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용병 집단 '바그너 그룹'과 그 조직을 이끄는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복(福)과 운(運)도 이제 끝나가는 듯하다. rbc 등 현지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프리고진과 그의 최측근이자 '바그너 그룹' 사령관인 드미트리 우트킨 등이 탑승한 엠브라에르 레거시(Embraer Legacy) 항공기가 23일 오후 6시 30분(현지시간)쯤 트베르주(州) 북서쪽 볼로고프스키 지역에서 추락했다.
사고 현장에서 그의 시신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러시아 항공당국은 프리고진이 사고 항공기에 탑승했다고 밝혔다. 탑승자는 승무원 3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이다. 그의 전용기 추락 사건을 놓고, 벌써부터 우크라이나와 서방 외신에서 각종 음모론이 쏟아지고 있다.
프리고진 '바그너 그룹' 수장 전용기의 추락 장면/텔레그램, 현지 매체 영상 캡처
프리고진과 우트킨 등 '바그너 그룹' 지휘관들이 이번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최종 확인되면, 용병들은 졸지에 '부모 잃은 고아' 신세로 전락할 전망이다. 이틀 전(21일)에만 해도 프리고진은 사막에서 위장복을 입고 소총을 든 모습으로 "모든 대륙에서 러시아를 더욱 위대하게, 아프리카를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는 영상을 올렸다. 6·24 군사반란 이후 선택한 '제 2의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이틀만에 한 여름 밤의 꿈으로 스러질 모양이다.
푸틴 대통령의 총애를 업고 지난 2014년 '바그너 용병그룹'을 만들어 돈바스 지역(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의 내전을 시작으로 시리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 주요 분쟁지역을 휘젓고, 이번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최대 격전지 바흐무트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던 프리고진이었다. 러시아군 최고 지휘부(쇼이구 국방장관과 게라시모프 총참모장)를 자신의 세력으로 갈아치울 욕심에 '군사반란'까지 일으켰으나, 그것은 '신의 한 수'가 아니라 '몰락의 한 수'가 되고 말았다. 사실, 러시아(제정러시아와 소련) 역사에서 군사정변이 성공한 것은 1917년 공산혁명이 거의 유일하다.
군사반란 실패후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은 급속히 내리막 길을 걸었다.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벨라루스로의 망명은 허락받았지만, 그를 따른 바그너 용병은 4천~5천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용병들은 새로운 지도자(안드레이 트로셰프)와 함께 러시아 국방부와 새로 고용 계약을 맺었다.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바그너 용병'이라는 말도 사라졌다.
벨라루스 '바그너 그룹' 캠프(위)와 전장을 직접 방문한 프리고진의 모습/텔레그램, 현지 매체 영상 캡처
프리고진은 벨라루스의 '바그너 그룹' 캠프와 러시아, 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는 모습이 수 차례 확인됐다. 사고가 난 이날도 프리고진 소유의 또 다른 전용기가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돼 '프리고진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군사반란의 실패는 또 군부내 친 프리고진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가 차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으로 밀었다는 세르게이 수르비킨 전 특수군사작전 총사령관(부사령관 겸 러시아 항공우주군 사령관)과 자포로제(자포리자) 지역 방어에 나선 제 58 연합군 이반 포포프 장군, 블라디미르 셀리베르스토프 제 106 공수여단장 등이 옷을 벗은 것으로 전해졌다.
포포프 장군은 항명으로, 바흐무트 인근에 주둔한 제 106 공수여단의 셀리베르스토프 장군은 알렉세이 듀민 툴라 주지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 경호실장 출신의 듀민 주지사는 프리고진이 쇼이구 국방장관의 후임으로 낙점한 전 국방차관 출신이다.
듀민 툴라주지사와 자리를 함께 한 셀리베르스토프 제106 공수여단장. 이 공수여단의 본부가 바로 툴라에 있다/사진출처:스트라나.ua
내외신의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이는 역시 수로비킨 전 사령관이다. 군사반란 이후 내내 모습을 감췄던 그는 22일 러시아 항공우주군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CIS 국방부 장관 협의회 산하 대공방어 문제 조정위원장이라는 명목상의 자리에만 남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러시아 국방부와 방공위원회 홈페이지에 조정위원장으로 올라 있다.
수로비킨 위원장의 이름이 남아 있는 러시아 국방부 홈페이지/캡처, 우라.ru
rbc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수로비킨이 물러난 항공우주군 총사령관 자리는 빅토르 아프잘로프 부사령관이 이어받았다. 2017년 11월 총사령관에 오른 수로비킨이 시리아 군사작전을 지휘할 때 그 자리를 대행한 바 있는 방공군 전략가다. 당시 시리아에서 수로비킨은 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 폭격을 명령하는 바람에 서방 외신들로부터 '아마겟돈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군 경력에서 최전성기는 우크라이나전 총사령관을 맡은 지난해 10월부터 4개월 안팎이다. 올해 1월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으로 총사령관직을 물려주고 3명의 부사령관 중 한명으로 밀려났다.
쇼이구 국방장관에게 전황을 보고하는 수로비킨 총사령관/사진출처:러시아 국방부
수로비킨 장군/사진출처:러시아 국방부 홈피
아프잘로프 신임 사령관은 1989년 푸시킨 고등군사학교, 2000년 방공군사대학, 2010년 러시아 연방군 참모총장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방공 미사일 부대와 공군, 항공우주군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2017년 7월에는 항공우주군 부사령관 겸 동부군관구 공군·방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수로비킨의 해임이 처음 확인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운영을 중단한 반체제 성향의 라디오 방송 '에흐 모스크비'의 보도국장 알렉세이 베네딕토프(러시아 당국에 의해 외국 대리인으로 지정/편집자)에 의해서다. 이후 rbc 등 러시아 언론들이 자체적으로 그의 해임 사실을 확인, 보도했다.
수로비킨은 프리고진이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가장 먼저 '반란 중단'을 촉구하는 영상 메시지를 올렸다. 하지만, 이후 그는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수로비킨이 사전에 반란 계획을 알았고, 표면적으론 반란 중단을 요청하면서도 실제로는 프리고진을 도왔다는 관측은 그래서 나왔다.
그와 프리고진의 관계도 도마에 올랐다. 수로비킨이 특수 군사작전 총사령관에 임명되자, 프리고진은 "러시아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라고 추켜세웠다. 친 프리고진 텔레그램은 공공연하게 듀민 툴라 주지사와 수로비킨 장군가 쇼이구 국방장관과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사반란이 실패한 후에도 그같은 논조는 계속됐다.
7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셀리베르스토프 제106 공수여단장이 듀민 주자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물러났고, 친 프리고진 채널의 기세도 꺾이면서, 프리고진의 군 장악 야망은 '헛된 망상'이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힌 러시아군내 인맥이 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도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켜 왔는데, 6·24 군사반란 이후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제는 프리고진마저 사라졌으니, 러시아 군부는 쇼이구 국방장관-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