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9
7월22일[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연중 제1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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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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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a_gxIzoX1E
(우경민 헨리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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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의 인생 역전이 제 삶의 여정 안에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오해함으로 인한 큰 오류도 많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오해입니다.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조차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 막달레나,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하나로 묶어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말씀하셨고, 그녀는 창녀였다고 강론을 하셨습니다.
아직도 어떤 분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팩트 체크를 해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① 막달라 지방 출신 마리아
②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 입음
③ 막대한 재산 기반으로 예수님과 사도단 의식주 해결
④ 치유 받은 이후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닌 여제자
⑤ 예수님 십자가 죽음 현장에서 성모님과 그 자리를 지키고 시신을 수습
⑥ 예수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고 사도들에게 알림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토록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1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성녀와 창녀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다행히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복구시켰습니다. 1969년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세 여인이 별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녀의 사도적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여사도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례력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키는 교령을 발표하셨습니다.
한없는 자비와 연민의 시선을 지니신 분께서 능력과 사랑으로 가득 찬 당신의 손길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펼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세상 화사하고 따뜻한 인생의 봄날이 그녀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었습니다. 세상 좋은 것들에 대한 미련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 시간, 재산, 능력, 마음, 영혼,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예수님을 추종하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인생 역전이 제 삶의 여정 안에 똑같이 반복되었음이 확실합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비참한 제 인생이었는데, 너무나 삶이 혹독해서 다 때려치우고 포기하고 싶었는데, 은혜롭게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손 내밀어주셨습니다. 일으켜 세워주시고 힘내라고 등을 두드려주셨습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 앞에 취할 행동을 다른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되살려 주신 주님의 크신 은총에 깊이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그분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계획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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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스승은 제자들에게 최고를 기대해야 한다>
말 조련사 아버지를 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설계해 보라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소년은 평소에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이 다음에 10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목장의 주인이 되리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7장의 종이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꼼꼼하게 작성하여 다음 날 선생님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소년의 숙제에 빨갛게 x표를 치며 말했습니다.
“얘야. 너와 너의 아버지는 지금 너무 가난하단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니? 좀 더 현실적인 계획표를 작성해 오면 그때 다시 점수를 주겠다.”
하지만 소년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냥 x를 주세요. 저는 점수와 제 꿈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소년은 그의 꿈대로 100만 평의 목장 주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늙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100만 평에 달하는 엄청난 목장의 규모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장 주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보게! 나를 기억하겠나? 30년 전 자네의 100만 평 꿈에 x표를 했던 선생이라네. 아,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꿈에 x표시를 한 꿈 도둑이네, 꿈 도둑! 아, 그런데 자네만이 나에게 꿈을 도둑맞지 않았구먼.”
제가 강의하다가 천국에도 서열이 있다고 했더니 어떤 분들은 그것을 꽤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기는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엔 하늘나라에는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존재하려면 가장 큰 사람도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서열’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도록 가르치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하늘에서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19)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나누는데 자꾸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실까요? 가르치는 사람은 ‘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더 높은 꿈을 주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더 높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만큼 그 스승은 하느님 나라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가장 높은 영성의 단계에까지 오른 여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마리아를 만나주신 데에는 그만큼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를 만나는 장면과 다르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이 하나의 정원인 것처럼 마리아도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동물처럼 사는 이들을 당신 옆구리에서 빼낸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나게 하여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창세기의 아담입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이들은 아담의 하와가 되어 아담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여기서는 “마리아!”란 이름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라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스승은 자신의 제자가 자신처럼 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당신 자신처럼 성장시키고 싶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라고 하십니다.
“나와 너의 아버지는 같은 하느님이시다.”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큰 죄인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라뿌니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조던 피터슨은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성장할 무렵 자신의 동네에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당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아 자신보다 더 잘나고 운동과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도 대부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던 피터슨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도시의 대학에 나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이 되었습니다. 현재 시골 친구들은 술과 세상사에 짓눌려 자신도 못 알아볼 만큼 완전 몸과 마음이 피폐한 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큼 나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보며 “너는 하느님이야!”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꿈을 주러 오신 참 스승이십니다. 가장 높은 것을 기대하는 스승이시기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분에게서 배워 사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스승이 됩시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장 높은 이상을 바라시는 참 라뿌니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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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카 8,2),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하나로(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난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 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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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세계 3대 테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세 카를로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입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어느 날 호세 카를로스는 고치기 힘든 병이 생겼습니다. 유명한 병원을 다녔지만 고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카를로스는 한 병원으로부터 초대를 받았고, 기적적으로 완쾌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카를로스에게 익명의 독지가가 자신의 재산을 주면서 카를로스를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너무나 고마워서 익명의 독지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독지가는 카를로스의 경쟁자였던 플라시도 도밍고였다고 합니다. 경쟁보다는 음악으로 맺은 우정이 더 진하였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경쟁자이자 친구였던 세계 3대 테너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월드컵에서 함께 공연하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자선 공연도 하였습니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나누게 되지만 우정은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지난 이탈리아 성지순례 중에 라테라노 성당 앞에 있는 ‘계단성당’을 찾았습니다. 순례의 마지막 날이라 모두 피곤했지만 가이드의 말을 듣고 모두 계단성당으로 갔습니다. 계단성당을 무릎으로 오르면서 모두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 계단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판 받았을 때 오르던 계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부족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것처럼 계단을 오르면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복사를 서는 아이부터 80에 가까운 어른까지 계단을 올랐습니다. 계단을 오를수록 무릎이 아팠지만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출세, 명예의 계단을 오르려고 합니다. 앞서 가는 사람은 끌어내리려고 하고, 뒤쳐진 사람은 밀어내려고 합니다. 천국의 계단은 어떤 계단일까요? 앞선 사람을 잡아 끌어내리는 계단은 아닐 것입니다. 뒤처진 사람을 밀쳐내는 계단도 아닐 것입니다. 천국의 계단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는 계단입니다. 천국의 계단은 뒤에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계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하셨지만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던 여인들도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여인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육체의 질병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두 번째 여인은 죽어야 할 운명에서 살아난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죽어야 할 여인은 예수님 때문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 여인은 일곱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살았습니다. 살아 있지만 삶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참된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막달레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일수도 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 수도 있고, 오랜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일수도 있고,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 일수도 있고, 부정한 행위를 한 후에 잡혀온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막달레나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죄 중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지금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지고, 원망과 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받은 것 많았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 지낼 때,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능력과 재능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열정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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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든 복음서가 공통되게 말하는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증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당시의 사회 안에서 여인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으로 들여다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복음은 제자들보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무덤은 비어 있었음을,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린 이도 그라고 기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복음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님께서 비슷하게 질문하시는 내용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당신을 따라오는 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1,38) 같은 형식의 질문이 다시 나오는 것은 올리브 동산에서 잡혀가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경비병들에게 두 번이나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그리고 마지막은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누구를 찾느냐?”
무엇을 찾는지, 다시 말하여 무엇을 바라는지 물으시는 예수님의 첫 질문은 복음서의 후반에 ‘누구’를 찾는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짧은 형태의 질문이지만 이로써 요한 복음서는 독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복음은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이제 복음은 우리가 관찰자로 남지 않고 그 이야기 안에 함께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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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교회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주로 창녀나 죄 많은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한 모습 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며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루카 8,1-3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와 그분의 장례 때에 그 곁에 머물렀던 이였습니다.(마르 15,40-47 참조)
또한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빈 무덤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한 첫 증인이며 선포자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 성녀를 일컬어 사도들이 세상에 선포할 것을 미리 그들에게 선포한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하였습니다.(「요한 복음 해설」 참조).
오랜 시간 우리가 ‘사도’에게만 의미를 두느라 ‘사도들을 위한 사도’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사도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초대합니다. 그 회복은 예수님께 충실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곧 그분의 말씀과 삶에 온전히 충실하고자 하는 이, 복음에 더욱 충실해지는 이가 바로 ‘사도’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세상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고 증언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거나 치유된 이들, 세상 안에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사도인 저의 복음 선포를 힘 있게 만들어 주는 ‘사도를 위한 사도’입니다. 더욱 충실한 사도가 되게 해 달라고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전구를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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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정원순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사람은 오감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며 정보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행동을 한다. 말하자면 체험이란 우리의 시각·청각·체각을 통하여 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체험한 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발달하고, 어떤 사람들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발달하여 들을 때 더 신속하게 정보를 알아듣고 수집하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몸으로 느끼는 것을 다른 기관보다 빨리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네 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하는 지안,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심안,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이 네 가지 눈을 모두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한두 가지 눈이 부족한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두 천사와 대화하고 나서 뒤로 돌아서자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20장 14절-15절)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요한 20장 16절) 그 순간 마리아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들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는 그 순간에 마리아의 영안이 뜨여 스승님을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체험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통합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인생이란 자신이 인생을 아는 만큼 살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체험한 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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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흘려도 공허한 가슴은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7,53),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루카 8,2),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요한12,3) 등 복음 속의 다양한 여인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마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왔고 치유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눈에서 절망의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 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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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5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오신 노부부가 있습니다. 기자가 할머니께 여쭤보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사신 걸 보면 할아버지께서 좋은 분이셔서 그렇죠?”
그러자 강하게 손사래를 치시며 절대로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나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사고도 많이 치고, 얼마나 이기적인지 지금도 자기밖에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자는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할아버지를 선택하지 않으시겠네요.”라고 물었습니다. 잠시 고민하시던 할머니께서는 뜻밖에도 다시 태어나도 할아버지를 선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사람한테 맞추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겨우 이렇게 한 명을 맞췄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또 맞출 수가 있겠어?”
좋은 사람과만 같이 살 수 있을까요? 어쩌면 맞춰 사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참 좋은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좋다고 해서 계속 주님과만 함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바쁘다고, 때로는 피곤하다고, 또 때로는 어쩔 수 없다면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먼저라면서 주님께 맞추는 사람은 어떨까요? 아주 피치 못할 사정이 없고서는 늘 주님이 먼저가 됩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가 주님의 좋은 점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점 찾기가 아니라, 주님과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주님께 맞추는 데 집중할수록 지금을 훨씬 더 잘 살 수가 있습니다.
주님과 맞추는 데 온 힘을 쏟은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이십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성녀께서는 주님과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을 어두울 때 찾아갑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다녀간 뒤에도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맞추려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을 향한 열정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주님께 맞추려는 그녀의 노력은 계속해서 주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 맞추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또 모범을 보여주시는데, 자기의 사랑을 보면 과연 주님과 맞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 맞추는 사랑의 삶이 필요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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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곳에 제가 있습니다>
요한 20,1-2.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그곳에 제가 있습니다>
나 있는 여기에서
당신 계신 그곳으로
애틋한 마음 서툰 발걸음으로
이른 새벽길을 달려갑니다
하지만 희망 사라져
당신 계셔야 할 그곳에
당신 계시지 않아도
하릴없이 주저앉지 않습니다
나 늘 그렇듯
당신 계시지 않는 그곳에서
당신 애타게 찾아나서는
벅찬 첫걸음 다시 딛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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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포기하지 않는 그리고 행동하는>
갈수록 위대해 보이고, 갈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을 넘어 존경하게 되는 성인 중의 한 분이 막달레나 성녀입니다.
복음의 여인 중에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막달레나 성녀는 두 분을 합친 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막달레나 성녀처럼 완벽하게 주님을 사랑한 분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한 바 있는데 막달레나 성녀가 바로 이런 사랑의 증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하느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에 들렸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출된 바 있습니다. 일곱 마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를 갈라놓거나 떼어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그의 사랑 또한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무리에 들었으며, 그래서 죽음도 삶도 주님께 대한 그의 사랑을 막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처럼 주님 사랑에 머물러있지만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처럼 행동주의자였습니다.
오늘 대체 독서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라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데 이 말씀대로 성녀는 다그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주님 발치에 가만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주님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요 증거자로 분주히 움직입니다.
먼저 사도들에게 가 주님 부활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녀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칭송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만 확인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찾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것에 비해 성녀는 오늘 아가의 여인처럼 사랑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만났습니다.
이런 성녀를 오늘 감사송은 아름답게 노래하는데 성녀는 진정 이런 칭송을 받을 만한 분이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칭송만 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칭송한다는 것은 닮겠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닮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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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겹 행복>
오늘은 12시에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2시 16분입니다. 두 시간 넘게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묵상했습니다. 몇 가지 생각들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사랑 말고 보고 싶은 이유가 있을까?
-보고 싶지 않은데 찾는 일이 있을까?
-보고 싶어 하는 것은 행복일까?
-보고 싶은 것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니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불행이 아닐까?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불행할까?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단념하는 것은 현명한 것일까?
-보고 싶은 주님을 계속 찾아 헤매는 막달라 마리아와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찾기를 단념한 사도 중에 누가 더 불행하고, 누가 더 행복할까?
그런데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행복하지 않다면 이 축일을 우리가 왜 지낼까요?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 축일에 그녀가 왜 행복한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보고 싶은데 그 사람이 옆에 없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 것이 더 불행합니다.
사실 사랑 말고는 보고 싶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은, 사랑이 있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행복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더 행복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보고 싶어 찾아 헤맨 주님을 마침내 찾았기 때문입니다. 찾아 헤맸는데도 만나지 못했다면 고통스러운 행복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다행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행多幸이란 한자어 그대로 행운이랄까 행복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의 행복이 아니라 여러 행복이 같이 있는 것이고, 겹경사처럼 겹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보고 싶어 하는 사랑이 있는 것만도 행복인데 마리아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만난 것이니 겹 행복입니다.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으니 다행이지 만나 주지 않으셨으면 막달라 마리가 주님을 찾아 헤맨 것은 끊어버려야 할 애착 또는 집착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찾아 헤맨 것이 애착이나 집착이 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찾아 헤매는 것만 애착이나 집착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애착이나 집착이 되고 맙니다.
다른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해줄 수 없거나 주지 않기에 애착이나 집착이 되고 말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주시고, 꼭 만나주시기에 우리의 사랑이 애착이나 집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막달라 마리아처럼 마음 놓고 주님을 보고 싶어 하고 찾아 나서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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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교회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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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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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구를 찾느냐?>
-찾아라, 만나라, 전하라-
"향기론 막달라의 고운꽃이여
예수의 사랑으로 도취된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마음들을 달궈주소서."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아침성무일도 찬미가가 참 아름답습니다. 사도들 말고 축일을 지내는 유일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고 또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성녀였습니다. 사도들이 다 도주했을 때 주님의 어머니와 요한과 함께 십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있던 성녀였었고 무덤에서 맨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성녀였습니다.
성녀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비잔틴 전례는 예수님께서 성녀를 “사도들의 사도”로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녀와 예수님의 만남이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찾습니다. 어제 써놓고 나눴던 시화詩畫가 생각납니다.
-“바다가
하느님이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바다를
하느님을 바라보듯
하늘을
끝없이 펼쳐진 깊고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바다가
하느님이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느님을, 바다를 바라보듯 참 많이 바라보는 하늘입니다. 아마 저만큼 하늘과 산을 많이 바라 본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35년 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바라본 하늘과 불암산이요, 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마음의 표현이겠습니다. 요즘은 많은 비가 내린후라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이 좋아 자주 시냇가를 산책하다 역시 어제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하늘비
내려야
맑게 흐르는 시냇물인가
하늘 비
없어도
늘 깨어 끊임없이 찬미 노래부르며
맑게 흐르는
주님의 시냇물이고 싶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성녀의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 바로 이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와 주님과의 만남에서 귀한 진리를 배웁니다. 바로 찾음, 만남, 선포의 세 과정입니다.
첫째, 찾아라!
주님을 찾으십시오. 수도자를 일컬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사라지면 영성생활도 끝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내적 삶도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주님을 사랑하고 찾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였습니다. 주님의 성녀에 대한 “누구를 찾느냐?”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과연 주님을 찾는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지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깨어 찾을 때 비로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도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나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깨어 맑게 찬미노래 부르며 흐르는 주님의 시냇물처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시편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며 주님을 찾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둘째, 만나라!
주님을 찾을 때 만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나의 발견입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이요 사람을 찾는 주님입니다. 주님을 찾지 않으면 주님을 결코 찾지 못합니다. 참으로 간절히, 절박하게 주님을 찾을 때 비로소 주님과 만남의 은총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전례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살아 있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기쁨, 만남의 축복입니다. 바로 이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이요 믿는 이들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광야인생 무슨 기쁨, 무슨 맛으로 살아낼런지요. 오늘 제1독서 아가서도 사랑하는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오늘 성녀와 예수님과 만남의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역시 주님과의 만남은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주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성녀의 지극한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은 착한 목자처럼,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하고 부릅니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아, 성녀는 평생 이 만남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아름다운 주님과의 살아 있는 사랑의 만남의 추억이 성녀에게는 평생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찾고 만나야 하는 주님입니다. 이래야 광야인생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주님을 닮은 성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전하라!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부패합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관상의 행복, 만남의 행복도 끊임없이 나눠야 부패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녀에게 자기를 붙들지 말고 내 형제들에게 가서 당신의 승천을 전하라 하십니다. 이제 지상의 주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 명실공히 초월과 내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오른쪽에 좌정하시면서 동시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내 형제들이라 말씀하심이 참 고맙습니다. 모두가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신 주님의 형제들의 가족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희 수도공동체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어제 식탁을 봤더니 18명중 6명이 잠시 한 식구로 수도공동체에 거주중인 손님들이었습니다. 1/3이 손님으로 이뤄진 주님의 가족이니 참 놀라운 기적입니다. 명실공히 환대의 집,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관상의 만남은 형제들에 대한 개방의 선포로 이어져야 합니다. 복음 말미에서 보는 바처럼, 성녀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성녀가 주님의 제자공동체와 얼마나 깊이 결속되어 있는지 깨닫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발효인생이 아닌 부패인생은 정말 문제입니다. 답이 없습니다. 과일도 너무 썩으면 버리듯 삶도 너무 부패하면 악취에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습니다. 어제 읽은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부동산 과다보유자들과 토건족들은 희희낙락했고, 부동산 투기의 바람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원인을 따지지 않은 채 불만을 품고 부글거렸다. 우리 사회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와 자유를 실현하고, 국민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기를 희생해 나라를 살리려는 의로운 부자도 없고, 애국심과 정의감에 불타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정치인도,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땀 흘려 먹고 살겠다고 결단하는 건강한 시민도, 열심히 공부해서 기업을 일구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학생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망은 밝지 않다.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상태가 걱정스럽다.”
다소 비관적인 현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얼마전 구조활동을 펼치다 순직한 20세의 해병대원과 교내에서 목숨을 끊은 20대 초등학교 교사의 소식이 깊은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저절로 탄식처럼 나옵니다. 이대로 무너져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심기일전, 분발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을, 주님을 찾고 만나고 선포하는 삶을,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 결코 부패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회개는 효소와 같아 삶의 부패를 막아주고 향기로운 발효인생이 되게 합니다. 결코 우리 삶이 썩지 않도록, 부패인생의 되지 않도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전사로 깨어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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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간절함!>
오늘 복음(요한20,1-2.11-18)은 예수님의 발현사화로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한 때 '일곱 마귀'에 사로잡혔던 여인입니다. 그랬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다시 살아나는 하느님 체험을 합니다.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한 생을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일곱 마귀에 사로 잡혀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아주 센 마귀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했을 그녀의 간절함 안에 머물러 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는 신부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하면서 예수님을 찾아나섰을 것입니다. 그녀의 그런 간절함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그녀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제자,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20,13.15)
마리아 막달레나의 간절함이 우리의 간절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간절하게 찾고 있고, 주님께 매달리고 있는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임마누엘이신 주님,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주님은 어디에 계실까?
우리가 찾고 있는 주님, 만나야 할 주님은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내 마음 안에, 내 가정 안에, 삶의 자리, 그것도 가장 낮은 삶의 자리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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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Aq6GhYe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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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 15)
처절하게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불타는
울음이 있습니다.
뜨거운 울음은
또 다른
뜨거운
기억이 됩니다.
돌아가는 것과
머무는 것 사이에
우리의 만남이
있습니다.
만남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을 더욱
영롱하게 만듭니다.
주님께로
가는 여정에는
간절한 눈물의
여정이 있습니다.
간절히 믿으면
간절한 사랑은
부활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이름이
다시 사랑으로
불리어집니다.
비로소
사랑이
사랑으로
깨어납니다.
간절한 사랑이
간절한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사랑은
설명이 아닌
마음과 마음의
마주잡은
기도입니다.
울음은 절실한
기도가 됩니다.
하느님
사랑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무덤에서도
다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 사랑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사랑의 기쁨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당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이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쁜 사랑이
기쁜 소식입니다.
꼭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눈물에서 다시
부활하는 부활의
아침입니다.
참된 사랑은
순수합니다.
사랑이 사랑을
다시 일으킵니다.
사랑은
참된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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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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