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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르코 10장 28-31절
깊이 파묻힐 때
씨감자를 묻은 지 벌써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번듯한 텃밭이 아니라 짜투리 땅에 남은 씨감자를 대충대충 심었습니다.
정말 볼 품 없는 씨감자를 묻으며 다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 비가 오고, 쨍쨍 해가 뜨고를 반복하면서 다들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형제는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싹이 올라오고, 쑥쑥 자라나, 이제는 푸른 잎으로 무성한 제대로 된 감자밭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뜻밖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머지않아 풍성한 결실을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눈에 비친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정말 부족해 보이는 ‘나’이지만 하느님께 ‘푹’ 잠길 때, 온전히 그분께 깊이 파묻힐 때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축복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아주 자신 있게, 무척이나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보시다시피’란 어떤 말입니까?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스승님께서 잘 파악하고 계시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것처럼’
그만큼 베드로 사도의 자기 버림과 예수님 추종은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적당 선에서가 아니라 온전히,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열렬히, 7-80%가 아니라 120% 투신하는 적극적 버림이요, 적극적 추종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적인 버림이 가져다준 충만한 자유였습니다.
전적인 투신이 가져다준 원초적이며 근원적 행복이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주머니 속에는 땡전 한 푼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 온 천지를 다 얻은 충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현세적 삶은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의 순간들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일상은 고통과 십자가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눈은 벌써 이 세상 그 너머에 자리한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잘 버림으로, 그분께 푹 잠김으로, 120% 투신함으로 인해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이 세상 모든 것을 100배 누리는 법
오늘 복음은 어제의 부자가 예수님의 뜻대로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내어놓지 못하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간 다음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가진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과 당신 복음을 위해 내어놓는 것은 100배로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아주 쉽게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아버지께서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면 어땠을까요?
사제가 되어 만나는 수많은 아버님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집문서나 땅문서, 혹은 호적에 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제가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제관에서 잘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의 황창연 신부는 잠비아에 엄청난 크기의 생태 마을을 조성 중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어떻게 조달할까요?
그분은 유튜브에 잠시만 필요한 액수만큼 모금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단숨에 20억이든, 30억이 모입니다.
그러면 바로 계좌를 닫아버립니다.
돈을 기부하고 싶었어도 기회를 놓친 이들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신부님이 투명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더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돈이 모이는 법칙은 단순히 종교적인 자선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초밥 도시락을 팔아서 수천억대의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은 이러한 원리를 ‘수각 이론’이라 하여 가르칩니다.
수각은 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너무 빠르게 흐르지 않게 파 놓은 구덩이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수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롭게 하도록 물을 잠시 모아두는 수각은 언제나 새롭고 풍부한 물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식당 요리사가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주인을 망하게 하려고 양념을 팍팍 넣고 양도 많이 주었더니 장사가 더 잘 되어 주인이 더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에게 그 이로움이 더 모이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창조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알면 무엇이든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한 일을 하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면 돈을 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미국 에너지 기업 엔론(Enron)은 1990년대에 급성장하며 혁신적인 기업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엔론은 재생 에너지와 같은 선한 일에 투자하는 기업으로 홍보되었으나, 실제로는 경영진이 회계 부정과 사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2001년 엔론의 부정행위가 폭로되면서 회사는 파산했고, 많은 투자자와 직원들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이 도와달라고 할 때 만약 그 사람의 통장에 많은 액수가 들어있고 고급 승용차나 운동을 즐기는 사람임을 안다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왠지 모기에 피를 빨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을 쓸 때 물건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듯이 좋은 일에 쓰이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의 배를 불려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기에 피를 빨리는 느낌을 돈 주고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것에 집착을 버리고 좋은 일을 향해 모든 것을 흘려버릴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하늘에 두지 않으면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가난하게 죽게 된다.
내 것은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면서 더 모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가져도 가난하게 삽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거룩한 이를 통해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필요한 재물과 지식과 사랑이 충만히 지나가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아낌없이 이웃을 위해 내어주십시오.
내가 흘려보내는 것을 백 배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0,28-31: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청년은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을 준비할 줄 모르고 재물에다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시면서 슬픈 얼굴로 돌아가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재산의 번영,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 축복의 표지라고 믿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고, 번영하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는데 놀랐다.
여기서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박해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이 쉴 수 있는 집들과 교우 형제자매들과 어머니 같은 여교우들, 자녀들을 대신하여 대자 대녀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만나게 되었다. 토지를 버린 사람은 교우들의 토지에서 필요한 것을 얻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되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살게 해 주시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고 있는 것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의 관념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주변을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주님 안에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반에서 일등 하는 아이와 꼴찌 하는 아이 중에 누가 더 똑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일등이니 당연히 똑똑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600년대에 똑똑한 사람은 모두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이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면서 결국 종교 재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똑똑한 사람들은 과연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제일 똑똑한 선구자로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멍청한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판단은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정말로 똑똑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무엇 하나 못 하는 것이 없어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다른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나중에 동창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남달랐으니,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범했고, 아니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판단 자체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 삶 안에서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삶을 따라야 했습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당시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도 아니고, 세상의 높은 지위를 인정받는 삶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통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바보 멍청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 안에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닌, 오히려 내려놓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진정한 생활은 현재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이 순간을 최선으로 살려는 일에 온 정신력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레프 톨스토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베드1,16)
거룩함은
겸손에서 온다네.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세상의 꼴찌로 사시다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으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겸손의 극치를 보았네.
진리에 대한 경험이
저마다 다르듯
거룩함의 깊이도
겸손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든 건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긴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버리는 데 집착하면
오히려 버릴 수가 없습니다.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만큼 하느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가난을 지향하면서 사는데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가난이 아니기에
자유로운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가난하게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갇히고
돈에 쩔쩔 매고
오히려 베풀거나 나누지 못하고 짠돌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주 열심인데...
그 안에는 하느님이 안 계실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느님은 안 계시고
혼자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첫째처럼 보이지만 꼴지가 수두룩하고
꼴찌인 것 처럼 보이지만
진짜 첫째가 한 명 있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내세에서 받을 보상을
지금 여기서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말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