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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도경스님... 제가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은 평소에 갖고 있었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초선부터 4선정까지에 대해서 질문드리고자 함입니다. 이번에 호두마을에서 우 떼자니야 사야도께 질문을 드릴려고 했으나 청현스님께서 사전에 수행말고는 질문하지 말것을 말씀하셔서 하지 않았습니다. 교학에 관한 것이라서요... 그러다가 이곳 카페에서 스님께서 답변을 하시는 것을 보고 용기내어 질문을 드립니다. 다소 긴데 바쁘시더라도 스님의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선정에 관한 것입니다. 평소에 니까야를 읽으면서 느낀 건데요, 예전부터 니까야에서 읽은 선정, 그러니까 초선 2선 3선 4선에 대해서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이 느껴졌었습니다. 경전을 읽으면 부처님께서 정말 많이 초선, 2선, 3선, 4선을 닦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형구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선정을 닦으라는 말씀이 경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경전들에서 이런 부처님 말씀을 읽을때마다 저는 뭔가 특별한 것이 느껴졌었습니다. 과연 초선, 2선, 3선, 4선이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정들과 같은가라는 ...... 뭔가 다른 것은 아닌가, 현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초선 2선 3선 4선은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현재 상좌부 불교의 초선 2선 3선 4선에 대한 시각은 위빠사나 수행과는 상관 없고 사마타 수행과 관련된 것으로만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 경전에 보면 위빠사나와 사마타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초선 2선 3선 4선에 대해서도 나오죠. 허나 제가 접하기로 어디에도 부처님께서 선정(초선 2선 3선 4선)은 오직 사마타 수행만으로 증득되고 사마타 수행을 의미하고 사마타 수행과 관련이 있지 위빠사나 수행과는 거리가 있고 위빠사나 수행으로는 달성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은 없는 것으로 현재 알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니까야를 읽은 것이 아니지만 현재까지 이런 말씀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후대 상좌부 불교에서 불교의 선정(초선 2선 3선 4선)은 오직 사마타 수행으로 증득되는 (지혜는 없고 고요함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과거의 상좌부 불교의 견해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상좌부 불교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의 많은 수행자분들도 선정(초선 2선 3선 4선)은 사마타 수행으로만 달성되는 것이고 관계가 있지 위빠사나 수행과는 상관없다라고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과 선정이 나오면 거론되는 것이 사마디(삼매) 인데요... 보통 상좌부 불교에서는 사마타 수행은 근접 삼매와 본삼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은 카니까 사마디라고 해서 찰라삼매를 말합니다. 허나 이 또한 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근접 삼매와 본삼매 찰라삼매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바른 삼매와 바른 선정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근접 삼매 본삼매 찰라삼매는 부처님 직설이 아니라 상좌부 불교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죠. 근접 삼매 본삼매 찰라삼매는 팔리어 성전협회의 전재성 박사님께 물어보니 18개(또는 20개) 부파 불교중에 하나인 상좌부 불교(또는 장로 불교)의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초기불교 = 상좌부불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상좌부불교는 부파 분열로 인해서 생긴 20개의 불교 종파 중에서 하나의 종파이고요.)
그리고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바른 견해, 바른 정진,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사티, 바른 삼매가 있고 또한 바르지 않은 견해, 바르지 않은 사유, ....... 바르지 않은 사티, 바르지 않은 삼매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8정도의 하나하나를 설명하시면서 바른 삼매를 초선 ~ 4선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선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번역한 경전에 있는 초선~4선의 정형구가 이렇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바른 삼매가 초선 2선 3선 4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이..... 만약 현재 많은 수행자분들이 생각하듯이 선정이 위빠사나 수행과는 상관없고 사마타 수행하고만 관계가 있다면 부처님 말씀과 뭔가 상통하지 않게 됩니다. 바른 삼매가 4선정인데.... 그렇다면 바른 삼매는 오직 사마타 수행만이 되는 것일까요? 바른 삼매는 당연히 수행자를 탐진치의 소멸로 가게 하는 8정도의 하나 입니다. 그렇다면 사마타 수행뿐만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통찰지혜 수행은 필수이므로 말입니다.
그리고 초기불교이해 398쪽을 보면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초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초선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심리현상들이건 알음알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초선에 들어 머물면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바르게 관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에도 초선의 증득에서 출정해서 오온의 실제하는 현상을 관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상좌부 주석서나 아비담마에서는 중간에 출정이라는 것을 넣어서 해석할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경전에는 초선에 머물면서 하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초선에 머물며 위빠사나 수행을 하라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아니 위빠사나 수행으로 초선에 든다라고 해석될 수 있지요.
다시 한 번 위에 올린 초선 2선 3선 4선의 정형구를 천천히 읽어 보신다면.... 과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저 정형구가 현재 상좌부 불교나 국내의 많은 초기불교 수행자들이 알고 있는 그 선정과 같은가라는 의문의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정의 정형구를 보면 경전에 나오는 칠각지와 배대된다고 생각됩니다.
칠각지는 .....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를 닦는다. … [64]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를 …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를 …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를 …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를 …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를 …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계를 의지하고 계에 확고하게 서서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칠각지]를 닦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많이 [공부]지어서 법들에 대해서 크고 충만함을 성취한다.”(상윳따 니까야 히말라야 경(S46:1) §§5~6)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위에 올린 초선 ~4선의 정형구를 다시 읽으신다면 칠각지와 잘 배대된다고 느낄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떨쳐버리고 빛바래게 하고(선정, 칠각지가 되기 위한 공통적인 전제) .... 사티(사티는 사마타 수행이든 위빠사나 수행이든 모두 포함됩니다. 양쪽 다 있어야 하죠.) 법의 간택과 정진은 일으킨 생각(위빠사나는 일어난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 희열은 같고 고요함도 같고 삼매(사마타 수행이든 위빠사나 수행이든 삼매는 있고요) 평온도 배대되고요....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칠각지를 닦으면 닙바나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칠각지가 지혜는 없고 고요함만 있는, 실제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관념만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만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칠각지 = 사마타 수행 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얼마 전에 팔리어 성전 협회에서 번역 출간한 맛지마 니까야를 읽었습니다. 그곳의 쌍가라바 경을 읽었습니다. 간략하게 바로 밑에 올립니다.
맛지마 니까야
100. 쌍가라바의 경
......(전략)......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도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구하고 위없는 최상의 평화를 구하러 마가다국들을 차례로 유행하면서 마침내 우루벨라 근처의 쎄나니가마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고요한 우거진 숲이 있고 아름다운 둑에 싸여 맑게 흐르는 강물이 있고, 주변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는, 마음에 드는 지역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고요한 우거진 숲이 있고 아름다운 둑에 싸여 맑게 흐르는 강물이 있고, 주변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는, 이 지역이 마음에 든다. 이곳은 정진을 바라는 훌륭한 가문의 자제가 정진에 집중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이다.’ 나는 ‘이곳은 정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앉았습니다.
[세존] “바라드와자여, 참으로 나에게 놀라운,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세 가지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예를 들어 습기를 머금은 생나무가 물 속에 던져져 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좋은 부싯목을 가지고 와서, ‘내가 불을 지피고, 빛을 내게 하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습기를 머금은 생나무가 물 속에 던져져 있는데, 거기에 좋은 부싯목을 가지고 와서 불을 지피고, 빛을 내게 할 수 있습니까?”
[쌍가라바] “존자 고따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습기를 머금은 생나무가 물 속에 던져져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사람은 피곤하고 곤혹스러워질 것입니다.”
[세존] “바라드와자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신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고 그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하여 감각적인 탐욕, 감각적인 사랑, 감각적인 혼미, 감각적인 갈망, 감각적인 고뇌가 안으로 잘 버려지지 않았고, 잘 소멸되지 않았다면,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게 되고,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것이 나에게 놀라운,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첫 번째의 비유입니다.”
[세존] “바라드와자여, 참으로 나에게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놀라운 두 번째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예를 들어 습기를 머금은 생나무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위에 놓여져 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좋은 부싯목을 가지고 와서, ‘내가 불을 지피고, 빛을 내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습기를 머금은 생나무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위에 놓여 있는데, 거기에 좋은 부싯목을 가지고 와서 불을 지피고, 빛을 내게 할 수 있습니까?”
[쌍가라바] “존자 고따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위에 놓여 있더라도 습기를 머금은 생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사람은 피곤하고 곤혹스러워질 것입니다.”
[세존] “바라드와자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신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멀리 떠났을지라도 그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하여, 감각적인 탐욕, 감각적인 사랑, 감각적인 혼미, 감각적인 갈망, 감각적인 고뇌가 안으로 잘 버려지지 않았고, 잘 소멸되지 않았다면,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게 되고,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것이 나에게 놀라운,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두 번째의 비유입니다.”
바라드와자여, 참으로 나에게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놀라운 세 번째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예를 들어 습기를 머금지 않은 마른 나무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위에 놓여져 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좋은 부싯목을 가지고 와서, ‘내가 불을 지피고, 빛을 내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습기를 머금지 않은 마른 나무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위에 놓여져 있는데, 거기에 좋은 부싯목을 가지고 와서 불을 지피고, 빛을 내게 할 수 있습니까?”
[쌍가라바] “존자 고따마여, 그렇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습기를 머금지 않은 마른 나무가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 “바라드와자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신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멀리 떠났고 그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하여, 감각적인 탐욕, 감각적인 사랑, 감각적인 혼미, 감각적인 갈망, 감각적인 고뇌가 안으로 잘 버려졌고 잘 소멸되었다면,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참으로 이것이 나에게 놀라운,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세 번째의 비유입니다. 바라드와자여, 참으로 이것들이 나에게 놀라운,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세 가지 비유들입니다.
바라드와자여,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치아를 치아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어떨까? 바라드와자여, 나는 치아를 치아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렸습니다. 바라드와자여, 그 치아를 치아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는 나에게 겨드랑이 아래에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마치 힘센 사람이 힘 약한 사람의 머리채를 붙잡거나 어깨를 붙잡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듯, 바라드와자여, 그 치아를 치아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는 나에게 겨드랑이 아래에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바라드와자여, 그러나 나에게 물러설 줄 모르는 정진이 있고 끊임없는 새김이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나의 몸은 격렬하고 불안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일어난 그러한 고통스런 느낌이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숨을 멈추는 선정을 닦아보면 어떨까? 바라드와자여, 그래서 나는 나의 입과 코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내가 입과 코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소리가 귓구멍을 통해 나왔습니다. 마치 풀무소리가 요란한 것처럼, 내가 입과 코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소리가 귓구멍을 통해 나왔습니다. 바라드와자여, 그러나 나에게 물러설 줄 모르는 정진이 있고 끊임없는 새김이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나의 몸은 격렬하고 불안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일어난 그러한 고통스런 느낌이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중략)......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이 ‘과거세의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아무리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했다고 해도 이와 같은 것이 가장 극심했던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미래세의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아무리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할 것이라고 해도 이와 같은 것이 가장 극심한 것일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다. 현세의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아무리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고 해도 이와 같은 것이 가장 극심한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고행의 실천으로도 인간을 뛰어넘는 법, 고귀한 님들이 갖추어야 할 탁월한 앎과 봄을 성취하지 못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이 ‘나의 아버지 싸끼야 족의 왕이 농경제 행사를 하는 중에, 나는 장미사과 나무의 서늘한 그늘에 앉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는데,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일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 길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새김에 따른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이 ‘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없는 즐거움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바라드와자여, 나는 이와 같이 ‘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가 없는 즐거움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끓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바라드와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바라드와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 있는 행복한 삶이라 부르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바라드와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바라드와자여,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에 대한 기억의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후략)......
이런 부처님의 말씀인데요, 저는 읽고서 생각을 했습니다.
선정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저는 과연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으로 갈수 있었던 처음 시작점(?)이 되었던 어릴적 농경제 때의 장미 사과 나무 밑에서의 그 특별한 경험이 과연 무엇이었을까라는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사사나 스님과 대화 중에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스님께서도 같은 의문이 있었는데 스님은 그것이 사티가 아닐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여전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맛지마 니까야 쌍가라바 경에 그것은 초선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번역 출간한 전재성 박사님께 전화로 박사님이 그 부분을 직역을 하신 것인지 의역을 하신 것인지 물었더니 직역을 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 부처님께서는 왕궁을 홀로 나오셔서 세상의 유명한 두 스승을 찾아가서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까지 증득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 하시고 홀로 수행하셔서 바르게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미 두 스승으로부터 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정까지 이루셨는데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바로 초선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볼때 세간의 초선과 부처님께서 어릴 적 농경제때 장미 사과 나무 밑에서 경험하신 특별한 상태(초선)는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다른 것인데 같은 단어인 초선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바른 견해, 바른 사유....바른 삼매가 있다고 하셨고 바르지 않은 견해,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삼매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불교에서 바른은 팔정도입니다. 팔정도의 요소가 갖춰지면 바른 것이고 아니면 바르지 않은 것이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두 세간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초선은 바르지 않은, 즉 팔정도의 요소가 갖춰지지 않은 세간의 초선이고 농경제때 장미사과 나무 밑에서 경험하신 초선은 바른, 팔정도의 요소가 갖춰진 초선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처럼 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초선 2선 3선 4선의 선정이 과연 현재 맞게 이해되고 있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선정이 이해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듭니다. 경전에 보면 정말 많이 부처님께서 초선~4선을 닦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초선~4선의 정형구를 읽어보면 위빠사나 수행으로 경험되는 경험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수행이 얕아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 동안 듣고 읽은 사야도분들의 법문을 보면 통찰 지혜 수행으로 초선 ~4선의 정형구에 있는 것들이 경험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