술 때문에 양심의 가책없이 허물어진다. 곡차의 유래는 진묵(震默)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술'을 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곡차'라고 불렀다. 진묵 스님의 말에 의하면 마셔서 정신이 몽롱하게 '취하게 하면 술'이요, 마셔서 정신이 '맑아지게 하면 차'라고 한다. 그는 주량이 엄청나서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러니 진묵스님에게는 술이 술이 아니라 차일 수밖에. 우리도 진묵스님처럼 곡차의 참뜻을 새겨야 차와 술이 분별될 것이다.
4)면목(面目)없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 서지 않는다" "자네의 진면목을 보여줬네" 이렇게 사용되는 면목이란 체면, 남에게 들어낼 얼굴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는 면목을 다른 차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 면목(父母元生前本來面目)을 알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다. 여기서 면목이란 단순히 얼굴과 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임을 이룩하게 하는 본래의 진수(眞)가 있었을 것이다. 그 면목은 깨끗하고 모든 것이 비춰진다. 본래 면목속에는 거짓이 없다.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니 진실불허(眞實不許)하다. 따라서 면목이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과 통한다. 불성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성질의 차이이다. 진면목도 그와 같아서 사람마다의 면목은 동일하지만 그 면목을 지키고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면목이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면목이 선다"고 한다. 이제부터 면목없는 짓은 하지 말자.
5)무진장(無盡藏) 우리는 무엇을 얼마만큼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 바로 무진장이다.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을 때 우리는 흔히 "무진장하다"고 말한다. 불교대사전에 따르면 무진장이란 무진+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무진'이란 덕이 넓어서 무궁함을 뜻하는 것이고 무진을 포함하는 것이 '장'이라 한다. 그러나 유마경의 불도품(佛道品)의 무진장에 대한 해석은 훨씬 사회적이다. "빈곤한 중생을 돕고 이롭게 함은 무진장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진장이라 함은 바로 자비(慈悲)이다. 자비사상의 실천적 표출은 결국 보시(布施)가 된다. 무진장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준다. 5∼6백년 전 이 땅의 불교가 보여준 무진장의 자비와 보시의 흔적은 오늘까지도 역력하다. 우리의 후손들도 선조들이 자비보시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지금부터라도 무진장 주고 베풀자고요"
6)사자후(獅子吼) 얼마 전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했던 노래 중에 이현도의 "사자후"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라는 가사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사자후의 표면적 의미는 사자의 울음소리이다. 사자는 밀림의 왕이다. 이런 사자의 용맹성과 지혜는 압권하는 실력을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생시(生時)의 인도철학에서 자자한 부처님의 설법에 비유한다. 그리고 보우경(寶雨經)에서는 법에 따라 수행하는 보살을 사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인간 세상의 가장 으뜸진리인 불법을 실천하고 사는 보살은 단연 인간계의 사자일 수 밖에 없다. 또 일상생활에서도 "그 웅변가는 사자후같은 연설로 청중을 압도했다." 같은 말을 흔히 쓴다. 우리가 법사님의 설법을 듣기 전에 부르는 청법가에서도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하는 대목이 있다. 이렇듯 우리는 사자후라는 말을 많이 접하고 있다.
7)야단법석(野檀法席) 떠들석하고, 시끄럽고, 황당하고, 우왕자왕하고, 여럿이 모여서 다투고, 시비하는 그런 모습을 야단법석이라거 표현한다. 그래서 흔히 야단법석을 떤다라느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이 야단법석이라는 말은 진짜 뜻을 알고나면 나쁜 뜻보다는 오히려 좋은 뜻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휘적으로 설명하면 '실외에서 준비된 법회의 자리' 라는 뜻이다. 야단법석이 있을 때면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자연히 시끌벅적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낱말이 시끄럽다는 뜻으로 와전된 것 같다. 최초의 야단법석은 녹야원(鹿野苑)이다. 이 야단淺?【 부처님은 사성제, 오온법, 중도관을 설하셨다. 또 가장 대규모의 야단법석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을 하실 적의 영취산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때의 인파가 3백만에 달했다 고한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이같은 야단법석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야단법석을 펴 봅시다. 수백만이 아니라 수천만이 되도록 야단법석을 펴 봅시다.
8)이판사판(理判事判) "이판사판이다.", "이판사판 해보는 거야.", "이판사판 막다른 길이다." 이판사판은 마지막의 궁지를 말하고 있다. 왜 이판사판이 마지막을 뜻라는지는 알고나면 불자들은 슬퍼지고 불자 아닌 이들은 부끄러워질 것이다. 이판사판은 이판과 사판의 합성어이다. 이판(理判)은 참선, 경전 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시고, 사판(事判)은 절의 산림(山林)을 맡아하는 스님을 말한다. 여기서 산림이란 절의 재산관리를 뜻한다. 이런 뜻이 왜 마지막이라는 뜻이 되었을까? 묵교가 한창 탄압을 받던 조선조에는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의 신분계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롤 세우면서 스님은 성안에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되었디. 조선조에서 스님이 되어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그것은 마지막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판사판은 끝장이었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바뀌어 2천만에 이르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이판사판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름 결과를 낳는 방법을 위해 이판사판으로 덤벼야한다. 이것은 자연히 팔정도(八正道)와 연결B 것이다. 이판이 되든 사판이 되든 팔정도의 길 속에서 해야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판사판은 우리들이 생명을 걸고 해야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판사판은 우리들이 생명을 걸고 해야 할 인생의 숙제가 될 것이다 |
첫댓글 일화님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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