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24]어느 ‘간서치看書痴’의 유별난 인문학 특강
책만 아는 바보, 간서치看書痴는 조선시대 이덕무가 대표적일 터이지만, 대한민국에도 간서치는 얼마든지 있을 터. 그 중에 한 명을 최근(지난해 11월) 사귀게 됐다. 고창 방장산 아래 <책이 있는 풍경(책풍)>의 촌장 박영진이 그이다. 그의 스토리를 조금 들어보니 아예 기가 질렸다. 그가 사모은 장서藏書 4만여권을 업고 이고 지고 다니며, 전주 등 7곳에서 돈 전혀 안되는 ‘헌 책방’을 꾸렸다는 게 아닌가. 아는 사람은 알리라. 책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그게 돈이 안된다는 것은 철부지 아이도 알겠다. 명색이 생활인이자 가장일텐데, 이런 미련퉁이가 있을까? 싶었다. 소득이라야 연 100회 이상의 인문학특강이 거의 전부였던 듯. 그런데도 ‘창비40주년 특별상 공로상’을 받으며 문학평론가로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알렸다. 1965년생, 학력도 S대 국어국문학과, 빵빵하다. 2004년 대한민국문화예술대상, 2005년 대한민국신지식인대상, 뭔가 그럴 듯하지만 보지 않아도 실속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그가 고향인 고창의 신림면에 용케도 작은 문학관을 차려 촌장村長을 자임했다. 아마도 ‘책의 신’이 봐준 듯하다. 실제로 ‘책마을’인 것은 분명하다. 시인의 방, 한국문학관, 인문학관, 어린이도서관, 작가의 방, 북카페 등 잇달아 있는 서너 채에 온통 책뿐이다. 인문학당은 150여명이 앉을 수 있고, 간간이 안면있는 작가들을 초청, 북토크를 열어 책마을의 존재를 그나마 알리고 있다. 순전히 자비로 10년을 운영하다 죽지못해 낸 아이디어가 회원제였는데, 300여명이 된다던가. 기신기신(간신히) 꾸려가는 ‘애련愛憐한’ 책마을 촌장이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의 인문학 번지점프하다>(도서출판 등, 2023년 10월 펴냄, 382쪽, 19500원)라는 책을 펴냈다. 책값도 안받고 초면인데도 사인까지 해 덥석 안겼다. 연 100회이상 특강을 하는 ‘보따리강사’의 9편의 인문학수업 내용이다. ‘글씸(글의 힘)’과 ‘입씸(말의 힘)’이 명강名講 수준이다. 인문학은 솔직히 ‘구라’라 할 수 있는데, 구라발이 장난이 아니다. <봄날은 간다>(1953년 백설희 노래)라는 노래를 아시리라. 이 노래를 주제로 15쪽에서 61쪽까지 ‘썰說’을 푸는데 탄복을 했다. 어느 시전문지가 국내 유명 시인 100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을 물었는데, 단연 <봄날이 간다>가 1위. 2위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3위 <북한강에서>. 가장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노래. 가장 많은 시인들이 읊은 시. 소설로, 희곡으로, 영화로, 드라마로, 연극으로, 악극으로, 뮤지컬로, 심지어 미술로도 영역을 변주하여 넓힌 그 노래. 그의 전공인 문학文學으로 풀어낸 <봄날이 간다>는 순식간에, 누구라도 꼭 한번은 읽어볼만한,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가득이다. 재밌다. 인문학수업 1강으로 이보다 더 재밌는 주제가 있을까 싶다.
다음 수업의 주제만 일별해보자. ‘원조 국민시인’은 누가 뭐래도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이다. 짧은 생애에 토해낸 그의 시들이 노래로 사랑하는 전국민에게 사랑받은 게 무릇 기하인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으로 시작하는 <부모>를 비롯하여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못잊어> <개여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산유화> <먼 후일> <초혼> <제비>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실버들> 등등. 모두 소월의 시를 노래로 부른 것이다. 시와 노래의 만남(앙상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는 명실공히 한과 슬픔으로 얼룩진 민중의 상처를 사랑으로 승화시켜 보듬어 안은 민족시인이어서, 그 울림이 너무나 크고, 고스란히 우리에게 쉽게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이 강의록 역시 63-98쪽이어서 한 편 한 편 감상하다보면 1시간 강의로는 택도 없을 듯하고 너무나 아쉬울 것같다.
3강은 <상록수>를 쓴 심훈으로,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작가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4강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를 쓴 월북작가 박태원의 이야기이다.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박태원은 식민지치하 우리 모더니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죽하면 소설 제목을 패러디한 작품들이 줄줄이 나왔을까. 그가 쓴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은 김일성이 완독하며 상찬했다고 전해진다. 말년에 눈이 멀어 아내가 구술을 받아 완성시켰다던가. 시인 백석의 생애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산 비운의 문학인의 휴먼스토리도 가슴을 에이게 한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인문학수업을 모두 듣고 싶을 정도로, 점점 더 빠져들어가는 5강은 구한말 여성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진채선(흥선대원군의 비극적인 첩이 됐다)과 신재효의 러브스토리이다. 제자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 신재효가 지은 <도리화가>의 노랫말을 보면 가슴이 다 먹먹해진다. 소설의 주제로 이만한 사랑이 없기에 여러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6강은 우리 삶의 영원한 화두 <엄마>이다. ‘엄마’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아름다운 기도'라는 김종철-김종해 형제시인이나 요절한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 그리고 일본의 우화 <우동 한그릇>을 예시하며 우리를 울리더니,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로 강의를 멋지게 마친다. 박영진 평론가는 틀림없이 말하는 거나 글쓰는 것이 시종일관 똑같은 사람일 듯하다.
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하였다>를 쓴 성석제의 작품세계는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힘든 게 이번 수업의 단점이다. 그의 작품은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주인공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게 특기이자 특징인 듯하다. <황만근...>은 아주 준수하고 의미있는 작품이다. 8강은 선정된 책이 좀 뜬금없는 듯하다. 2021년 고창군이 <올해의 한 책 읽기>를 처음 시도하면서,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선정했다는 뉴스를 보고, 강의 주제로 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들어 보았겠지만, 실제로 다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처절한 독립운동을 중국에서 전개하면서, 윤봉창과 이봉창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고뇌가 고스란히 담긴 <백범일지>야말로 세세연연 우리 민족의 고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마지막 수업 9강은 조선조 ‘국민애인’이라 할 만한 황진이의 이야기로 피날레를 찍는다. ‘황진이, 황진이, 황진이’를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의 주인공, 그녀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일개 기생인가? 사랑의 화신 또는 여신인가? 오죽하면 평양감사 임백호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워난다/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그녀의 부재不在를 안타까워 했을까?
아무튼, 문학평론가 박영진의 입담과 글담이, 마치 옆에서 도란도란, 새살새살 이야기하듯 구수하고 재밌다. 편편이 시간이 금방 간다. 그런데도 두 달이나 걸려 읽고 이제서야 이런 졸문을 쓰게 돼 미안하다. 노래와 문학의 만남도 좋았고,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했던 작품들의 속살을 잘 풀어내줘 고맙다. 결론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문학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풍요롭게 읽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우리네 삶이 ‘인문학’을 통함으로써 더욱 기름지고 윤택해져야 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