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1,219m)은 백두대간 ‘구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백병산’과 ‘면산’을 지나 남하하다가, 영양과 울진의 경계에 있는 ‘통고산’(1,067m)에서 분기한 덕산지맥에 솟은 산봉이다. 이 덕산지맥의 서쪽 끝에 봉화 청량산(淸凉山, 870m)이 있다. 그러므로 일월산은 동쪽에는 낙동정맥이 남으로 뻗어가고 서쪽에는 청량산이 솟아 있다. 덕산지맥 청량산은 봉화군 명호면에서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길을 만나면서 그 지맥을 다한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黃池)에 발원한 낙동강은 쳥량산-도산서원 앞을 지나 안동댐을 흘러들어 낙동강의 본류를 이루는데, 여기 영양 일월산의 ‘뿌리샘’에서 발원한 반변천(半邊川)은 영양읍을 지나 청송군 진보를 경유하여 임하댐으로 흘러들어, 안동에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오지의 첩첩산군, 일월산은 거대한 산체가 하늘에 치솟아 있어 그 산세가 웅장하다. 산정의 능선은 평평하고 급하지 않으나, 산정에 서면 동쪽으로 낙동정맥의 산군 너머 동해가 바라보이고 동해에 뜨는 해와 달을 제일 먼저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일월산(日月山)이라고 부른다. 정상부에는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주봉은 일자봉[日月山 정상, 1,219m]이고, 거기서 2km 가량 떨어진 서쪽에 월자봉(月字峰, 1,170m)이 있다. 새해 해맞이 명소인 일월산 정상에는 널찍한 나무테크 계단식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 ‘동해의 일출’을 맞이할 수 있다. 특히 일월산은 그 지형상 태백산의 가랑이에 위치해 있어 음기(陰氣)가 강한 여산(女山)으로 알려져 있어, 매달 그믐날만 되면 전국 각지의 무속인(巫俗人)들이 찾아와 영험함과 신통함이 더한 ‘내림굿’을 한다. 그리하여 무속인들로부터 성산으로 추앙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용화사 굿당과 황씨부인사당이다.
* [산으로 가는 길] — 백두대간 죽령터널은 지나서, 봉화 경유, 영양의 오지(奧地)로
오전 7시 40분, 우리의 버스는 서울의 능동[군자역]에서 출발했다. 오늘 제201차 산행지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일월산>이다. 화창한 유월의 이른 아침, 김준섭 회장, 한영옥·장태임 부회장, 박은배 총무, 유형상·김재철 대장을 비롯하여 호산아 고문·김의락 위원 등이 함께 했다. 늘 한결 같은 전진국, 안상규, 강재훈, 님을 비롯하여 이명자·이경숙 님, ‘하회탈’의 친구 신시호·강완식·홍완섭 님과 그 친구 한 분 등이 참석했다. 참 오랜만에 문승배 님이 나오고, 남점식 님도 나오셨다. 그리고 성명을 확인하지 못한 젊은 커플, 그리고 처음으로 나오신 또 몇 분, 모두 유월의 청산을 지향하는 마음들이 모여 동행하게 되었다.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밝은 햇살이 화사한 아침, 산행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서울의 군자역을 출발한 우리의 <금강버스>(권용길 기사님)는 중부고속도로와 (곤지암J.C) 제2영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신평J.C에서 중앙고속도로에 진입, ‘치악휴게소’에 도착했다. 산중휴게소의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백두대간 죽령터널을 지나 풍기I.C에서 내려 자동차전용 5번 국도에 이용하여 영주시 외곽에서 봉화로 가는 36번 국도를 갈아타고 나아갔다. 봉화읍을 지나 법전 고가(高架)도로 갈림길에서, 영양으로 가는 31번 도로를 타고 ‘영양터널’을 지났다. 오늘의 산행들머리인 영양군 일월면 오지리 윗대티에 이르렀다.(11:00) 날씨는 청명하고 공기는 더없이 맑았다.
사진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두 번 클릭하시면 선명한 원본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대티’는 ‘큰 고개’를 뜻하며 치(峙)는 구개음으로 치-티로 음전된 것이다. ‘용화리’는 신라시대 이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그 용들이 모두 승천하고 그 자리에 용화사라는 절을 지었으니, 땅 이름 또한 용화라고 불렀다고 하며, 절은 없어졌으나 삼층석탑이 남아있다.
* [산행의 들머리] — 영양군 일월면 윗대티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
오전 11시, 윗대티에서 산행에 돌입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포장도로는 아주 완만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산간도로로 올라가는 계곡에는 간간이 별장인 듯한 집들이 있었다. 이층으로 된 너와집을 지나고 나서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은 싱그러운 녹음으로 넘실거리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화사한 햇살이 초록의 나뭇잎을 역광으로 비추어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울창한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풋풋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든다. 아주 산뜻하고 쾌적한 기분이다. 이마를 스치고 가는 맑은 바람결이 또한 상큼하고 부드러워 여간 고즈넉하지 않았다. 오늘 산에는 우리 대원 말고는 다른 사람이 전혀 없었다. 산은 순결한 원시림의 일월산이다. 토산의 흙길에는 낙엽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대원들이 열을 지어 푸른 숲속의 산을 오른다. 원색의 옷이 산뜻한 행렬을 이룬다.
사진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두 번 클릭하시면 선명한 원본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 [큰골 정자(쉼터)에서 뿌리샘까지] — 낙동강의 한 지류인 반변천의 발원지
작은 개울,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한참을 올라가니 사각 기둥의 정자 쉼터가 있는 큰골 갈림길(이정표)이 나왔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일자봉(2.5km)이고 바로 올라가면 반변천 발원지를 경유하여 월자봉(3km)으로 올라가는 길, 우리는 계곡을 따라 그대로 올라갔다. 계곡의 물은 많지 않았으나, 있는 그대로의 잡목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어 매우 쾌적했다. 계곡의 산비탈 길, 지난 가을 수북히 쌓인 낙엽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칡밭목이’ 이정표(☞ 반변천 발원지 100m, 월자봉 2.5km)를 지나 몇 개의 통나무를 묶어 만든 다리를 건너 본격적인 산비탈 길로 접어들었다. 얼마가지 않아 ‘뿌리샘’(반변천 발원지) 푯말을 만났다. 산길은 무성한 풀들이 발길에 스치고 순결한 녹색의 숲길이 이어졌다. 산기슭을 감아 돌며 오르고 나무계단을 치고 오른다.
* [산중에 펼쳐진 초원과 영양 산나물 보호구역] — 그리고 이어지는 가파른 산길
울창한 숲에 가려진 하늘이 뿡 뚫린 초원에 올랐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풀들이 무성한 산간도로를 따라 오른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이다. 그런데 좌측의 산록에 출입을 통제하는 팻말과 금줄이 보인다. 외부인들이 함부로 들어가 산나물 채취를 금지하는 영역이다. 게시판에 어수리, 취나물, 참나물, 바디나물, 더덕 등을 식재하여 주민소득을 위하여 보호하는 규정이다. 고개를 넘고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니 ‘일월산’을 적은 표지판이 능선 길로 안내한다. 여기서부터 길은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산은 토산이어서 길은 부드러운데,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가파른 산길이다. 다리가 팍팍하게 아프고 온몸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워낙 길게 올라가는 산길이라 중간에 잠시 쉬면서 간식을 들기도 했다. 다시 경사가 급한 산길. 무지막지하게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 [일자봉과 월자봉 갈림길의 이정표] — 우선, 월자봉 정상에 올라
12시 50분, 월자봉과 일자봉이 갈라지는 지점(이정표)에 도착했다. 이곳은 KBS송신소가 있는 정상부의 능선이다. 여기서 우측(서쪽)으로 가면 월자봉(☞ 400m)이요, 좌측(동쪽)으로 가면 일자봉(일월산 정상, ☞ 1.4km)이다. 우리는 계획한 대로 월자봉을 발길을 잡았다. 산길은 완만하게 올라가는 쾌적한 숲길이었다. 오후 1시 정각, ‘월자봉’(1,205m)에 올랐다. 커다란 자연석에 큼지막한 한자(漢子)로 ‘月字峰'을 음각해 놓았다. 파랗게 맑은 하늘에 간간히 하얀 구름이 떠 있고 그 뒤쪽으로 온통 첩첩산군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대원들이 도착하는 대로 표지석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는다. 후미 대원들까지 올라와 포즈를 잡았다.
* [영양 일월산의 신주(神主)] — 황씨 부인의 전설의 신당(神堂)
그런데 여기 월자봉 아래 약 100m 떨어진 곳에 ‘황씨부인당’이 있다. 일월산을 지키는 신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는 ‘황씨부인당’ 외에 ‘산령각’, ‘일월천지당’이 있는데, 자식 낳기를 원하는 영인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오늘은 그곳에 들리지 않고 바로 일자봉[일월산 정상]으로 향한다.
* [숲속의 오찬] — 월자봉 아래, 정겨운 대원들의 점심식사
월자봉에서 다시 일자봉은 가는 길목, 하얀 꽃봉오리가 뭉실뭉실 피어있는 꽃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그 크기나 하얀 색깔이 수국을 연상하게 하지만 자세히 보니 뭉실한 꽃봉오리의 꽃잎이 수국보다 훨씬 섬세하고 개결했다. 처음 보는 꽃이다. (나중에 확인한 바, 야생 초목에 밝은 민 대장이 이르기를 ‘물참대꽃’이라고 했다.) … 월자봉 가까운 곳, 숲속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각자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내어 놓고 함께 나눈다. 하회탈 회장이 직접 농사지어 가져왔다는 싱싱한 상추와 부인이 마련해주었다는 맛깔스러운 쌈장, 그리고 여성대원이 내어놓은 돼지껍데기 양념볶음,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구수했다. 콜라겐이 풍부한 음식으로 산중 별미이다. 거기에 신시호 대원이 가져온 오미자주 한 잔이 아주 상큼하고 신선했다. 함께 산을 오르며 땀을 흘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자연 속에서 거리낌 없이 한마음이 된다.
물참대
* [일자봉[일월산 정상] 가는 길] — 숲속에 조용히 피어 있는 하얀 산목련
오후 1시 50분, 식사 후 산행에 돌입했다. 앞서 지나온 갈림길(이정표)을 지나 일자봉으로 향하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는 않으나 너덜지대의 평탄하지 않은 길이다. 정상부의 능선의 산기슭을 따라가는 길이다. 능선 너머에는 송신소로 올라오는 산간도로가 있어 차로도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은 울창한 수림이 우거져 때묻지 않은 원시림이다. 숲 속으로 난 돌길을 오르내리는 길목에 고산에서 자생하는 관중이 그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산은 높고 숲은 울창했다. 맑은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어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에 환하게 열리는 기분이다.
낙동정맥의 첨첩 산군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다
|
‘심광체반(心光體胖)’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 ‘마음이 넓어지니 온몸이 편안하고 윤택해진다.’는 뜻이다. 원시림의 맑은 숲길에서 느끼는 순수한 마음이 고단한 산길을 걷는 몸까지 쾌적하게 한다. 그래서인가. 눈길이 가는 싱그러운 나무나 무성한 풀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나의 몸과 마음에 선연히 느껴지는 것이다.
|
오늘 일월산 정상 부근에서 만나는 순백의 산목련, 군데군데 피어있는 하얀 산목련이 눈을 환하게 밝힌다. 꽃말이 ‘수줍음’인 것처럼, 그 순결한 자태가 조용히 길손의 마음을 끈다. 일명 함박꽃이라고 하는 이 꽃은 주로 깊은 산중에 피어나는데, 넓은 잎들이 무성한 가운데 한 송이 꽃봉오리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피는 것이다. 높은 나무의 잎들에 얹혀 조용히 피어있는 자태는 순결하고 고고한 기품을 풍긴다. 함박꽃은 속씨식물 중 꽃 생김새가 가장 원시적이다. 무궁화처럼 매일 몇 송이씩 피어나서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으며 탐스러운 꽃에서 풍겨나오는 은은한 향기기 일품이다. 중국에서 ‘천녀화(天女花)’, 천상의 여인이다. 불교에서는 ‘용수화’라고 하는 데 하얗게 피는 꽃송이 한 가운데 있는 수술과 가을에 익는 열매모양이 용(龍)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의 이상세계인 ‘용화세계(龍化世界)’를 상징한다. 발아래에 보이는 단풍취도 싱싱하고, 월자봉 아래에서 보았던 하얀 물참대꽃도 그 탐스럽게 피어 있다. 순백의 맑은 꽃들의 숨결이 더운 가슴을 신선하게 보듬는다.
함박꽃
* [일월산 정상의 풍경] — 정상석, 현대적 감각의 조형물, 하늘로 열린 야외무대
오후 2시 30분, 오늘의 최고 산행 포인트인 일월산(1,219m, 일자산) 정상에 도착했다. 울창한 숲길을 벗어나니, 거리낌 없이 열린 시공(視空) 속에 천하의 첩첩 산들이 장관을 이루며 시야에 들어온다. 산을 오르는 것이 늘 그렇듯이 힘들게 높이 오른 만큼 세상이 크게 멀리 보이고 자연의 아름다운 장엄경을 한 가슴에 안을 수 있다. 그것은 높은 하늘 공간에 오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락이고 그리하여 산과 사람이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대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자도 ‘동산이 오르니 노나라가 작게 보이고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고 했다. 물론 이 말은 성현이 추구하는 도(道)의 경지를 말한 것이지만, 내 오늘 청정한 일월산 정상에 올라 느끼는 마음 또한 그러하다. 아무런 사심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지니는 것, 그것을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 했다.
일월산 정상(頂上)의 표지석이 아주 조형적이다. 몇 개의 장방형의 받침돌 위에 놓인, 정사각형의 커다란 ‘표지석’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한 것이었다. 정사각형 대리석은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안에 커다란 원(圓)을 양각해 놓았다. 원의 전체를 보면 해[日]를 나타낸 것이고 원의 가장자리 일부를 떼어 놓은 부분은, 차고 기우는 달[月]을 상징하는 듯 했다. 그리고 커다란 원의 한 가운데 세로로 ‘日月山’이라는 이름을 순백의 글씨로 음각해 놓았다.
표지석의 뒷면에는 이문열 쓴 ‘日月頌辭’(일월송사)가 새겨져 있다. 이문열은 영양 출신의 소설가이다. 다음은 <일월송사>의 전문이다.
日月頌辭
崑崙의 정기가 해뜨는 곳을 바라 치닫다가 白頭대간을 타고 남으로 흘러
동해 바닷가에 우뚝한 靈山으로 맺히니 이름하여 日月山이다.
해와 달을 품은 넉넉한 자락은 그윽한 옛 고을 古垠을 길러내고
삼엄한 기상은 거기 깃들어 사는 이들에게 매운 뜻을 일깨웠다.
세상이 평온하면 이 땅 가득 지혜와 영감이 향내를 피워내다가도
나라가 치욕을 입으면 비분에 찬 隱士들의 首陽山이 되거나
죽기로 맞서는 志士들의 마지막 베개와 무덤이 되었다.
이제 옛 古隱은 文鄕 英陽으로 자라 새로운 천 년을 마주하고 섰으니
아아, 일월산이여 그 기상 그 자태 바뀌고 다함이 없으라,
우리 영양과 더불어 길이 우뚝하라.
서력기원 2001년 1월 1일 李文烈
* [영양 출신의 소설가 이문열(李文烈)] —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대작가
이문열(李文烈)은 1948년 5월 18일 이곳 영양 출생으로 한국 문학사의 큰 업적을 이룬 작가이다. 놀라운 필력으로 문학계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쏟아 내고 있는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젊은 날의 초상』,『영웅시대』,『시인』,『오디세이아 서울』,『황제를 위하여』,『선택』등 다수가 있고, 중단편소설『이문열 중단편 전집』(전5권), 산문집 『사색』,『시대와의 불화』, 대하소설『변경』,『대륙의 한』이 있으며, 평역소설로『삼국지』,『수호지』,『초한지』를 선보였다.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이문열의 작품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월북한 아버지로 인한 좌절, 전통적인 가풍의 집안은 작가의 경험인 동시에 소설에서 쉽사리 읽어낼 수 있는 특징이다. 『사람의 아들』,『황제를 위하여』,『금시조』,『선택』 등의 이런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문열의 경험이 한국 현대가 겪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가 거듭 묻는 질문-전통과 현대의 문제, 분단 상황의 문제 등은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며 한국사회가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이문열의 대답은 보수적이고 전통지향적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선 수구주의나 남성우월주의로 비판 받기도 했다.『선택』을 둘러싼 논쟁이나 총선연대 활동, 언론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작가가 소설에 담고 있는 주장이 무엇이든, 그가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이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 문학에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커서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가장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이 시대 최고 작가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또한 이문열의 작품은 현재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전 세계 20여 개국 15개 언어로 번역·출간되고 있다. 2011년에는 「들소」, 『시인』 등의 계보를 잇는 예술가소설 『리투아니아 여인』을 발표했다.
* [일월산 정상의 풍경] — 하늘로 열린 산상의 무대, 동해 해맞이 명소,
일월산 정상(頂上)은 험한 오지의 고산이지만 ‘새해의 해맞이’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정상의 표지석은 동쪽 방향으로 확연히 열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낙동정맥의 첩첩산군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그 너머에 동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석 앞 너른 공간에는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무대의 객석 같은 아주 넉넉한 나무테크 계단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동해 일출을 볼 수 있도록 시설해 놓았다. 그야말로 하늘과 태양을 바라는 산상의 야외무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역의 특별한 행사나 산상 음악회를 열어도 좋은 만큼 풍광이 아름답고 확연한 전망이 좋은 공간이다. 이곳 지차체에서는 영양의 진산(鎭山)인 일월산에 많은 정성을 기울여 놓은 것 같았다. 비록 1,200고지의 높은 산이지만 가까운 곳에 KBS송신소가 있어 정상부까지 자동차가 올라올 수 있다. 우리처럼 몸으로 힘들게 산을 올라오지 않더라도 그만큼 접근성이 좋다. …… 오늘 우리 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정상석을 벗삼이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모든 대원들이 계단에 앉아 마음의 동해에 일출을 떠올리며 일월산의 맑은 정기를 한 몸에 안았다.
|
* [일월산 험난한 하산 길] — 급전직하, 아래로 아래로 쏟아지는 가파른 산길,
오후 2시 45분, 하산에 돌입했다. 하산지점은 ‘용화선녀탕’ 계곡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하산 길은 경사가 가팔랐다. ‘큰골’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올 때와는 아주 다르게 길은 험난했다. 일원산은 전체가 토산이지만 정상에 가까운 산길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어 발을 놓기에 아주 불편했다. 그렇게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이었다. 오후 2시 55분, 일자봉 정상에서 0.3km 내려온 지점(1,085m),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에서 능선을 따라 그대로 내려가면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 윗대티(☞ 2.5km)로 내려가고, 오른쪽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면 용화선녀탕(☞ 2.5km)이다. 우리는 계획한 대로 선녀탕 길을 택하여 하산을 했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아주 가팔랐다. 숲은 울창하고 산길은 험난했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물기를 머금은 흙길은 아주 미끄러웠다. 비록 지그재그 형태로 내려가지만 거의 급전직하에 가까운 가파른 길은 몸의 균형을 잡기가 아주 어려웠다. 스틱을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지만, 산길이 지나치게 가파르고 미끄러워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때로는 길목의 나뭇가지가 잡기고 하고 때로는 허리를 낮추어 앉음새를 취하기도 했다. 늘 건강한 입담을 과시하는 K대원은 몇 차례로 미끄러져 자신의 ‘영역 표시’(?)를 하기도 했고, 언제나 소녀처럼 명랑한 L대원은 엉덩방아를 찧고 한 차례 뒹굴기도 했다. 다행이 몸을 다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산길은 가파르고 미끄럽고 험난했다. 그리고 그러한 급경사가 쉬 끝나지 않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면 가파른 산길이 끝나는데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그리고 원시(原始)의 계곡] — 울창한 수림과 이끼 낀 바위, 청랑한 물소리
오후 3시 35분, 드디어 계곡에 내려섰다. 우리가 내려오는 하산 길은 워낙 가파르고 험하여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깊은 산 깊은 계곡, 울창한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도 바위가 미끄러워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야말로 원시림(原始林)의 계곡이다. 길이 있는 듯하다가 길이 사라지고 벼랑을 따라서 걷다가도 다시 계곡을 건너야 하는 길이었다. 바위마다 초록의 이끼가 끼어 자연의 정결한 생명력이 느껴지고, 잡목들이 울창한 계곡은 해가 기운 듯 어둑했다. 이끼가 낀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더없이 맑았다. 고사리과의 관중은 기품이 있다.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줄기가 힘차고 그 줄기에 달린 잎들이 반듯하고 가지런하다. 계곡물은 작은 폭포로 쏟아지다가 맑은 웅덩이를 이루기도 한다. 미끄럽고 험한 계곡길이다. 평평한 암반에도 싱그러운 초록의 이끼가 뒤덮여 응달진 계곡의 정취가 더욱 깊다.
관중
|
그렇게 30여 분 이상을 내려오니 하늘을 찌르는 낙엽송 군락지가 나타나고 길도 비교적 평탄해졌다. 이 계곡은 일월산 안에서도 무속이 성행하는 곳이다. 넓어진 계곡 가장자리에 정성으로 쌓은 두 개의 돌탑이 있고, 그 돌탑 사이에 네모진 돌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치성을 드리는 촛불을 켜놓았다.
* [강림곡 용화선녀탕 풍경] — 인간의 세상이 아닌 신선(神仙)의 세계
조금 아래로 내려오니 ‘용화선녀탕’ 안내판이 있다. ‘용화선녀탕은 일월산 여러 계곡 중 일자봉 동북편에 이어진 강림곡 초입에 위치해 있다. 하늘나라 선녀를 다스리는 옥황상제가 이곳에 내려와 보고 선녀들이 목욕할 곳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선녀들의 오르내림을 허락했음인지 골짜기의 이름이 강림곡이요 선녀들이 목욕을 한 곳이라하여 선녀탕이라고 한다.’ 그 아래 폭포를 바라보는 전망대인 듯한 나무테크 시설물이 있다. 내려가 보니 치성을 드리는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의 명칭이나 전설이 도교적인 신앙의 현장이다. 폭포는 수량이 많지 않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으나 물줄기가 깨끗하고 청아했다. 중간의 단계에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 조금 큰 웅덩이이가 있다. 이곳이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재계를 하는 곳이겠다.
|
* [영양 일월산의 굿당] — 신앙의 대상이 된 ‘황신부인당’과 굿판 ‘선황당’
오후 4시 15분, 두어 채의 건물이 있는 굿당에 내려왔다. ‘선녀탕’에서 조금 내려오면, 아담하게 지어진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를 둘러보니 여느 사찰의 분위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제일 위쪽의 두 칸 짜리 크지 않는 건물에 각각 ‘황씨부인당’과 ‘산신각’ 현판이 걸려 있고, 그 건물 오른쪽에는 ‘호랑이를 타고 앉은 신선(神仙)’을 조각한 조형물을 모셔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장대한 거송(巨松) 아래에 나무테크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 오색의 천을 매달아 놓았다. ‘선황당’이다. 바로 굿을 하는 곳이다. 원래의 ‘황씨부인당’은 월자봉 정상 아래에 있다.
여기 경내의 중앙에는 사람이 기거하는 건물이 있고 그 아래에는 아담한 연못 정원이 꾸며져 있는데, 오늘따라 하얀 연꽃 몇 송이가 정결하게 피어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일월산 내림굿을 하는 굿당이었다. ‘산신각’이나 ‘신선’은 다분히 도교적인 것이고, ‘황씨 부인당’과 ‘선황당’은 굿을 하는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무속 신앙은 늘 산신이나 신선 사상과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다. 황씨 부인당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
|
* [황씨부인당 이야기] — 영양 지방 전해지는 원혼의 신격화 이야기
‘황씨 부인’의 이야기는 경상북도 영양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傳說)로 전해온다. 황씨 부인이 시어머니의 구박 또는 남편의 소박으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쪽이든 한 여인이 한을 품고 죽어 원혼(冤魂)이 되었다는 모티브이다.
☞ [황씨부인당의 전설 ①] — 시어머니의 혹심한 구박을 견디다 못해 자결한 며느리
영양군 청기면 당리 마을의 우씨 집안으로 시집 온 황 씨가 아들을 낳지 못해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일월산으로 올라가 목을 매고 죽었다. 그 후 일월산 삼막(蔘幕)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황 씨를 남편이 장례 지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거듭 발생했다. 죽은 황씨 부인이 당리 마을의 영천 이 씨 명존(命存) 할배에게 현몽하여 당(堂)을 지어 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좇아 황씨 부인을 당신(堂神)으로 모셨다.
☞ [황씨부인당의 전설 ②] — 첫날밤 신랑으로부터 소박을 당한 황씨 부인의 이야기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황(黃) 씨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워낙 인물이 고와 마을의 두 젊은이가 서로 탐내어 결혼하고 싶어 했다. 황씨 처녀는 두 총각 중 한 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신혼 첫날밤 뒷간에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新房) 문앞에서 기겁을 했다. 신방의 문에 칼날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신랑은 앞마당의 대나무 그림자를 칼 그림자로 잘못 알고 처녀를 빼앗긴 연적(戀敵)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죽이려고 숨어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신부는 족두리와 원삼(圓衫)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처녀의 시신은 첫날밤 모습 그대로 삭을 줄을 몰랐다. 살아 있었을 때처럼 앉음새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한편 멀리 도망간 신랑은 외지에서 다른 처녀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 이들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생겨도 낳기만 하면 이내 죽곤 했다.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에게 물어보니 바로 황 씨 규수의 억울한 원혼 때문이라고 했다. 뒤늦게나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친 신랑은 지금의 일월산 부인당 자리에 신부의 시신을 옮기고 사당(祠堂)을 지어 혼령을 위로했고, 그때서야 신부의 시신이 홀연히 삭아 없어졌다고 한다.
황씨 부인의 죽음은 시어머니의 구박 또는 남편의 소박과 같은 가부장적 횡포가 가장 큰 원인이다. 시어머니가 구박한 큰 이유는 황씨 부인이 계속 딸만 낳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소박은 황씨 부인이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으로 오해한 결과이다. 그래서 자결한 황씨 부인은 죽어서도 죽지 않은 상태로 일월산 주변을 맴돈다. 마을 사람들 앞에 나타나 산 사람처럼 말을 걸기도 하고 원혼(冤魂)의 형상으로 비상하게 나타난다.
그 원한(怨恨)의 결과는 ‘해코지’ 또는 재앙(災殃)으로 나타난다. 원혼(冤魂) 설화는 살아서 '원한'을 갖고 죽으면 원혼이 되는데, 이는 ‘원한 풀기’[解寃]라는 결말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이 설화 역시 결원-해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코지에 이어 나타나는 현몽은 마을 공동체가 원혼 발생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이다. 황씨의 원혼은 남편 또는 마을의 유력자에게 현몽(現夢)하여 공동체의 신(神)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한다. 여성 원혼이 마을 공동체의 풍요와 안녕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해원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 [황씨부인 이야기의 문학적 변용 ①] — 미당 서정주(徐廷柱)의「신부(新婦)」
이 설화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 부근의 당리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형성된 데다 여성의 원혼이 일월산 일대의 공동체 신앙으로 오래 지속된 점에서, 원혼의 신격화(神格化)를 보여 주는 전형적 사례이다. 지금도 일월산신의 신내림을 받으려는 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황씨 부인은 일월산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은 여러 문학작품의 소재로 다양하게 원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에 조지훈(趙芝薰)의 시「석문(石門」과 서정주(徐廷柱)의 시「신부(新婦)」가 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의 시「신부」
이 시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主)의 시집『질마재신화』첫머리에 실린 작품이다. 『질마재신화』는 서정주의 여섯 번째 창작 시집으로서, 산문 지향적 성격이 강해지는 후기시의 출발점이 되는 시집이다. 총 45편의 산문시로 이루어져 있다.「신부」는 우리의 고전 설화-황씨부인 이야기-를 끌어와 현대시로 변용(變容)시킨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호흡이 긴 산문시의 틀 안에 ‘오해가 빚은 비극’과 ‘여인의 정절’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 [황씨부인 이야기의 문학적 변용 ②] —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의「석문(石門)」
우리 문학사에서 청록파로 알려진 시인 조지훈은 이곳 영양 출신이다. 조지훈 시인은, ‘황씨부인의 설화’를 바탕으로「석문(石門)」이라는 시를 남겼다. 시적 화자가 바로 ‘황씨 부인’이다.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 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모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조지훈「석문(石門)」(전문)
* [에필로그 ] — 원시의 청렬(淸冽)한 숨결이 살아 있는 일월산
영양은 강원도 태백시와 경상북도 청송의 중간에 있는 산간 오지(奧地)이다. 지금은 도로망이 잘 구축되어 수월하게 오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외부인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첩첩산간에 있는 곳이다. 그래서 ‘6·25전쟁’ 당시에 이곳에서는 아무런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영양 출신 권용길 님의 말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북쪽에 위치한 일월산은 산이 높아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해와 달을 먼저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름이 일월산이 되었다고 한다. 또 산마루에 천지가 있는데, 그 모양이 해와 달을 닮아서 일월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 산에는 황씨 부인의 전설이 전하는 ‘황씨 부인당’이 있는데, 지금도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원시의 울창한 숲 속에서 느끼는 청렬(淸冽)함은 일월산이 우리에게 안겨준 행복이었다. 거기 낙동강의 발원지가 있는 곳, 그만큼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의 순결함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끝>
|
첫댓글 영양 일월산 원시 의 녹음 이그대로 살아있는 일월산 오 고문 님 의 상세하신 기행문 까지 넘넘 감사 합니다 항상 느끼는 세재의 애정어린 산행기 에 그저 감탄 뿐입니다 우리 고문님 세재 사랑 하는 마음 으로 항상 건강 챙기시고 오래오래 산행기 남겨 주시길 바래는 맘 입니다 담 산행 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