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때, 나는 1년쯤 우유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우유 250개를 3시간 동안 배달해야 했다. 알람을 3시 40분에 맞추고 잠들었다. 잠은 달았고, 새벽 기상은 어려웠다. 그러나 꼭 일어났다. 돈이 필요했으니까.
새벽이면 골목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배달하는 사람과 새벽기도자. 내가 다니던 배달 코스에는 교회가 20개 정도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한숨이 나왔다.
“생활비만 해결되면, 나도 새벽기도를 할 텐데….”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양심이 이렇게 외쳤다.
‘거짓말! 배달하기 전에도 새벽기도 안 했으면서!’
배달 오토바이를 몰며 문득 새벽기도가 그리웠던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새벽일을 다니기 전에도 새벽기도를 퐁당 퐁당(가다 말다) 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왜 그런 거짓 생각을 떠올렸을까? 배고프고 힘든 배달 일에 비해 새벽기도는 쉽고 배불러 보였기 때문이다.
배달하는 중에도 머릿속은 새벽기도에 관한 질문으로 가득했다.
‘왜 배달을 하기 전에는 새벽기도를 대충 했지?’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새벽에 기도하러 가기가 힘들어서 그랬겠지.’
‘그럼 새벽 배달은 어떻게 하는 거야? 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하루라도 빠지면 안 되잖아?’
‘그야 돈을 받으니까 힘들어도 하는 거지!’
‘새벽기도는 돈 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 했던 거야?’
‘…그런 셈이네.’
‘그러면 120만 원을 준다고 하면, 새벽기도를 하겠다는 거야?’
‘그렇다면야….’
마음의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만약 누군가가 배달 월급을 줄 테니 매일 새벽기도를 하라고 한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만 같았다. 새벽에 하나님을 독대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120만 원보다 가치 없게 여기는 태도가 들통난 순간이었다. 나는 놀랐고, 숨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배달 일을 나설 때마다 슬픔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한 교회의 마당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하나님께 죄송해서 예배당엔 감히 못 들어갔다. 대신 본당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 아래에 숨어 엎드려 기도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새벽에 배달은 해도, 기도는 안 했어요. 저는 주님을 진정 사랑하지 않았어요. 고작 120만 원보다 값싼 사랑이었어요.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다음 날부터 1시간 일찍 일어나 배달하기 시작했다. 새벽 골목, 불 밝힌 교회마다 입구에 멈춰 서서 잠깐씩 기도했다. 또 찬송가 하나를 정해서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로 이동할 때 반복해서 불렀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첫날은 내 처지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눈물의 의미가 바뀌었다. 하나님이 좋아서 눈물이 났다. 이제라도 새벽기도의 은혜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새벽 3시가 종일 기다려졌다.
‘새벽 배달 기도’의 기쁨을 누리려는 열망 하나로, 나는 삶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크게 여섯 가지 습관을 세워나갔다. 저녁 일정 없애기, 규칙적인 식사 하기, 가벼운 운동으로 쌓인 피로 풀기, 주변에 알리고 도움 요청하기, 낮잠 자기, 벌떡 일어날 준비 해두기.
이렇게 매일 살다 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일정의 밀도가 높아졌다.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았고 낭비되는 시간은 일분일초도 없었다.
소명자는 부지런하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 오기 전에 미리 기도로 준비한다. 새벽 순종은 하루의 소명을 너끈히 감당하기 위한 중대한 업무다. 이 역시 소명의 연장선이므로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전날 저녁부터 새벽 순종을 준비하는 기도자가 부지런한 소명자다.
- 새벽 순종, 송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