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쇠유Seuil 출판사에서 펴낸 희곡집 『Lheure grise』(1998)와 『Le Monstre』(2007)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희곡집에는 표제작이기도 한 「괴물」을 비롯해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희곡 「존과 조」, 남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여자의 이야기 「엘리베이터 열쇠」, 먼 미래의 암울한 시대를 풍자한 「길」 등 드라마와 우화, 희극과 비극 사이를 오가며 내용이나 형식에서 다양한 시도를 꾀한 총 여덟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모든 작품은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들, 자본주의와 문명, 개발과 환경, 여성과 인권, 인간관계의 심연 등을 날카롭게 들여다봄으로써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오랜 시간을 견디는 ‘좋은 서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가 만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핍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결핍은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그 욕망의 조각들은 결국 거대한 디스토피아의 지형도를 완성한다.
또한 희곡이라는 글쓰기의 특성상 대부분의 서사가 등장인물들의 ‘말’을 통해 전개된다는 점에서, 쉽고 간결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은 아고타 크리스토프 언어만의 매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고뇌와 애정을 담은 자서전 『문맹』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낯설고 기묘한 세계로 점철된 희곡집 『르 몽스트르』는 ‘문맹’이었던 한 작가가 낯선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끌어안고 자기 세계 안에서 ‘소유’하는지 잘 보여준다.
작가의 말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이 길들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끝이 있는가. 방향 표지는 왜 있는 걸까. 우리는 왜 걸어야 하는가. 출구는 있는가. 이 길들은 실제인가, 허구인가. 하지만 안심하시라. 지금으로서는 모든 것이 악몽일 뿐이다.”_「작가 노트」에서
역자의 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희곡은 그가 쓴 소설보다 훨씬 더 상징적입니다. 또 전쟁과 문명, 자본주의, 페미니즘 같은 동시대적 이슈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소설의 내레이션 구조가 사라진 자리에는 인간의 깊고 어두운 내면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그의 희곡들은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칼이 향하는 방향은 모호합니다. 머리를 노리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심장으로 바로 치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의 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오래 남습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희곡이 지닌 매력에 푹 빠져 무작정 번역을 시작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국내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여덟 편의 희곡으로, 위대한 소설가뿐 아니라 위대한 극작가로서의 아고타 크리스토프와 만나길 바랍니다.”_「역자 서문」에서
「존과 조 John et Joe」
친구 사이인 존과 조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지루하고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눈다. ‘커피 값을 누가 낼 것인가’로부터 시작된 그들의 줄다리기는 조가 가진 복권 한 장으로 인해 더욱 팽팽해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엘리베이터 열쇠 La cle de l’ascenseur」
한 부부가 있다. 남편은 친구인 의사와 공모해 자신의 아내를 격리시킨 뒤 다리를 마비시키고 시각과 청각마저 빼앗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끔찍한 이야기를 외칠 수 있는 목소리가 남아 있다.
「배회하는 쥐 Un rat qui passe」
등장인물들은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침실과 거실 사이를 바삐 오가며 현재의 규칙을 뒤흔든다. 작가는 다분히 연극적인 구성을 통해 인간과 권력, 연극과 현실의 관계를 고찰하는 동시에 가면 뒤에 숨은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괴물 Le Monstre」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이 함정에 빠졌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괴물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던 괴물의 등에서 꽃이 피어나고 좋은 향기가 퍼져나간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여전히 괴물의 죽음을 원한다.
「속죄 L’expiation」
하모니카를 부는 맹인과 불을 뿜는 농인이 있다. 두 사람은 돈을 아끼기 위해 어느 노파가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한 침대를 공유한다. 과연 두 사람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잿빛 시간 또는 마지막 손님 L’heure grise ou le dernier client」
어느 늙은 남자와 여자 이야기. 좀도둑인 남자는 여자의 오랜 손님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이유는 더 이상 몸을 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꿈을 듣고 즐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옆방에서 들려오는 어설픈 바이올린 연주처럼 두 사람의 관계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전염병 L’epidemie」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어느 마을, 주민들은 모두 자살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숲에서 목을 맨 소녀를 구조해 병원으로 데리고 온다. 하지만 가까스로 다시 살아난 소녀는 기억을 잃어버린다.
「길 La route」
모든 것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미래의 지구. 남은 건 길뿐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오직 자동차를 위해 건설된 길을 걷는다. 자동차는 오래전부터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버려진 고물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피난처’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