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현상, 바리사이 현상
창세 4,1-15.25; 마르 8,11-13 / 연중 제6주간 월요일; 2025.2.17
진리는 단순하지만 거짓은 복잡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보호하시는 반석이시고 우리를 구원할 성채이십니다(시편 31,3. 입당송). 반석이시오 성채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시고,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이시며, 우리가 누려야 할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복음 환호송). 이렇게 진리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 아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고(독서), 이스라엘의 율법을 잘 알았던 바리사이들은 어이없게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미 일어난 기적들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기적을 자꾸 요구하였습니다(복음).
농부였던 카인이 양치기였던 아벨을 죽인 이유는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둘이 다 제물을 바쳤는데,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바친 곡식 소출보다는 아벨이 바친 양의 맏배를 기꺼이 굽어보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차별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노동에서 얻은 것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일은 다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린 카인에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겠느냐?”(창세 4,6) 그러니까 카인과 아벨의 직업이나 제물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직업으로 그 제물을 바치면서 지녔던 마음의 지향과 행위의 가치가 올바르지 않았었음을 하느님께서는 지적하신 겁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숨겨놓은 이 진실을 감춘 카인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놓고 트집을 잡은 셈입니다. 죄는 이렇게 복잡한 속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미 숱한 기적을 일으켜 보여주셨는데도, 바리사이들이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마르코가 기록해 놓은 기적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례만 보아도 이렇습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만나자 그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고(1,25),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1,31). 나병 환자를 깨끗이 낫게 해 주셨으며(1,42), 중풍 병자에게는 육신을 치유해 주기 전에 죄를 지은 영혼부터 용서해 주셨습니다(2,11). 바리사이들이 일부러 안식일에 회당에 데려다 놓은 눈치를 채시고서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도 펴 주셨고(3,5), ‘군대’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엄청나게 많은 마귀가 한 사람에게 들어가 괴롭히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 군대 마귀들을 돼지 떼에게 내쫓아서 그 사람을 온전하게 고쳐 주기도 하셨습니다(5,8).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도 고쳐 주셨고(5,29) 심지어 죽은 소녀를 살려 주기도(5,42) 하셨습니다. 게다가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기도 했고(6,41; 8,6),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러 물 위를 걸어오시기도 하셨습니다(6,48). 그런데 이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어 신적인 권능을 충분히 보여주신 예수님을 향해서 바라사이들은 또 다시, “하늘에서 오는 표징”(8,11)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그 모든 기적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이고, 자신들이 인정할 수 있는 맞춤형 기적을 보여 달라는 생떼였으며 그래야 자신들도 믿어 주겠다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래서 비상식적으로 억지를 부리며 까탈스럽게 굴던 그 자들에게는 더 이상 믿게 하려는 기대를 접으시고 그들을 버려둔 채 피해 가셨습니다.
카인과 아벨 사이에 저질러진 죄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후 처음으로 벌어진 범죄 행위로서, 이후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범죄 현상을 대표합니다. 이를 ‘카인 현상’으로 부르자면, 이 현상에서 나타나는 뜻은 하느님께는 무디고 악에는 취약한 세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여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태에서도 우리는 경건하게 산다면서도 정작 선에는 무디고 고집을 부리는 고약한 ‘바리사이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 시기 대한민국의 카인 현상과 바리사이 현상은 어떨까요?
12.3 비상계엄령 발동으로 우리나라에 내란 상태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헌법재판소에서는 국회에서 탄핵된 대통령에 대해 심판이 진행 중입니다. 이 과정에서 군대를 중무장시켜 국회에 출동시키고 야권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여 ‘수거’하려던 이른바 ‘내란 주요 임무 종사자’들의 내란 음모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카인의 후예들은 전쟁 상황이나 이에 준하는 사변 상태가 없었는데도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비상입법기구를 만들어 상시 계엄 상태에서 종신 집권하려던 국가 전복 범죄 음모는 아직 그 전모가 밝혀지지도 못했고, 이를 수사해서 밝혀야 할 특별 검사를 임명하려던 법률안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 대행의 거부권에 의해 착수되지도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가 하면, 윤석열의 변호인단과 내란 세력을 비호하려는 국민의 힘 당 그리고 이를 두둔해 온 기성 언론에서는 때아닌 내란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바리사이의 후예들은 이 조치가 내란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부여된 고도의 통치행위라는 궤변을 늘어 놓거나, 헌법 질서를 수호하려는 야권의 주장과 내란죄를 저지른 자들의 주장을 기계적 중립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면서, 국민 여론을 갈라치기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 빨리 내란 상태를 종식시키고 정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 공동선을 집약해 놓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헌법 84조에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때 이외에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내란죄를 범한 경우에는 형사상 소추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형법 87조에는 내란죄를,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일으킨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엄범 제2조 2항에서는,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시 적과 교전(交戰)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攪亂)되어 행정 및 사법(司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엄법 11조 1항에는,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경우에는 지체없이 계엄을 해제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북한 사이에 그 어떠한 충돌도 없었던 12.3 당시에 발동된 비상 계엄령은 불법이며, 국회를 무력화시키려고 중무장한 군인들을 동원한 조치는 명백한 내란 행위인 것이고, 이는 대통령이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을 수 있는 중대 범죄입니다.
윤석열은 국회를 봉쇄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려던 이유를,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계엄 포고령 1조를 들고 있지만, 이 포고령 자체가 더욱이 계엄 상황에서도 행정권과 사법권은 제한할 있지만 입법권만은 침탈할 수 없게 규정되어 있는 헌법 제77조를 위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변호인들과 주요 내란 임무 종사자들 그리고 이를 비호하려는 여당은 거짓말을 늘어 놓거나 궁색한 변명으로 이 법망을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기성 언론들은 이를 헌법과 법률의 규정과 동일한 비중으로 보도하면서 진실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헌법에 들어있는 공동선 가치에 무지한 한국판 바리사이 현상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카인의 후예들과 바리사이의 후예들이 저지르는 이 모든 죄의 현상에 대해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아마도 죄에는 예민할 정도로 취약한 현상 대신에 선에 대해서 오히려 민감할 수 있는 메시아 백성을 모으고자 하셨습니다. 선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선에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힘은 선에 대한 영적 감각으로 거룩한 기운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메시아 백성이 되려는 진실한 지향으로 우리를 선에로 이끄시는 은총을 받아서 우리 자신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거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가능한 한 둘이나 셋이라도 사람들을 공동체로 모아서 할 수 있는 대로 함께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본기도). 그러면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사도직이 일어납니다.
카인 현상이 하느님께서 계신 에덴 동산을 벗어난 세상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범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도 마치 우리가 세상에 출현한 첫 사람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선을 행하는 삶과 공동체를 이룩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합니다. 또한 바리사이 현상이 예수님의 눈앞에서도 일어난 불신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의 현존을 믿고 특별한 기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선행을 하는 기적을 보여주겠다는 뜻을 세우면 됩니다. 이처럼 진리는 단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