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17절~20절,최소한의 의무를 넘어, 최대치의 사랑으로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이자 매일 드리는 기도인 '쉐마' 뒤에는 하나님의 말씀(토라)을 마음 깊이 새기기 위한 아름다운 기도가 있습니다.
토라의 8단계 내면화 기도
"당신의 토라 안에 있는 모든 교훈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두시어, 우리가 이해하고, 분별하고, 주목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청종하고, 행하고, 사랑 안에서 완성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말씀이 단순히 머릿속 지식에 그치지 않고 내면 깊이 뿌리내리기 위한 8가지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말씀을 지성으로 이해하고
삶의 기준으로서 분별하며
눈과 마음으로 주목하고
겸손히 배우고
이웃과 다음 세대에 가르치며
마음을 다해 청종하고
삶으로 행하여
마침내 사랑 안에서 완성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깨달음과 배움일 수 있지만,
그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열매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차가운 교리와 의무에 갇혀 있는지, 아니면 뜨거운 사랑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는지 함께 돌아보고자 합니다.
본론 1: 나사를 조이시는 예수님 (폐함이 아닌 완성)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뜨리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들을 눌러온 까다로운 율법의 짐을 가볍게 해주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기준을 훨씬 더 높이십니다.
율법: "행동으로 살인하지 마라."
예수님: "남에게 분노하고 모욕하는 것만으로도 살인과 같다."
율법: "행동으로 간음하지 마라."
예수님: "마음속으로 음란한 동기만 품어도 이미 죄를 지은 것이다."
예수님은 마치 나사를 꽉 조이듯, 외적 행동을 넘어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동기까지 엄격하게 다루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랍비 사회에서 '폐한다(Abolish)'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말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뜻했고, '온전하게 한다(Fulfill)'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진짜 뜻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되찾아 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기준을 높이신 진짜 이유는 우리를 피곤하게 하려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쳤다(고르반)"는 핑계로 부모를 모시지 않거나,
겉으로는 죄를 안 지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독을 품고 있던 당시의 위선적인 율법주의를 깨부수기 위함이었습니다.
3. 본론 2: 울타리 치기를 넘어 마음의 첫 단추를 바로잡다
유대인들에게는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멀찍이 안전지대를 만드는 '울타리 치기'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는 연장조차 손에 잡지 말라"는 자잘한 규칙을 덧붙인 것입니다.
선한 의도로 시작된 울타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지나치게 자잘한 겉치레 규칙'이 되었고 정작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신 핵심은 이것입니다. 작은 유혹과 미움의 씨앗을 처음에 잘라내지 않으면, 결국 인생 전체를 파멸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음 → 마음속으로 미워함 → 앙심을 품고 복수함 → 상해와 살인으로 이어짐
예수님은 눈을 뽑으라, 손을 자르라 하는 과장법을 쓰시면서까지 죄의 시작점인 '마음속 첫 단추'를 바로잡으라고 강력히 당부하십니다.
겉모습만 가꾸는 위선을 버리고,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4. 본론 3: 최소한의 소극적 기준 vs 최대치의 적극적 사랑
당시 유명한 랍비 힐렐과 같은 이들은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
니다. 이는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최소한의 소극적 기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단순히 선을 넘어가지 않는 '최소한의 요량'에 집착하던 신앙을 '최대치의 적극적인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연인과의 데이트를 생각해 보십시오.
"파스타 금지, 권투 이야기 금지, 펑퍼짐한 옷 금지"처럼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만 피하려는 데이트는 얼마나 지루하고 피말리는 일입니까?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더 기쁘게 해줄까?"를 고민하며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주의: "어디까지 해야 벌을 안 받지?" (최소한의 계산)
참된 제자도(하시두트/경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사랑할까?" (최대치의 실천)
구원받은 것은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라 경건한 삶을 향한 첫걸음일 뿐입니다.
5. 결론: 모든 율법의 완성, 사랑
율법의 수많은 조항 중 가장 큰 원칙을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명확히 답하셨습니다.
"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면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독선적 신앙에 빠지기 쉽고, 이웃 사랑만 강조하면 사랑의 원천을 잃어버린 세속적 봉사에 그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채워질 때,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삶과 공동체 안에 어떤 갈등이나 고민이 있습니까?
복잡한 기준을 따지기 전에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질문을 던져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선택이 나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길인가?"
지식으로 시작된 우리의 신앙이, 마음을 다해 말씀을 청종하고 행함으로 이어져, 마침내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을 맺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