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하구 감천2동 태극도마을 주민들이 1960년대 손수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태극도 제공
- 범일동 안창마을은 통일교 성지, 감천동 문화마을은 태극도 본산
- 6·25전쟁 혼란 시기, 피란민 모이면서 각종 종교 생겨나
- 문선명 통일교 교주, 안창마을서 깨달음
- 새로 생기는 종교를 배격않고 수용·공존
- 부산 사람들이 지닌 다문화 · 다원주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
부산 사하구 감천2동 태극도 본산, 동구 범일6동 안창마을 통일교 성지, 기장군 기장읍 천부교(신앙촌), 영도구 동삼동 천리교 본부….
부산은 새로운 종교가 성장한 신흥 종교의 발원지로 꼽힌다. 물론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믿는 부산 시민이 훨씬 많다. 그러나 이들 신흥 종교가 배척받지 않고 뿌리를 내린 곳이 바로 부산이다. 태극도와 통일교는 6·25전쟁 때 부산에 온 피란민을 중심으로 둥지를 틀었다.
뿐만 아니라 금정구청은 남산동 이슬람 부산성원과 부곡동 오륜대 천주교 순교자 성지를 묶어 종교거리를 조성해 관광상품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슬람 부산성원과 인접한 안국선원은 부처님오신날과 라마단(이슬람 신도의 단식월) 기간 주차장을 공유하고 있다. 부산이 믿음과 수행에 너그러운 관용의 도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감천동 문화마을, 태극도 집단촌서 출발
현재의 태극도마을 모습. 박수현 기자·
빨강 파랑 노랑, 형형색색의 지붕과 물통들. 다닥다닥 붙어있는 나지막한 집들과 그 사이로 구불구불한 미로처럼 골목들이 얽혀있는 곳. 사하구 감천2동 태극도마을(일명 문화마을)이다. 성냥곽을 쌓아올린 듯해서 블록마을, 레고마을 같은 수식어가 붙었다.
태극도마을은 '1950년대 태극을 받들며 도를 닦는 신흥 종교인 태극도를 믿는 사람들 4000여 명이 모여 집단촌을 이룬 마을'이라고 사하구청이 펴낸 '사하지'에 기록돼 있다. 6·25전쟁 당시 피란와 보수동에 자리 잡았던 태극도 신도들이 정부의 이주 정책에 따라 감천2동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곳은 조철제 태극도주의 능소(陵所)와 도단(道壇)이 위치한 한국 태극도의 본산이다. 태극도는 무극도(無極道)라는 종교로 출발해 한때 신도가 10만 명을 넘었지만 1936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으로 교세가 위축됐다. 1948년 중구 보수동에 본부를 두고 태극도로 교명을 바꾸며 재기에 나섰다. 도주 사망 이후 대순진리회로 나뉘어졌다고 전한다.
태극도마을은 부산의 많은 산동네 가운데 '통일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1957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도시계획을 추진하면서 '모든 길은 통해야 한다'와 '뒷집의 조망권을 막지 말자'는 두 가지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주경업 향토사학자는 "천마산과 옥녀봉 사이 가파른 언덕에 경사지를 이용한 남향의 계단식 집단주거 형태는 이곳만의 독특한 장소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범일동 안창마을서 통일교 태동
부산 범일6동 수정산 자락의 통일교 '눈물의 바위'. 문선명 교주가 이곳에서 통일교 기초와 원리를 세웠다.
세계적인 교세를 가진 통일교(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의 성지 역시 오리구이집으로 유명한 동구 범일6동 안창마을 부근에 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통일교 신도들 사이에서 성지로 불린다.
마을의 입구에는 통일교의 조그만 교회당과 함께 기념관이 남아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문 교주가 1951년 1월 부산으로 온 이후 통일교를 일궈온 기록과 함께 7000쌍의 합동 결혼식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통일교 교구에서 파견나온 목사가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다.
수정산에도 통일교와 관련한 기념물이 남아 있다. 문 교주가 통일교의 기초와 원리를 세웠다는 '눈물의 바위'가 그것이다. 한때 하루에도 수백 명이 참배하러 찾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외국 통일교 신자들에게는 성지 순례 필수 코스이다.
■제2의 고향에 뿌리내린 신앙촌
나이가 지긋한 부산 사람의 뇌리에는 신앙촌이라는 이름이 향수로 남아 있다. 신앙촌은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기 위해 만들었다는 천부교 신도들의 공동체 마을로, 기장읍 죽성리 일대에 있다. 1970년대 5000여 명의 교인이 입주한 이래로 제1, 제2 신앙촌이었던 소사(경기 부천), 덕소(경기 남양주)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다.
천부교는 양말, 이불, 담요에서부터 두부, 간장 같은 식품과 의류,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기업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들 제품은 오래 전부터 일반인에게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인정받고 있다. 부산시내 곳곳에서 지금도 신앙촌 상회를 볼 수 있다.
■부산은 텃세 없는 정신적 수도
부산에서 다양한 신흥 종교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부산의 지리적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부산 사람의 기질 덕택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새로운 외래 문물의 수용이 수월했다. 일본에서 유입된 천리교가 영도에 자리잡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바다와 마주한다는 것은 중심에서 떨어진 변방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방이란 주류가 아닌 신흥 종교가 파고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6·25전쟁으로 부산은 임시수도가 됐다. 1953년 휴전협정 전까지 지정학적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은 전란 3년간 수도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부산은 쏟아져 들어오던 이질적인 것을 텃세 없이 포용한 정신적 수도였다.
부산 사람의 기질 역시 한몫했다. 전통 유지와 함께 새로운 것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면서 살아가는 바닷가 사람의 기질이 남아 있다. 지금도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이나 송정 바닷가에서 새벽에 촛불을 켜놓고 제를 지내는 무당이 있을 만큼 민간 신앙에 관대한 도시이다. 김희재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중구 영주터널 위 영선고개의 수많은 점집들은 '낮은 사람들이 높은 곳(산동네)에 산다'는 말처럼 서민들이 여전히 토착 신앙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부산 사람들은 신흥 종교를 이단이나 비주류로 배격하지 않고 껴안으며 공존해 왔다. 이것이 바로 부산이 지닌 다문화주의, 다원주의의 힘이자 정체성이다.
# 남산동 '이슬람 부산성원'
- 중동과 문화 교류차원 건립…사찰·교회와 인접해 위치 - '종교 공존타운' 상징 의미도
부산 금정구 남산동 이슬람 부산성원 전경. 박수현 기자 parksh@koookje.co.kr
부산 금정구 남산동에 이슬람 부산성원이 있다. 이 성원은 1970년대 후반 석유파동 이후 중동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민간 문화교류 차원에서 1980년 9월 건립됐다.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는 이 일대가 '이슬람 문화거리'로 꾸며졌다.
기독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이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슬람교의 성지가 부산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상징적 의미가 적지 않다. 다문화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을 들지 않더라도 새로운 랜드마크의 발굴에 목말라하는 지역의 입장에서 이슬람 부산성원의 가치 역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지역은 불교(안국선원), 기독교(이삭교회), 이슬람교(부산성원)의 세 종교가 이웃한 특이한 공간이다.
아쉽게도 도시철도 1호선 남산동역 8번 출구에는 불교, 기독교 관련 안내판은 있지만 이슬람 부산성원의 안내판은 뜯겨진 채 방치되고 있다. 도시철도 안내판이 유료화된 이후 이슬람 부산성원 측이 유지비를 마련하기 어려워서다. 유료화를 탓할 수는 없겠지만 이슬람 부산성원의 상징적 의미와 이곳을 찾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안내 표시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윤영준 부산대 사회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