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천국의 행복은 가능한가?
예레 17,5-8; 1코린 15,12-20; 루카 6,16-20 / 연중 제6주일; 2025.2.16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천국에 대한 갈망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므로 창조주께서 보내주시는 축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명시적으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그러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이라고 해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는 삶이 현세적인 유혹에서 벗어난 회개를 단행하는 부활의 삶인데, 이 부활에 대한 신앙이 확고하지 않은 경우에 조차도 천국의 축복과 이로 인한 구원을 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처럼 삶이 팍팍하고 현 정권의 경제 실정으로 인한 경제 양극화가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내란죄를 심판하기 위한 헌법재판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형국에서는 더욱 정신적인 피곤함이 가중되어서 더 그러합니다. 비상 계엄을 모의하고 실제 내란으로 실행했으며 이를 주요 가담자로 추종했고 또 내란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에 와서도 이를 지지하고 있는 극우 세력들은 나라의 공동선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듯 한데, 그래서도 나라의 경제 지표는 내리 빨간 불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국민의 삶은 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입니다.
1. 새 하늘을 열어젖히신 예수님께서 새 땅을 펼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루카 6,23)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의 참된 행복을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열두 사도와 함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도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모두 이 길을 보았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부르도록 먹을 것을 나누면 천국이 땅에 펼쳐집니다. 지금 우는 사람들이 웃을 수 있도록 위로해주면 천국이 땅에 펼쳐집니다. 나누고 위로해주는 선행을 하다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에도 천국은 땅에 펼쳐집니다. 그러니 천국은 멀리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2. 일찍이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렇게 내다보았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시편의 시인도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3. 이렇게 예수님께서 새 하늘을 여시고 새 땅을 펼치셨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아들로서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1코린 15,11-12). 이 말은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여신 새 하늘과 펼치신 새 땅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부활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4. 그러나 우리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부하고, 부활 신앙을 불신하며, “현세만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1코린 15,19). 예레미야도 이런 가련한 사람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사람은,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 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예레 17,5-6). 이런 자들에 대해서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시편 1,6).
5. 악인들은 부유해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기 때문에 천국의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배불러도 굶주린 이들을 외면하기 때문에 지옥의 불행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죄악이 저질러져도 못 본 척하기 때문에 그 악을 키우는 자들입니다. 지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에만 관심을 둡니다. 아파트 시세라든가, 자녀들의 성적이라든가 가장의 출세 같은 것들만이 그들의 관심사인 듯 합니다. 공동선과 최고선 같은 하느님의 관심사와는 애시당초 멀고 먼 마음을 품고 있어서 그들의 천당행은 멀고 멉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이미 현세에서 위로를 받은 너희는 천국의 양식을 먹지 못해 굶주릴 것이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지 못해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옥을 키우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눈앞에 보이는 현세에만 희망을 거는 자들도 있습니다. “늘 깨어 있어라.”(마태 24,42) 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세상에서 부활한 삶을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기초로 청사진을 그렸으니, 그것이 사랑의 문명을 위한 파스카 과업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파생된 네 가지 최고선의 가치와 세 가지 공동선의 가치가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씨줄이 되어야 할 최고선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입니다. 날줄이 되어야 할 공동선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모든 이에게 공동선의 혜택이 고르게 주어지는 공정함의 가치와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혜택을 주어지도록 하는 배려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씨줄과 날줄로 사랑의 문명이라는 천이 엮어질 것입니다.
7.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고발하는 인간형은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겼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상숭배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등장합니다. 반만 년 전 이 땅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 민족은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손의식(天孫意識)으로 하느님을 섬겨 왔었습니다. 그리하여 받들던 하늘의 뜻이 바로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런데 지배층과 지식층이 불교와 유학을 들여온 이래 무려 2천 년 가까이 하느님 신앙은 잊혀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민간으로 숨어 들어간 하느님 신앙은 지배층과 지식층으로부터는 무속으로 취급 당했지만, 민족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서 마치 거대한 지하수맥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민간 신앙을 흡수하여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가르치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칠성단을 세웠는가 하면 유학에서도 민간의 효 관념을 따라서 조상 공경을 하느님 제사 대신에 했던 것인데, 고약한 것은 조상제사를 양반 계층만의 특권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8. 조선시대 후기에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지하에 흐르던 신앙의 거대한 수맥을 터뜨려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도 교리로 제천의식을 일깨워 가족들이 모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 바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기도는 제물 없는 제사입니다. 제사의 요체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등 교리로 천손의식을 일깨워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벗, 즉 교우로 지냈습니다. 당연히 노비로 데리고 있던 천민들은 모두 해방시켜 주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열심한 천주교 신자요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제사금지령 때문에 양반 신자들이 대거 떨어져 나간 후에도 천민 출신 신자들의 입교 행렬은 계속 이어졌으며 그 수효는 더욱 늘어났습니다. 치명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이 이 천민 출신 신자들입니다. 실제로 천민 출신으로 백정을 직업으로 지니고 있다가 입교한 황일광 시몬은 “나에게는 천당이 둘이 있소. 하나는 죽어서 갈 천당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서 양반 교우님네들이 나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는 교우촌이요.”라고 고백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렇듯, 천주교는 기도와 평등에 관한 교리로 우리 민족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소통이 우상을 숭배하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제천과 천손으로 대표되는 민족 정체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8. 하느님과 소통하며 믿을 수 있는 자유는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자유의 기본입니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오늘날에도 평등의 가치는 더욱 요긴합니다. 정치적 평등은 이루었다고 하겠으나, 경제적 평등은 아직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이 주로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며 평등을 실천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저항하며 기도로써 하느님과 소통했다면, 유신 독재가 극성을 부리던 1970년대에 등장한 사제들은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가 되살아난 듯이 정치적 자유가 압살당하던 암흑 속에서 정의의 횃불을 들었는데, 이 당시 자유가 탄압받아 희생자가 날 때마다 사제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나서는 그 메시지를 알리려고 시민들을 향해 시가행진을 할 때마다 부르던 성가가, “장하다, 복자여!” 라는 제목의 순교자 찬가였습니다. 그야말로 순교정신을 이어받아서 정의를 외쳤던 것입니다.
9. 우리 사회에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해를 실현하자는 담론을 촉구한 계기는 1989년에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 성체대회가 열린 때였습니다. 그 전에도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운동은 물밑에서 계속되어 왔었지만 당국의 탄압 때문에 여론화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로 방한하여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 성체대회를 요한 바오로 2세가 주관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우리 나라에도 평화의 가치를 여론화 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 냈던 바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내란 정국을 수습하는 이 시기에 떠 오르는 속담은 이것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법이다.”. 동이 트기 전에 가장 어둡듯이 지금 대한민국의 시국이 그렇습니다. 동이 터서 온 누리가 밝아오면 새롭게 건설해야 할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그려야 할 때입니다. 극소수 기득권층만이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이 행복한 나라, 정치적 자유권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권도 보장되는 나라,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북한을 비롯한 아시아의 이웃 나라들의 공동선이 증진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천국의 꿈을 꿉시다. 사랑의 문명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이룰 수 있다는 예수님의 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현실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