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송편 / 이 병 옥 옥상 화분에 심은 맨드라미 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닭의 벼슬을 닮은 꽃송이가 제 몸보다 훨씬 더 크다. 혹시나 가느다란 목이 부러질까 걱정되어 나뭇가지로 받침대를 세워주었다. 나에게 있어 빨간 맨드라미는 어린 시절을 그리게 하는 추억의 꽃이다. 해마다 한가위 명절이면 어머니가 맨드라미 꽃을 따다가 꽃 떡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새빨간 꽃과 까만 참깨와 햇밤과 대추가 다문다문 박혀 꽃밭을 연상케 하는 증편을 만드셨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위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가마솥에서 쪄낸 꽃 떡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먹음직스러웠다. 맨드라미 꽃은 증편뿐 아니라 송편에도 쓰였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더 좋다고 했던가. 꽃수가 놓인 기억 속에 꽃 증편과 송편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맨드라미 꽃송이 앞에서 옛 추억에 잠겼던 나는 어느새 가위를 들고 곁가지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한가위만 되면 항상 새 옷과 새 신발, 꽃 떡을 비롯한 맛난 음식은 물론, 친정어머니를 비롯해 잊고 지냈던 옛 어른들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그립고 알뜰한 추억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명절에도 떡을 집에서 만드는 일이 드물다. 살아가기가 팍팍하고, 가족의 규모도 적다 보니 음식을 많이 만들지 않을뿐더러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집안조차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맞춤 음식들로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단하고 편리해서 나 또한 적극 찬성이긴 하나, 명절날 맞춤 떡, 배달 음식만 먹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한가위 하면 무엇을 먼저 떠올리게 될까, 혹시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가는 날 지루했던 교통체증만 기억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세 손녀에게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금 아이들은 집에서 송편 빚는 걸 볼 수가 없다. 간혹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설날이나 한가위를 앞두고 콩고물 묻힌 인절미나 송편을 빚어 보았다고 뽐내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나, 정말은 맛 뵈기 수준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는 손녀들과 맨드라미 꽃 송편을 빚어보려고 준비를 서둘렀다. 일찍부터 서너 시간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서 빻아다 놓고,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양푼에 담긴 하얀 떡가루를 한 양자기씩 다섯으로 나누었다. 찐 호박 고구마를 섞어서 노란 반죽을 만들고 삶은 쑥을 갈아서 초록색을, 포도즙으로 보라색을, 당근 즙으로 주황색 떡 반죽을 만들었다. 마지막 남은 떡가루는 그대로 흰 반죽을 만들었다. 그리고 깐 밤, 꿀 넣은 참깨, 울타리 콩, 풋 팥으로 송편 소를 준비해 놓았다. 맨드라미 꽃까지 대접에 담아놓고 아이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어여쁜 손녀들이 오면 둘러앉아 장난 삼아 놀이 삼아 송편을 빚을 참이다. 이제 정성껏 마련한 오색 떡 반죽을 밤톨만큼씩 떼어내 소를 넣고 꼭꼭 주무른 다음 맨드라미 꽃잎을 하나둘씩 얹어 손가락 자국을 내 빚으면 예쁜 꽃 송편 완성이다. 드디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두 아들 내외는 각각 볼일도 볼 겸, 시장을 좀 봐 오라고 빈 가방을 손에 들려 내보냈다. 그렇게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인 세 손녀만 데리고 송편 빚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먼저 소가 반죽에 묻지 않도록 수저로 떠 넣어 꼭꼭 주무르는 시범을 보였다. 그러나 곧 고사리 손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무리란 걸 깨닫고 반죽을 일정한 크기로 떼어주면서 맘대로 빚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떡 모양이 참으로 가관이다. 동그라미와 네모, 세모에다 하트와 꽃, 별, 토끼와 돼지 등 동물도 있고 소와 꽃을 얹어 각가지 모양의 떡을 빚어 놓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송편 겉면에 참깨, 콩 등의 소가 붙으면 지저분해 보인다고 질색이었다. 손자국이 깔끔하지 않으면 실패한 송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손녀들은 개의치 않았다. 힘들다고 연실 몸을 꼬면서도 샐샐거리고 서로 눈치 봐가며 개성 있는 떡 빚기에 열중이었다. 꽈배기처럼 돌돌 꽈서 꿀로 버무린 참깨 소를 묻혀 낸 일명 꽈배기 떡을 빚어 놓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손녀들이 빚어 놓은 떡 쟁반은 귀여운 동물농장인가 하면 오색찬란한 꽃밭이었다. 매년 손자국 난 송편만 빚어온 나와 달리 손녀들의 꽃 떡은 정말 기발하고 신선했다. 손녀들과의 꽃 떡 빚기 체험은 대성공이었다. 그 떡을 그대로 이중 찜 솥에 올려 쪄냈더니 새롭고 산뜻하다. 떡 맛 또한 자꾸 주물러 그럴까. 송편 소가 중앙에 모이지 않고 반죽 사이로 고루 스며서 그럴까. 손녀들이 빚은 떡이 내가 빚은 손자국 송편보다 훨씬 더 쫀득쫀득하고 맛있다. 한 마디로 입에 착착 붙는다. 때마침 각자 볼일과 장보기를 마치고 돌아온 제 엄마 아빠를 보자 자신들이 빚은 떡을 보여주며 으쓱해하는 손녀들의 천진난만함은 내 눈꺼풀에 달아놓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명장면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집에서 아이들과 떡 빚기는 번거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주함과 번거로움 그 이상의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커다란 접시에 소복이 담긴 꽃 떡과 온 가족이 빙 둘러앉은 풍성한 한가위 식탁!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빨간 맨드라미 꽃이 고향에서의 증편과 송편 등 과거를 떠올리는 꽃만이 아닌, 새 풀잎 같은 손녀들 가슴에도 오색 떡과 함께 추억의 꽃으로 새겨진 것 같아 뿌듯하고 흐뭇했다.
이병옥 시인. 수필가
춘천에서 태어나 전업주부로 살다가 2004년 월간 『문학세계』 수필 부분에 당선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2015년에는 계간 『스토리문학』 시 부분에도 당선되었다. 저서로는 2012년 첫 수필집 『달과 별처럼 은은한 빛이기를』, 2017년 시집 『별 꿈을 꾸는 꽃』을 출간하였다. 현재 한국문인, 강원문인, 춘천문인협회, 강원수필, 춘주수필문학회 등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