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목요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하루도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교만한 마음과 부정성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본문 주해)
1~2절 :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신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반드시 자기 부인과 자기 해체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3~4절 : ‘음행’이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인데 ‘포르노’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리고 온갖 더러운 것도 성적인 것을 말하지만 온갖 이라고 하였기에 성적인 것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더러움을 다 말한다. 이런 것들은 결국 탐욕이라는 말로 모아지는 것이다.
탐욕이란 자기만족을 위하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욕망들을 말한다. 성적인 음행을 하지 않지만 다른 것들로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도 음행인 것이다.(3절)
누추한 말이란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덕스럽지 않는 무익한 말들이다. 희롱의 말이란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이러한 말들과 행동들이 성도가 되기 전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과 말들이며 다 재미있는 일들이었다.
전에는 그와 같은 무리 속에서 그와 같은 말과 행동을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이런 말들은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성도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4절)
5~7절 :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와 똑같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다.
물론 성도가 연약함으로 이러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고 회개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죄를 즐기면서 자신은 진리로 자유하고 있다는 헛된 말에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7절의 ‘그들’이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이다.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이다. 이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이들과 함께 사귀게 되면 그렇게 물들기 마련인 것이다. 이들은 자유를 준다고 하지만 결국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다.
8~10절 : ‘전’이란 예수님을 믿기 전을 말한다. 복음을 듣고 믿기 전에 우리가 살았던 세상에서는 모든 것들이 어두움이었다. 즉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기를 위하여 살아온 모든 것들이 다 어두움의 일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흑암의 권세 아래 태어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셔서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셔야만 빛이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8절)
빛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내가 빛의 열매를 맺어내려고 하면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일이 된다.
열매란 내가 나무에 붙어있음으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한 열매가 바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나오는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바로 생명과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나타내는 것이다.(9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10절, 새번역)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알아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11~13절 :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새번역)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자녀로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과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드러내야 한다.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책망 받는 모든 것이 복음의 빛 앞에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14절 :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어두움과 죄의 상태에서 깨어나라고 외쳤던 것처럼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일어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비추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지는 것이다.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성도의 마음의 눈이 되고, 그 마음의 눈이 밝아야 자신의 어두움도 보게 되며 빛도 보게 된다.
잠자고 죽은 자란 세상의 멸망할 것들에게 눈이 밝아있는 것을 말씀한다. 그런 것에도 돌이켜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복음으로 돌아서라고 말씀한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성도를 향하여 말씀으로 비추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빛이 비추어진 자가 그 빛를 다시 전하게 된다.
(나의 묵상)
나는 전에는 어둠이었는데 이제는 주님 안에서 빛이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내 실력으로 그 어둠을 빠져 나왔기에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빼내어 주신 일이다. 참빛의 세계에 대한 갈망도 동경도 없었던 나를 주님께서 끄집어내 주신 것이다.
빛의 세계, 아들의 나라로 진입되어진 나는 이 세계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탐심의 덩어리인데 그것을 버리라고 하시니 나더러 죽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근데 진짜로 죽으라는 말씀이 맞았다!
그런데 이 죽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니, 그것은 옛사람을 새 사람으로, 어둠의 자식을 빛의 자녀로 만들어내시는 주님의 일하심의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우째 좀 살아볼라꼬 예수를 믿었는데, 도리어 죽으라꼬 카시니..... 참 기가 찬다......’ 하고 중얼거리던 자가 입을 닫고, ‘그렇게까지는 믿고 싶지는 않아요’ 하고 손사래를 치던 자의 강경하고 뻣뻣한 팔이 조용히 내려온다.
그것은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적당하게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나의 행복을 책임져 주시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가 내 소원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0.0000...1%도 공유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놀라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영생의 삶이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의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신기한 일은 이 진리로 인해 천리만리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된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알 수 없는 기쁨이 되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나의 힘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겠는가? 뭘 알아야지 노력이라도 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무슨 노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나는 모르는 것투성이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더욱 나의 의지와 결단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깨닫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의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찰싹, 꽉, 단단히 붙어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일도 내 힘으로 되지 않으니 오로지 성령님을 의지할 뿐인 것이다.
그러니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누추함,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된다.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내 피부처럼, 살처럼 붙어서 참으로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꺼려지는 것들이 되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내게 빛을 비춰 주셨기 때문이요, 나는 주님 안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제 조정민 목사님이 말씀 묵상을 열심히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순종’과 연결이 되어 나타나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나는 잠시 뜨끔했다.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성령을 의지해서 행하는 말씀 묵상이라면, 주님과의 그 친밀한 교제라면 ‘내가 순종해야지’ 하는 결단이 필요 없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순종의 열매로 나타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내게 나타난 순종의 열매란, 말씀대로 순종을 잘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살지 못하는 나에 대한 애통함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달려와 머리 조아리는 일이다.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애초부터 내게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맺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십자가에 연합된 나를 통해 성령께서 맺게 해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할 뿐이다.
빛이신 주님 안에 내가 있기에......
(묵상 기도)
주님,
어둠에서 어둠으로 파고드는 이상한 벌레 같은 존재를
빛의 나라로 구해내 주시고
빛 안에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옛사람의 습성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주님께 연합되어 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감으로
빛 되신 주님 안에 거합니다.
빛의 열매가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맺히길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