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변영주 감독의 기록영화 <낮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기록영화가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1996년과 1999년 <낮은 목소리 2, 3>을 연속해서 내놓는다. 김동원 감독의 <끝나지 않은 전쟁> (2008)과 안해룡 감독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2009), 권효 감독의 <그리고 싶은 것>(2012)이 그 뒤를 잇는다.
2014년 추상록 감독의 <소리굽쇠>를 시작으로 위안부를 다룬 예술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임선 감독의 <마지막 위안부> (2014), 조정래 감독의 <귀향> (2015),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 (2017),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 (2017) 등을 들 수 있다. <귀향>과 <아이 캔 스피크>는 각각 358만과 328만 관객을 불러 모아 화제가 된다.
캐나다에서 온 역이민자로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문칠 감독의 색다른 기록영화 <보드랍게>가 상영되고 있다. <보드랍게>는 1928년에 태어나 2010년에 타계한 김순악 할머니의 일대기를 다룬다. 영화는 위안부로 시작하여 양공주, 식모, 미제장사와 색시 장사를 거쳐 고향인 경북 경산으로 귀향한 김순악의 고단한 인생 여정을 그려낸다.
김순악의 기나긴 여로 1
1944년 여름 대구의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얘기를 듣고 고향을 떠난 순악은 대구를 거쳐 중국의 치치하얼을 지나 북경을 경유(經由)하여 하북성의 장가구까지 가게 된다. 평일에는 10여 명,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40-60명의 일본군을 받아야 했던 처절한 위안부 생활을 1년 남짓 경험해야 했던 만 16살 처녀의 기막힌 인생살이가 펼쳐진다.
박문칠은 <보드랍게>에서 만화영화(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하여 장면을 순화하고 이해하기 쉽게 그녀의 행장을 전개한다. 기록영화의 태생적인 한계인 건조함과 지루함을 자연스레 극복하는 좋은 방편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여성회 회원들의 담담한, 때로는 눈물을 동반한 서사가 불편하다거나 영화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으나 순악은 오갈 데가 없다. 서울역 앞에서 허기지고 외로운 그녀는 직업소개소 사람을 만나 서울에 자리한 유곽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매춘의 길로 들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다소 뜨악하다. 일본군 위안부로 갖은 고초를 겪은 그녀가 왜 하필이면 다시 매춘의 길을 걸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의 가련한 여주인공 팡틴이 떠올랐다. 유희하듯 팡틴을 버리고 달아난 사내 톨로미에스의 아이를 가진 채 미혼모로 살아야 했던 팡틴. 그녀는 문맹이었고, 그것 때문에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순악 역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불학무식한 형편이었다. 매춘은 순악의 막다른 선택지였다.
김순악의 기나긴 여로 2
2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순악은 매춘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하고 고향과 반대 방향인 여수로 떠난다. 술집에서 노래하고 술잔을 따르면서 생활하던 그녀를 마음에 둔 사내가 나타난다. 기마대 경찰이었던 임 순사였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인물도 좋았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이미 혼인한 임 순사와 정분이 난 순악은 예기치 못한 임신을 하게 된다.
‘나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니 고향에 가서 몸을 풀라’는 말과 함께 그는 순악에게 거금을 쥐어준다. 만삭의 몸으로 고향에 도착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어머니의 차갑고 매정한 말이었다. 몸을 풀고 난 그녀는 밑에 있는 두 동생과 어머니의 호구지책을 위해 다시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하여 동두천 미군 기지촌에 둥지를 틀기에 이른다.
색시 몇을 데리고 술장사와 미제물건 장사를 시작한 순악. 그녀는 거기서 미군들에게 호감을 얻어 적잖게 돈도 벌었으나 색시들과 잦은 분쟁을 겪는다. 더욱이 그녀에게 미제물건을 시원스레 갖다주던 흑인 상병의 아이를 출산하기에 이른다. 혼혈이 드물었던 당시 ‘틔기’라는 별명과 가무잡잡한 피부색 때문에 둘째 아들은 문제아로 자라난다.
아이를 잠시 고아원에 보내지만 아이는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살던 순악은 동두천 삶을 청산하고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한다. 그녀는 성실하고 음식솜씨도 뛰어나 집안 식구들에게 귀염을 받았다. 하지만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글로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느 날 해고당한다. 문맹의 서러움을 경험하는 순악.
김순악의 기나긴 여로 3
고향 언저리에 있는 폐가에서 생활을 시작한 그녀의 유일한 꿈은 공부 잘하는 장남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장남은 제대를 얼마 앞두고 돌연 월남전에 참전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무사히 돌아온 아들과 재회한 그녀의 바람은 다시 무너진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들과 함께 살 꿈을 꾸는 그녀를 차갑게 외면한 장남은 장가들어 딴살림을 내버린다. 서울에 사는 둘째 아들도 혼인해서 살건만 그녀에게 행패 부리기 일쑤였다. 술 먹고 들어와서 가재도구를 부수고 주먹질이 예사였다. 결국 순악은 다시 버려진다. 그녀는 남자들을 향한 뿌리 깊은 악감정과 사무친 원한의 여인이 된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증언이 나온 후에도 순악은 고향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그러다가 똑같은 처지의 위안부 할머니가 같은 동네로 이사 오면서부터 그녀의 삶은 다른 각도를 취한다. 저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대접도 받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그녀를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임으로 인도한다.
김순악과 여성회 그리고 압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순악에게 대구와 경산 여성회는 새로운 삶을 눈뜨게 한다. 활발하게 ‘수요집회’에 참여하고, 여성회의 각종 행사에도 얼굴을 내민다. 본디 활달하고 성정이 괄괄한 그녀는 흥에 겨우면 바로 몸을 흔들고 춤을 추곤 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술과 담배를 즐겼던 그녀가 노래하고 춤추는 영상은 따사롭게 다가온다.
생의 끄트머리에 그녀는 ‘압화’에 취미를 붙이고 활동한다. 정성스레 생화를 따서 잘 눌러 종이 위에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주위를 놀라게 한다. 문맹을 겨우 면한 그녀가 ‘평화’라는 글자 위에 압화를 만드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세상과 작별하기 전에 서툴게 자신의 이름자를 쓰게 된 순악의 해맑은 얼굴이 화면에 가득하다.
숫자조차 읽을 수가 없어서 버스도 타지 못했던 그녀가 문맹을 면했다는 사실이 대견하다. 그녀는 나라에서 주는 돈을 꼬박꼬박 저축하여 자신의 전 재산인 1억 원 정도를 둘로 나누어 기부한다. 절반은 자신처럼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위해, 절반은 위안부 역사관 건립 비용으로 쾌척한다. 그것이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의 초석이 된다.
숨을 쉬는 것처럼 간난신고를 평생 동반자로 삼아야 했던 김순악 할머니. 그녀가 듣고자 했던 말과 받고자 했던 선물이 우리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참 애묵었다고, 보드랍게 한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는기라.” 순악은 누군가에게 꽃을 받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훗날 압화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쏟았던 까닭이. 이제 그녀는 가고 없다.
김순악을 회고하는 박문칠은 매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는 순악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깊은 슬픔과 아픔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보드랍게>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박문칠. 2017년 성주 사드 배치 관련 기록영화 <파란 나비 효과>와 2019년 대구 퀴어 축제를 소재로 한 <퀴어 053>을 연출한 그의 장도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