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꽃향기 속에서(548) – 연인산 변산바람꽃(1)
변산바람꽃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 정지용, 「호수」
▶ 산행일시 : 2026년 3월 24일(화), 맑음, 미세먼지 보통
▶ 산행코스 : 백둔리 버스종점,아재비고개,백둔리 버스종점
▶ 산행거리 : 도상 6.3km
▶ 산행시간 : 4시간 22분(09 : 28 ~ 13 : 50)
▶ 교 통 편 : 전철과 버스 이용
▶ 구간별 시간
08 : 45 – 가평역
09 : 28 – 백둔리 버스종점, 산행시작
10 : 34 – 아재비고개 100m 전, 탐화시작
11 : 06 – 아재비고개, 점심, 탐화 계속
12 : 55 – 탐화 종료, 하산
13 : 50 – 백둔리 버스종점, 버스출발(14 : 15)
14 : 58 – 가평역
야생화 찾아가는 날이 매번 길일이다. 길일에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가는 날이 길일이다.
대구에 사는 사진작가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월간 산」에 털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자원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도심공원에서 노인 분들의 영정사진을 무료로 일삼아 찍어주었다. 어느 날부터 몸
이 몹시 피곤해지고 기운이 빠져 병원에 갔다. 의사의 진단은 노인 분들의 영정사진을 그렇게 허구한 날 찍어대면,
그 노인 분들이 살아온 신산스러웠던 삶의 기운이 들여다보는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서 사진 찍는 사람에게 스며든
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에 가서 산 사진을 찍으며 산의 정기를 듬뿍 받으시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분은 산을 타기 시작했다. 한 번은 백두산을 갔는데 그날은 전에 없이 맑은 날이라서 백두산 사진을 멋지
게 찍었다. 잘 찍힌 사진은 사진전시회에서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었고, 관공서와 학교, 각종 단체 등에서 주문이
쇄도하여 백두산 사진 한 장으로 당시에 2억원 가까이 벌었다고 한다. 그분은 잠을 자다가도 문득 영감이 떠오더라
고 한다. 어느 날은 밤에 폭우가 쏟아지는데, 지금 팔공산에 오르면 멋진 풍경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는 영감을 받
았다고 한다. 새벽 폭우 속에 배낭을 꾸려 팔공산을 올랐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정상에 임박해서 폭우가 그치고
날이 밝으며 보기 드문 절경이 펼쳐지더란다.
나는 아직 그분과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은 천만 아니고, 인터넷에서 여러 블로그와 카페 등을 열심히 검색하고, 과거
3년간의 개화 상황을 종합하여 분석하고 검토해서 출사 나간다.
가평역 도착시간 08시 18분. 백둔리 가는 버스는 08시 45분에 출발한다. 27분의 여유가 있다. 화장실 들르고, 역사
출입문 밖에 있는 커피자판기에서 500원짜리 따뜻한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아 느긋이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커피자판
기가 오늘은 고장수리 중이라고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미국영화 제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에
개봉했다.
길 건너 버스승강장 옆에 편의점과 커피전문점이 있다. 편의점에 들러 2,000원짜리 라테 캔 커피 한 개 사서 마신
다. 밍밍한 캔 커피가 한 번에 마시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 남겼다가 산행 중에도 마셨다.
백둔리 가는 08시 45분발 15-1번 버스는 꽉 찬다. 대부분 가평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다. 가평 시내를 빠져나가
자 버스는 한산하다. 백둔리 종점까지 가는 사람은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다. 나와 동년배가 될 듯한 남자다. 나처
럼 아재비고개에 변산바람꽃을 보러간다고 한다. 네이버카페 ‘들꽃’에서 활약하는 들녘 님이다. 반갑다. 근래 출사
지에 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간다.
그런데 내가 몇 번이나 같은 얘기를 해도 딴 말만 한다.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며 얘기해도 그랬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들녘 님은 자기 귀가 잘 안 들리니 큰소리로 말하시라고 한다. 임도가 끝날 즈음에는 하도 소리쳐 내 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임도 아래 계류 폭포 지나 소로로 들어서고, 앞뒤로 가게 되니 비로소 대화가 끊기고 목을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재비고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험하다. 돌길에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함부로 가다가는 엎어지거나 허방에 빠
지기 쉽다. 징검다리 건너듯 큰 돌을 골라 디디며 오른다. 왼쪽 북사면은 눈밭이고 그 아래는 빙판이다. 계류는 빙하
다. 빙하를 건너가서 빙판길을 오르다, 빙하를 건너와서 돌길을 오르기를 반복한다.
계곡이 흐지부지 되고 사면이 점점 일어설 무렵 등로 옆에 변산바람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울러 고개 들면 사방이
변산바람꽃 화원이다. 배낭 벗어놓고 납작 엎드려 눈맞춤 하기 시작한다. 들녘 님은 더 올라가지 않고 아예 이곳에
진을 치겠다고 한다. 이 너른 화원에 우리 둘뿐이다. 조금 후 아재비고개에 올라서는 나 혼자일 것이다.
굳이 등로 벗어나 사면을 살필 필요가 없다. 등로 주변만 살펴도 다 보지 못한다. 무릎 까진다 상관 않고 삼보일배
하면서 오른다. 오늘은 바람이 잔다. 꽃을 사진 찍기에는 최적이다. 다만, 햇빛이 너무 밝은 게 흠이다. 아재비고개
고갯마루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온 사면을 헤집고 다니지는 않았다. 풍도바람꽃도 이랬
다. 아니 거기보다 여기가 더 넓다. 연인산 쪽, 명지산 쪽, 상판리 쪽, 백둔리 쪽. 동서남북을 갔다 왔다 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변산바람꽃 모양을 한 환희이다. 이때는 생각도 시간도 멈춘다.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가 비단 옛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
다. 나에게 나비는 곧 변산바람꽃이다.
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는 아니어도, 이들과 하룻밤이라도 보내고 싶다. 그래서 저녁에는 어떤 모습이며, 밤에는
어떤 모습이며, 이른 아침에는 또 어떤 모습인지 곁에서 자세히 보고 싶다. 이들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지 지켜
보고 싶다. 혹은 쌔근쌔근 자는지 그들의 숨결소리도 듣고 싶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다시 한 번 둘러보고, 내년에 오리다 하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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