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다시 읽다
허정진
한 줄의 시(詩)가, 한 폭의 수채화가 거기 있다. 나풀나풀 날갯짓으로 투명한 오선지를 노래하듯이 오르내린다. 한복의 선과 색이 저렇고, 부채춤을 추느라 사뿐사뿐 버선발의 율동과 맵시가 저러할 것이다. 기류를 타는 새가 아니기에, 겅둥거리는 건들마 어깻죽지에 올라 우아하고 경쾌한 공중 발레를 펼친다. 점점이 허공을 꽃비로 수놓은 나빌레라, 분명 비행이 아니라 춤사위다.
그 몸짓에 현혹된 인간들이 아기의 ‘나비잠’이나 검불을 날리는 키를 ‘나비질’한다고 하고, 세수하고 대야의 물을 마당에 쫙 퍼지게 끼얹는 것도 ‘나비물’이라고 명명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현란한 손놀림도, 빙판 위 피겨 선수의 우아한 몸동작도 모두 나비 흉내를 내는 것이다. 육이오 전쟁의 전투 상황에서 “아! 나비다!” 한 마디 외침과 함께 목숨을 잃은 그 병사는 나비의 영혼과 몰래 입맞춤했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유약한 존재다. 한 방의 죽음이 장전된 가미카제식의 벌 같은 운명 교향곡이나, 위풍당당한 개미처럼 라데츠키 행진곡의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약한 것들은 위장술에 능하다. 나를 방어하기 위해 독이나 속도도 갖추지 못한 나비는 날개에 화려한 색깔과 무늬를 방패 삼아 꽃으로 숨어들었다.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라는 시인의 은유는 그런 공감에서일 것이다.
너울너울 허공을 건너뛰는 위험한 스텝을 두고 누가 그를 가볍다고 치부했는가. 꽃을 향한다고 사람처럼 꽃향기에 취해서 찾는 것이 아니다. 갈지자로 횡보하며 방향도 없는 길을 가는 것 같지만 나비의 눈엔 꽃들이 삶의 이정표며 나침반이다. 꿀을 먹는 나비나, 이슬만 먹고 사는 반딧불이나 그들에게는 먹고사는 생존 방식이자 실존의 그림자들이다.
나비의 생이 화려하다는 것은 사람의 착각이다. 나불대는 나비나, 날렵하게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숭어나 그것이 한바탕 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이다. 동물의 사체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액을 빨아먹거나, 시퍼런 강줄기 앞에서 아무 두려움 없이 도하하는 황홀하고 장엄한 나비의 날갯짓을 보았는가. 삶 앞에서 빈약하고 나약한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다.
찢기고 상처 난 꽃잎에 더 발길이 잦은 나비의 애증은 어디서 오는가. 향은 나는데 꿀이 없으면 벌들은 사나워지지만, 나비는 꽃의 영혼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래서 아슬한 일탈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가벼운 접촉만 한다고, 벌이나 개미처럼 내일을 위해 예비해 둘 줄 모른다고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도 사실이다. 필요 없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곧 나비의‘텅 빈 충만’인 것도 모르고서.
한때는 나비를 조롱한 적이 있었다. 그 어디에도 꿀벌 같은 충직함, 개미 같은 성실함도 보이지 않고 홀로 유유자적하는 그 이질감에 치를 떨었다. 아무 노력과 수고도 없이 겉으로 미혹적인 자태만으로 삶을 유린하는 것 같아서, 정당한 삶의 기준과 도리에 순치하지 않고 비생산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 같아서였다. 세상에 삶 같지 않은 삶이 어디 있다고, 석가모니도 자기 고향의 나비를 그리워하며 스승과 다름없다고 했는데.
무릇 용화와 우화의 변태를 거치지 않은 삶은 없다. 우화할 때 잘못하여 펴지 못한 날개는 죽음에 이르고, 일령이령삼령의 탈피를 거쳐 기나긴 고통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어 한 마리 나비로 탄생한다. 낭만주의자 슈만의 피아노 독주곡 <나비>처럼 비상의 잠재력을 지닌 현실 속의 애벌레가 마침내 변용을 이루어 초월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얻도록 희원의 메시지였다.
여린 생이 끌고 가야 하는 무거운 삶이기에 순결하고 고결하다. 동식서숙(東食西宿)하며 돌아올 집도 없이 떠나는 여정이지만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홀가분함이라니, 저 허공 한 귀퉁이가 케렌시아며 카르페 디엠이다. 삶은 나를 찾는 여행이다. 세상의 변화를 포용하고 희망의 전령을 날갯짓하는 아롱다롱한 비상이다. 자기 삶에 자유를 꿈꾸는 구속받지 않은 몸짓이다.
부전나비 한 마리가 부챗살 날개를 펄럭이며 장다리꽃에 하르르 내려앉는다. 쉬어갈 참인지 푸른색 날개를 등과 수직으로 세워 곱게 접었다. 찬물로 풍경을 씻어낸 듯 갑자기 사위가 고요에 빠져든다. 꽃에서 달콤한 꿀을 취하고는 저 노란 꽃술을 부여잡고 우아한 탐미에 빠져들 모양이다. 사랑만큼 가성비가 낮은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시간과 영혼을 함부로 구애에 쏟아붓지도 않는다. 매미처럼 들어 달라는 울음도 없고, 반딧불이처럼 보아달라는 형광도 없다.
삶이란 신비고 축제다. 나비의 날갯짓이 유희고 풍류라 해도, 설사 한밤의 호접몽 같은 활옷이라고 해도 어떡하랴. 소리가 없어 풍각쟁이는 못 되지만 나불나불 굴퉁이 춤꾼이면 족하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듯, 꿈이 없으면 평생 남의 꿈을 위해 살아야 하는 법이다. 행복은 여정에 있지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나비는 출발부터, 행보 그 자체가 행복이다.
무위(無爲)는 곧 영원을 사는 삶이다. 욕망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자로 사는 것, 순정한 시간으로 무상성의 세상과 공존하는 것이 나비의 삶이다. 나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피해를 주지도 않고, 앞서거나 누구를 방해하지도 않는다. 채우고 숨기고, 탐하고 뺏는 일은 인간사일 뿐이지 자연계의 공동체 속에 사는 나비에게는 처음부터 의미 없는 일이다.
나비의 날갯짓에 그들의 언어와 문장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내일을 염려하고 절망하기보다는 오늘, 남의 복사본이나 모사품이 아니라 ‘나’라는 원본으로 살아가라고 귀띔한다. 세상은 좋은 일, 나쁜 일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일, 저런 일도 있다며 슬며시 어깨를 다독인다. 인간의 삶이 때로는 지고지순하고 말랑말랑해진 것도, 비폭력과 평화를 외칠 수 있는 것도, 욕심이나 이기에서 벗어나 여유와 낭만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모두 나비의 덕이다.
나풀나풀 나비 한 마리가 허공을 다 짊어지고도 가볍게 날고 있다. 터벅터벅 인생길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하는, 아! 나비보다 가볍기만 한 나의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