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가실성당 ~ 한티순교성지
한티 순교자 정신 남아있는 길
지금도 전국 순례자 모여들어
45.6㎞ 산길 수차례씩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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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가는길 순례자들이 순례 도중 자연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선례씨 제공 |
경북 칠곡군에는 ‘한티가는길’이 있다. 왜관 가실성당에서 동명 한티순교성지까지 45.6㎞ 이어지는 한티가는길은 조선말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신앙선조들이 수없이 오고 갔던 길을 순례길로 조성한 것이다. 한티에서 살고, 순교하고, 묻힌 순교자들의 정신이 오롯이 남아있는 길이다.
한티가는길에는 지금도 전국 신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다섯 구간으로 나눠진 길을 전부 걸으려면 이틀은 족히 걸린다. 그럼에도 대여섯 번은 물론 14번 순례한 신자도 있다. 한티가는길만이 가진 매력과 의미는 무엇일까? 수차례 이곳을 찾은 순례자들을 만나 물었다.
■ 주님께서 빚으신 풍경
김용주(정혜 엘리사벳·수원 매탄동본당)씨는 한티가는길을 걸을 때마다 “정말 공을 많이 들인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특히 리본이요. 걷다 보면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 순간 나뭇가지에 묶인 리본이 보여 안심이 돼요.”
한티가는길을 조성한 한티순교성지와 칠곡군은 순례길 곳곳에 리본이나 조형물 등을 설치해 순례자들의 이동에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지천면 연화리의 도암지에는 시원한 음료가 채워진 양심냉장고가 있어, 지친 순례자들에게 행복한 쉼터가 돼 주고 있다. 한티순교성지 담당 여영환(오또) 신부는 “순례에 불편함이 없도록 계속 정비하고 있다”며 “구간에 속한 마을주민들이 순례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여 신부는 한티가는길이 순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티가는길을 걸은 것을 계기로 비신자가 세례를 받은 뒤 다시 찾아온 사례가 있다고 여 신부는 밝혔다.
아름다운 풍경 또한 한티가는길의 매력 포인트다. 하느님이 빚으신 천혜의 자연을 보면서 많은 순례자들이 감탄한다. “순례 중 하늘을 쳐다보면 하느님께서 잔치를 벌여주신 것처럼 맑고 아름다워 놀라게 된다”고 한 임점애(요세피나·수원교구 용인 보전본당)씨는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니 자꾸 오고싶다”고 말했다.
■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길
왜 한티가는길을 수차례 걸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순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느님께서 초대하셨고, 우리는 응답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티가는길만 14번 걸었다는 이선례(체칠리아·수원교구 광명 하안본당)씨는 “처음 걸었을 때는 다리만 아프고,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자꾸 이 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뒤로 계속 찾고 있다”고 말했다.
강선순(체칠리아·서울 청파동본당)씨는 이 길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설명했다. 순례 중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기꺼이 순례를 포기했던 경험을 들려준 강씨는 “나보다는 타인을 위해 쉽지 않은 결단을 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초대하신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 순교자와 함께 걷는 길
김용주씨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해를 피하는 절박함 속에도 신앙을 지키고자 수없이 이 길을 다녔던 순교자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김씨는 강조했다.
조난연(안젤라·서울 성현동본당)씨는 “순례자들과 무명 순교자들이 통교하는 곳”이라며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무명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점애씨는 한티순교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소에서 기도하며 펑펑 울었다고 고백했다. “저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이분들은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살고 돌아가셨는데도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여영환 신부는 한티가는길의 부제인 ‘그대 어디로 가는가’를 곱씹으며 걸어볼 것을 권했다. “종교를 떠나 누구나 인생에서는 많은 어려움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울컥하는 마음이 있다”며 “앞서 이 길을 걸었던 순교자들이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순례 문의 054-975-5151, www.hanti.or.kr 한티순교성지
한티가는길에 걸려 있는 길 안내 리본
◎ ‘한티가는길’ 약사
김현상(요아킴) 가족이 1839년 기해박해 전 한양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칠곡 신나무골로 피난 왔으며, 이 길을 걸어 한티로 들어와 살았다. 1860년 경신박해 때는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이 길을 통해 한티로 피난 왔다가 순교했다. 대구대교구는 이 길을 1968년부터 도보순례하기 시작했으며, 2016년 칠곡군이 개청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이 길을 ‘한티가는길’ 순례길로 개통했다.
한티가는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 한티순교성지 제공
영상으로 만나는 '한티가는길' (1구간~5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