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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3,1-9
십일조는 교만도 꺾는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목적대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창조자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법칙이기 때문에 요행이나 예외규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믿지 못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만 특별하여 예외규정이나 요행을 따르려는 마음인 ‘교만’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 비유를 드십니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믿는 교만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적게 던, 많게 던 매를 맞습니다.
‘교만’은 성경에서 ‘도시’나 성곽의 ‘탑’으로 상징됩니다.
바벨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탑이 허물어져야 교만이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 숫자 ‘18’은 ‘힘을 잃게 만드는 영’과 관련이 있습니다.
13장에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루카 13,11)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병마”의 희랍어는 “병(힘이 빠진)의 영”입니다.
‘18’년은 분명 참 능력이요 힘인 성령을 잃게 만드는 마이너스 에너지와 관련됩니다.
자아가 품어내는 병의 영에 사로잡히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힘을 잃습니다.
하느님 영과 육체의 에너지는 서로 반대됩니다.
저는 ‘18’을 ‘6+6+6’으로 봅니다.
‘6’은 동물의 본성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인 것입니다.
제물이란 이 삼구(三仇)를 죽여 그 피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되지 않으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완성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어떤 누구도 사랑의 계명으로 파견될 수 없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인데, 교만이 죽어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에 하느님 자녀로의 소명으로 파견될 수가 있습니다.
꽃이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힐 수 없듯, 삼구를 죽이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길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엔 ‘호크 아이’와 ‘블랙 위도우’가 서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주 절반의 생명을 날려버린 ‘타노스’를 이기는 방법은 6개의 ‘인피니티 스톤’을 다 모으는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의 인피니티 스톤은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절벽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희생만이 인피니티 스톤을 차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나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언 맨이 타노스의 손에 있는 인피니티 스톤이 박힌 장갑을 빼앗아 타노스를 칩니다. 그러면 타노스가 죽지만 자신도 죽을 것을 압니다.
자신이 죽어야 모든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아이언 맨은 자신이 죽고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패러디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영화에 이런 설정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
그래서 뭔지 모를 이 법칙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고 사람들은 이것에 감동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어떠한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첫 행위가 봉헌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삶은 봉헌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물에 피가 섞이게 하는 것’이 회개의 행위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피가 섞인 제물’이란
‘나의 죽음을 위한 봉헌’이란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제물 봉헌과 선교 소명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봉헌이 없으면 선교의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봉헌으로 나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도 손쉽게 오를 낮은 산도 힘들어서 오르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동기들과 놀러 가서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특별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끝까지 남아 누구보다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약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버텨 2시간 자고 산을 오르는데 땀에서도 술 냄새가 났습니다.
더 오르면 토할 것 같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어떤 좋은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이든 그것을 이루려면 자기를 포기하는 제물 봉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입니다.
오류가 없고 예외도 없습니다.
자신만 특별하다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자신을 죽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포도밭의 한 무화과나무’처럼 잘리게 될 것입니다.
자아를 죽여 그 피를 선악과와 섞어 주님께 봉헌해야만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를 뱀으로 보고 그 피를 선악과에 섞어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십일조로 이어져야 하고 그 십일조에 반드시 자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할 줄 안다면 열매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피가 섞인 제물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 봉헌해야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될 준비가 됩니다.
주님은 뱀과 같은 방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15) ‘십일조’를 자신을 죽이는 회개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피가 빠져나간 만큼 주님의 뜻이 머물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에페소 4,7-16
루카 13,1-9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예수님 시대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아픈 지역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비교가 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식민 통치나 허수아비 헤로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동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니, 눈엣가시 같은 지방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갈릴래아 대학살 사건도 그 지방 사람들이 폭동을 음모했다는 정보가 빌라도의 귀에 입수되어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안그래도 대학살 사건 때문에 갈릴래아 지방의 분위기는 흉흉했었는데, 하필 그 즈음에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는 높은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이나 실로암 탑 붕괴로 인한 압살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노 내지는 책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저절러진 인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불운은 하느님의 책벌이라기보다는 경고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갑작스레 닥친 날벼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악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5절)
불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 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 메시지로 여겨야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지금 현재 내 삶이 크게 불행하지 않고, 크게 요동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는 조만간 큰 코 다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종말도 그렇게 번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노력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 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고, 어쩔 수 없는 죄투성이 인간임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총에 호소함을 통해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을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루카 복음 13장 7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 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복음: 루가 13,1-9 :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올바로 서있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항상 회개하는 삶으로 그에 맞갖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주인은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7절).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앴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 나무는 남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 무엇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생활 속에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 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 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겨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