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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립보서 1:21-3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길 빈다.
본격적인 가을에 들어섰다. 어제 올해 문화부 네 번째 트레킹에 참여하기 위해 서오능을 다녀왔다. 가을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점심도 맛있었다.
함께 버스를 타고 서오능 입구에서 서울역으로 오는 길이다. 창밖으로 본 토요일 오후의 서울 시내 거리는 활기찼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고, 기후정의 행진도 진행 중이었다. 우리 사회가 지닌 활력은 거리와 광장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역으로 향하던 우리 일행이 울지로 입구에서 내게 물었다.
“목사님, 내일 설교 준비로 바쁘시죠. 우린 여기에서 놀다가 갈게요.”
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렇게 하세요. 내가 훼방만 될 거예요.”
가을은 그렇게 눈부시게 놀고 싶을 만큼 우리 곁에 와 있었다. 아무쪼록 새로운 계절이든, 새로운 인생이든 늘 합당한 변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1)
오늘 말씀의 제목은 바울의 인생 풍경의 가장 긴박한 순간을 들려준다. 배경이 되는 빌립보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와 가장 처음 복음을 전한 곳이다. 두 번째 전도 여행 중 일어난 일로 빌립보교회는 유럽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이 책의 특징은 ‘기쁨’이지만, 교회 안팎에서는 바울을 괴롭게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전도자들 중에서 사도 바울과 경쟁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박해자 출신 바울에게 피할 수 없는 태생적 문제였다.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을 비난하였고, 감옥에 갇혔으니 뭔가 그만한 죄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바울은 참 낙천적이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18), 그래서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감옥에 갇힌 일이 복음전파에 효과적으로 소문을 내주었으니 결과적으로 잘되었다는 것이다(13).
그러면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와 오늘 우리의 삶을 향해 권면한다. 중요한 것은 감옥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아니다. 교회가 복음적인 삶에서 벗어난다면 그 신앙은 돌처럼 굳고 말 것이란 경고였다.
그러니 쉼 없이 변화하고, 꾸준히 사랑하고, 복음적 삶을 살도록 힘쓰라. 한마디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요약이다.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날마다 믿음의 진보를 이루라고 한다. 우르술라 레귄의 말이다.
“사랑은 하나의 돌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빵처럼 늘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침마다 빵을 구워내는 사람처럼, 나 자신부터 믿음의 진보를 새롭게 해야 한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바울의 처지는 재판 결과에 따라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살아서 풀려나든지, 아니면 감옥에서 죽게 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였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24).
그렇다고 바울이 두 개의 갈림길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과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라는 기대, ‘살든지, 죽든지!’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그는 기대한다.
2)
바울은 자기가 당장 죽더라도 그에게는 유익하다고 하였다. 죽음조차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기 때문이다. 행여 바울은 지금 죽기를 더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지쳐서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바울에게는 그만큼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죽음조차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는 입구에 불과하였다.
만약 재판에서 유리하게 끝나서 살아난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를 위한 기회가 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풀려나는 것을 한마디로 “내 일의 열매”(22)라고 고백한다.
풀려나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온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증거될 것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기에 ‘살든지, 죽든지!’, 그 어느 경우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존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믿는다. 이를 잘 요약하는 한 마디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얼마나 비장한가?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시작이었다. 또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마지막이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의 삶에서 뺀다면 바울에게 남는 것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확신한다. 그는 분명히 석방될 것이고, 빌립보교인들과 재회할 것이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25).
그런 확신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요,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자신은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이제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빌립교회에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바울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빌립보교회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만으로도 전도 효과가 있었는데, 그가 자유롭게 된다면 그 효과는 엄청나게 배가 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진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정지하지 않고, 정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 신앙의 긍지를 갖고, 성장과 성숙을 가져오며, 견고하게 하는 일이다. 변화될 내일을 꿈꾸며, 자기 삶에서 비전을 이루어가는 일이다.
3)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믿음의 진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제부터 일본에서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3위를 목표로 한다고 한다. 대한민국과 같이 인구 규모도 작고, 스포츠 역사가 짧은 나라가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이 된 배경에는 초기 선교사로 일한 반하트 선교사의 공이 크다. 한국인들은 ‘반하두’로 기억한다.
반하트는 미국인 선교사로, 성경 말씀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체육활동을 활용하던 선각자였다. 그는 커다란 가방에 축구공, 배구공, 농구공을 넣어 와서 스포츠 놀이를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체육 선교사였다.
반하트 선교사는 YMCA 체육교사로서 1916년 내한하여 1940년에 한국을 떠났다. 일본 식민지 당국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할 때까지 고통 속에 신음하던 한민족과 함께 하였다. 스포츠를 통해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는 식민지 청소년에게 활력을 주었다.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53년 생애 중 전성기 24년 동안 한국에서 일하였다.
반하트는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여건만 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을 동료들에게 말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흔적은 한국 YMCA와 체육사에 남아있다. 당시 반하트의 스포츠 선교는 한국교회의 진보적인 모습 중 하나의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체로 한국교회는 진보라는 단어에 대해 부정적이다.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본래 개신교회는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트’한 개혁교회요, 역사적으로 진보한 교회인데 그런 역사의식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다.
한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복음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한국교회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보수적인 교회, 더 보수적인 교회, 아주 보수적인교회’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수하려는 것인가?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고집해야 할, 보수해야 마땅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닮기’, ‘예수 따르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그리스도교회는 진짜 보수가 필요하다. 진짜 보수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예수 정신’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한다.
그런데 골통 ‘보수주의’가 된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은 스스로 구원자가 되고,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세상과 소통을 못한다. 그것은 보수를 위한 보수일 뿐이다.
예수님은 내려놓고, 비우고, 낮아지고, 섬기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오늘의 교회는 마치 유대교의 개혁 세력이었던 바리새인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권위적이고, 체제유지적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볼 때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당시 유대인들이 불안해 하고 긴장하였듯 성전체제의 입장에서 보면 불순한 도전자와 같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여전히 ‘믿음의 진보’를 촉구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 권면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
문자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라’라는 의미이다.
로마인들은 어디에서나 로마인의 긍지와 자부심 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고, 로마식 옷을 입고, 로마의 법을 수호하였다. 로마인이란 특권과 함께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한다. 로마인이 로마시민으로 행세하는 것은 로마에 살든, 식민지 빌립보에 살든 똑같지 않으냐? 너희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이 땅에 살든, 하늘에 살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라. 그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특권과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고 살 때가 있다. 아닌 척할 때가, 모른 척할 때가 더 편안할 때가 있다.
그들은 후퇴한 군인들과 같다. 당장은 안전하듯 하지만 패배감이 깊이 남는다. 자기를 숨기고, 열심을 덜 내고,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고, 다음에 하자고 한다. 그런 사람은 후퇴한 군인과 같아서 결코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 어렵다.
매 순간 우리의 삶은 도전, 갈등, 선택이다. ‘복음적 삶’은 정답을 외우고,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고, 교회의 규칙에 순종하고, 교회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27)이고,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28)이며,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29)는 일이다. 예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염려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표시이다.
우리는 일마다 때마다 무엇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 신앙의 진보를 위해 보약이 될 것이다. 고난마저도 은혜임을,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싸움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변화되는 사람이다.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나는 일이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믿음의 진보’는 뭐든지 다 아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 가는 현재진행형이다.
하나님은 더 한걸음 앞서 나가 진보하려는 이에게 내일의 바통을 맡기신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내 삶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자신의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보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현실을 기대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내 신앙생활에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도록 이끄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