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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을 섬기는 것을 어찌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124위 순교 복자 시복식이 거행된지 벌써 1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참 세월이 빠릅니다. 통상 바티칸 외에서 거행되는 시복식은 시성성 장관 추기경이 집전하는 것이 보통인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친히 방한하셔서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거행하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다블뤼 주교님께서 쓰신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1759~1797) 대한 약전을 읽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현재 충남 금산군에 위치해 있는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 그곳에 가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진산성지(대전교구 관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가문은 여러 정관계 인사들을 배출한 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예의바르고 총명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25세 되던 1783년 과거에 응시해서 진사(進士)를 취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물론 가문의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 윤지충 바오로가 1784년 겨울 경성에 머물렀을 때,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놀러갔다가 운명 같은 책을 두 권 발견합니다. 그 유명한 ‘천주실의’와 ‘칠극’입니다.
순식간에 두 권의 책을 읽은 윤지충 바오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두 권의 책을 사본으로 만들어 계속 탐독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갈증은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있는 여러 가톨릭 관련 서적들을 읽은 그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교리교사로부터 예비자 교리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스스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 윤지충 바오로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과 진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발성, 그 적극성 앞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의 하느님과 진리, 새로운 세계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조상제사 문제, 신주 문제를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즉시 관아로 자진 출두했습니다.
진산 군수와 윤지충 바오로 사이에 이루어진 심문 기록이 아직도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수: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바오로: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진산 군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충 바오로를 잘 설득해서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군수는 탄식을 터트리며 그를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전주 감영의 감사가 또 다시 묻습니다.
감사: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윤지충 바오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너는 죽게 되더라도 이 종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윤지충 바오로: “만약 제가 높으신 아버지를 부인하게 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견고한 가톨릭 신앙 때문에, 임금 앞에는 반역자, 부모 앞에는 불효자, 친구들 앞에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윤지충 바오로는 단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드러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사형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30대의 곤장을 맞고 난 그에게는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이 언도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그는 33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
복음: 요한 12,24-26
영화 ‘아메리칸 뷰티’는 1999년에 개봉한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로,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레스터 버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레스터는 중년의 직장인으로,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상을 살아가며, 직장에서의 스트레스와 가족과의 소통 부족으로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습니다. 아내 캐롤린은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며 성공을 추구하지만, 역시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부동산 재벌과 외도에 빠집니다.
레스터의 삶은 딸 제인의 친구인 안젤라를 만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안젤라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매료된 레스터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로 결심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몸을 단련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자신이 항상 꿈꿔왔던 스포츠카를 구매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결국에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전에 행복했던 오래된 가족사진을 보며 끝을 맺게 됩니다.
영화에서 레스터는 종종 상상 속에서 안젤라와 함께하는 장면을 떠올리는데, 이때 등장하는 장미는 사랑과 아름다움, 삶의 의미와 열정을 상징합니다. 장미는 레스터의 욕망과 새로운 시작을 향한 갈망을 나타내며, 그의 무의미한 일상에 색다른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장미는 상상 속에만 있지 않고 영화 내내 등장합니다. 각자가 삶의 열정인 장미를 찾고 싶어 했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장미가 아닌 상상 속의 장미를 추구하게 되면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목숨을 걸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습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고 목적이 됩니다. 그 목숨을 걸 것은 분명히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열정(passion)을 불러일으키고 나의 땀과 피를 쏟게 합니다. 그래서 열정은 수난(passion)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이 없는 삶은 무기력합니다. 사람은 삶의 이유가 있어야 살기 때문에 내가 선한 목적으로 쏟지 않는 피는 죄를 위해 사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죄라도 삶의 이유로 삼아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 율법학자 엘아자르라는 노인도 돼지고기를 먹이려는 이들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죽음을 택합니다. 어차피 죽는 목숨, 죄짓는 목적이 아닌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데 쓰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에 죄짓기 위한 에너지가 남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 못하면 그만큼 죄를 짓는데 사용됩니다. 매를 맞아 죽어가면서도 엘아자르는 말합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마치 소크라테스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배부른 돼지가 되어가면서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동경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목숨을 너무 아까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어차피 사라져버릴 우리 목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기자가 우사인 볼트에게 왜 빨리 은퇴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더는 뛸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올림픽 3관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 번의 올림픽에서 세 개씩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러면 그는 에너지를 어디에 썼을까요?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마지막 올림픽이 끝나고 광란의 파티를 하여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죄를 왜 짓게 될까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에너지가 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당신 계명에 우리 목숨을 걸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에게 100억짜리 명마가 있다면 술을 먹이고 지방을 먹이고 잠만 재우겠습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내어놓지 못하는 목숨은 모두 저절로 죄를 짓는 데 사용되게 됩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것인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것인지는 우리 결단에 달렸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은 한국천주교회의 초기의 순교 복자들 124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호교론 50,13) 했듯이 이분들은 참으로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씨앗이 된 분들이다. 지난 2014년 8월 16일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시복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우리 순교자들은 모두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 밀알이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살아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신 길과 같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는 하느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십자가와 부활의 열매로 모든 이가 그분을 알게 되었듯이 순교자들의 피는 이렇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삶에 대해 과도한 욕망에 빠짐으로써 자기를 파괴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자신이 파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로우며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 우리 자신을 이겨 나가야 한다. 순교자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그분을 올바로 섬기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사랑을 실천할 때,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태 6,3 참조).
오늘의 순교 복자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닮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당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가장 큰 사랑을 드리셨다. 우리가 지금 순교 정신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같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끊고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현하며 그분을 체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의 길을 가지 못하면서 그분을 따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렸을 때, 아침이면 집안이 시끌벅적했습니다. 6남매이다 보니, 회사 출근과 등교 준비로 늘 바쁜 아침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쁜 아침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바로 화장실 문제입니다. 가족 모두 이용해야 하는데, 화장실 숫자는 마당 구석에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장실 앞에 줄이 서 있을 때, 저는 곧바로 앞 건물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이 앞 건물이 바로 성당이었습니다.
1분만 뛰어가면 바로 성당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당 화장실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집처럼 편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집 화장실보다 더 많이 이용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 집에 들어가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정 급하면 사정을 이야기하고서 화장실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웬만해서는 이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당은 제게 너무나 편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편한 곳이 된 것은 그만큼 성당에 자주 갔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를 했고, 또 복사를 서면서 성당은 집처럼 편해졌습니다.
주님과 편한 관계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많이 주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과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가깝고 편한 관계가 되는 길입니다. 즉, 기도를 통해 대화하고,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들 때, 주님께 얼른 달려가서 그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 안에서가 아닌 세상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들은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셨으며 이로써 지금의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신 우리의 선조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실제로 우리 순교 선조들은 자기 죽음을 통해 이 땅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 분이셨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크기에 배신할 수 없었고, 그 사랑이 너무 편안해서 주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을 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이 보여주셨던 주님께 대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가득 담을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편한 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과유불급)(논어 선진 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죽어야 살으리.
우리의 자아가 죽은 자리에
하느님을 심어야
우리가
생명의 씨앗을 틔우며
자유로워진다네.
누군가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로
자신을 들어 올리지만
누군가는
하느님 안에 자신을 숨기며
그분을
영원한 은신처로 삼는다네.
복음말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