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와 남한 산성을 찾아서
고향출신 신앙 선후배와 동지들의 모임인 진우회(珍友會)모임의 초대를 받고, 2019년 3월 27일 서울 강동구청 역으로 떠났다.
천안에서 강동구청 역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판단되어, 서둘러 일찍 길을 떠났는데 가다보니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어딘가 가볼만한 곳이 없을까 생각하다 송파구 석촌호수에 있다는 삼전도비를 떠올렸다.
인근에는 석촌동 고분군과 몽촌 토성산성이 있긴하나, 이곳들은 이미 답사했던 곳인지라, 미쳐 가보지 못한 삼전도비를 꼭 한번 가보기로 마음먹고, 그쪽을 물어 물어가며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막상 삼전도비에 도달해보니 내가 이미 거쳐갔으면서도 그때는 모르고서 그냥 지나쳤던 곳이었다.
그러기에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삼전도비가 있는 도로 건너편을 바라보니, 거기도 숲이 보이길래 저기는 뭐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곳은 동호라고 일러준다.
석촌호수가 서호(西湖)와 동호(東湖)로 나뉘어 불리고 있다는 사실도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고...
대충 구경을 끝내고 잠실역에서 전철로 강동구청역까지 간 다음, 모임이 있는 태창타워 2층에 자리한 "수라연"을 찾았다.
석촌호수에 이르러....
석촌호는 송파구 잠실동에 있으며 송파대로에 의해 동호와 서호로 나뉘어져 있다.
옛 한강변 송파나루가 있던 한강 본류였는데 1971년 잠실구획정리사업으로 진행된 잠실의 육속화에 따라 물막이공사가 진행된 결과 ‘석촌호’라는 샛강이 매립되면서 내륙 인공호수가 조성되었다.
호수를 중심으로 1981년 석촌호수공원이 새로 문을 열었는데, 동호는 조깅과 자전거 산책 코스 및 주변 직장인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으며, 서호는 롯데월드의 매직 아일랜드와 서울놀이마당이 있어 야경과 더불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석촌호수의 풍경
이곳에 벚꽃들이 피면 무척 아름다운 꽃길이 펼쳐진다.
건너편에는 어린이들의 꿈의 동산 롯데월드가 바라보인다.
파릇 파릇 새싻들이 피어날 기세다
1주일만 지나면 벚꽃이 만개할듯 싶다.
삼전도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여, 1637년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식을 하게 되었다.
항복 의식으로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 번 절을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기를 반복하는 ‘삼배구고두’를 하도록 했다.
3배 9도구란 한번 절할때마다 머리를 땅에 3번씩 쿵쿵 찧도록 했던 잔인한 수모인데,소리가 작으면 다시 하라고 하였다하며,머리를 땅에 찧어 박으니 피가 철철 흘러났다고 전한다.
청나라 태종은 이렇듯 잔인한 항복 의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공덕을 새긴 삼전도비라는 비석을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까지 하였다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삼전도비의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당시의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바뀌었다고 한다.
비석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한서린 유적이지만, 비석의 앞면에는 몽골 글자, 오른쪽에는 만주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비문이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삼전도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왕조의 최대의 수치가 담겨있는 일이다.
나라를 쳐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임금까지 머리를 땅에 쿵쿵 찧도록 만들어 피를 철철 흘려가며 절을 하도록
했다니 약소민족의 설움이 오죽하였겠는가!
한맺힌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만,가기다가 대청황제 공덕비까지 세우도록 하였다니 더욱 기가 찬 노릇이다.
아,서글픈 이 민족의 역사여!
지금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길을 물어본다.
이곳은 동호쪽 풍경이다.
바로 위쪽으론 한국에서 가장 높다는 롯데 타워 건물이 있다.
호숫가에서
파릇파릇 움터오는 호숫가
물오른 버들가지 하나 꺾어
풀피리 불고 싶어진다
계절은 어김없이 흐르고
어디론가 뛰어 달려 가는데
세월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초록 들판에 누워
파란 하늘,그리고 별들 바라보며
푸른 꿈 키우던 어린시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아릿한 고향의 정경과 내음이
주름진 눈가에 맺혀오는데
삐리릭 삐비리릭
버들피리 함께 불던 그날의 소녀야
다시 돌이킬수 없는
아,그 시절이 마냥 그리워 진다
잠실역에서 강동구청역으로....그리고 수라연을 찾았다.
수라연 밥상
참고로 수라상(水刺床)이란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궁중 음식에서 왕에게 올리던 밥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수라'라는 말은 고려 원종때 전해진 몽골어...
수라상은 12첩 반상차림으로 원반과 곁반, 책상반의 3상으로 구성되어 진다고 한다.
수랏상을 받아들고....
반가운 만남,건배를 나누며....
수라연 대표 모자
강동구청역에 내걸린 수라연 광고
수라연에서 헤어진후, 남한산성을 가보기 위해 남한산성역으로가다 만난 아름다운 꽃이.....
십자가들이 줄지어 있는 이색적인 풍경.....
저토록 십자가 교회들은 많은데,세상은 왜 평화롭지 못하고 온통 시끄러운 싸움판일까??
예수는 도대체 무엇을 구원했고,또 무엇을 위해 왔다가 십자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단 말인가!
남한산성을 오르는 초입
내가 남한산성을 찾은 까닭이 있다.
그것은 삼전도비의 한을 남긴 인조의 발자취를 다시한번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이곳 남한산성으로 임금이 피신할때,임금을 등에 들쳐 업고 올랐던 장수가 진도출신이었다고 전한다.
맨발 지압장이 있었고.....
약사사라는 사찰로 가는 길목
바로 입구에는 남한산성 탑공원이 있었고....
이곳에 조성된 수많은 돌탑들이 약사사 불자들이 정성껏 쌓게된 거란다,
약사사로 가는 길목엔 이런 조형물들이 줄지어 있다.
불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소원성취를 희망하는 기원에서 남긴 자취들이다.
10여분 이상 숨차게 올라서야 드디어 약사사에 도착을 했다,
약사사라는 이름은 전국 여러곳에 산재해 있는것 같다.
고향 진도에도 남산 자락에 약사사가 있는데....
서울 개화동 개화산,인천 간석동 만월산,경북 구미 금오산,경기 평택 비파산,공주 유구 태화산등지에 약사사란 이름의 절들이 있다.
남한산성 약사사는 청량산과 검단산을 잇는 능선 서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써,대한불교 여래종의 총본산이라 한다.
본래 이곳은 원효대사가 암자를 세웠다는 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이곳을 증축하여 불사를 일으키면 만년 성지가 될꺼라는 현몽에 따라 큰 사찰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사찰이 위취한 곳은 산세가 험하고 숲이 우거진 첩첩산중 좁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이라서 누구든 수행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선 쉽게 오를수 없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약사사를 답사하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오르면서 만나 본 정자.
영도사로 가는 길목에....
어디나 명산을 가면 수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도 백련사,덕은사,영도사로 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서있다.
남한산성 건양대
통일 기원탑이란 돌탑들이 서있기도....
백련사에 도착하여.....
백련사 앞에도 소원탑이란 돌탑들이 쌓여있다.
중원 약수터.
이곳을 오르는 길목엔 곳곳에 약수터가 보였다.
30여분간 숨가쁘게 오르니 드디어 산성이 나타났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병자호란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곳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곳이며,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좀더 역사적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산성로 기념탑
누비길 남한산성길 구간이란다.
남한산성은 여러차례 다녀가긴 했지만,오늘 오르는 길은 초행길이다
지금 뒤켠으로 보이는 곳이 지화문이란다.
남한산성은 청량산과 검단산에 걸쳐있다.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은 해발 481,2m,이곳 산세의 주봉인 검단산은 해발 534,7m이다.
지화문을 통과하여 광주시 쪽에 들어왔다.
전면에 남한산성 안내도가 자세하게 걸려 있고....
여기에도 멋스런 돌탑들이 정교하게 쌓여있다.
수어장대와 서문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산행 목표를 수어장대까지로 정하고,거의 목전에 다달았는데....
앗불싸! 모자를 쉬던 곳에 놓고 오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라는가 보다 하고 뒤돌아 내려오며 모자를 찾았다.
그런데 거기서 멈춘게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부지런히 서둘러 온다고 했지만,집에 도착한 시간은 8시를 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수어장대나 서문을 가보지 못했다면, 내 성미상 기필코 재도전을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하산길에 돌탑을 다시 담아본다.
내려 오는 길은 내리막길이다보니 수월하게 달려왔다.
다람쥐처럼 달려오긴 했는데,나이는 속일수 없나보다.
다리가 태옥이 날듯 뻐근하고,평지에 다달으니 발걸음이 천근이나 짊어진듯 무겁기만 했다.
나옹선사의 유명한 싯귀가 눈에 들어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명월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욕심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바람같이 구름같이 살다가 가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