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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섬진강
김추자
김추자
/무인도
1969년 '늦기 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 당시로선 깜짝 놀랠 노래를 들고
한 소녀가 무대로 뛰어나왔다.
꽉
죈 옷에 터져나올 것 같은 젖가슴과 마구 흔들어대는 엉덩이가
열여덟 소녀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했다.
그녀를 대하는 대중의 마음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어리둥절'이었다.... 저럴 수가.
한 시대의 처연하고 느릿한 감성을 폭파시켜버린 그녀의 별명은'다이너마이트'였다.
터져오르는 창법은 옛 애이불비의 여인네 목소리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광기라고 표현할 도리 밖에 없었던 춤은 이미 그 시대에서
몇 킬로미터 앞서버린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몸짓이었다.
김추자/ 그럴 수가 있나요
김추자/ 봄비
김추자/미련
담배는 청자요, 춤은 추자라는 당시의 유행어는 그런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미국의 마돈나가 오디오 가수에서 비디오 가수까지를 갖춘
그 나라 대중가요의 전위였다면 우리에겐 그보다 10년 앞선 김추자가
있었다.
나훈아의 꺽꺽거리는 비가를 모창하는데 솜씨를 보였던 젊은이들이,
남몰래 혼자 부르는 노래는 이 김추자였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가슴 울리는 유장한 음색이
사람의 혼을 뺄듯 쭈욱 목청을 뽑아 올리다가
갑작스럽게 어깨라도 들썩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신명으로 우장창거리는 박자를 탄다.
속이 다급하게 타들어가는 모양으로 긴급
호소를 하는 그 내용에는
뭔가 야릇하고 섹시한 호흡이 들어있었다. 이 노래는 한 시대를 강타한 유혹의
시작이었다.
김추자 /늦기 전에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한 시절의 다큐멘터리를 생생하게 담고 있지만
노랫말만 그럴 뿐, 곡조는 군가처럼 날렵하고 행진곡처럼 신이 난다.
그 추악하고 아픈 전쟁의 그늘은 느껴지지 않고,
월남
갔다오니 인간 됐더라 하는 계몽적 낙천주의가 안쓰럽게 덮여있다.
이걸 김추자는 그 빵빵한 몸매를 흔들며 스스로가
월남 참전용사처럼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다.
이 뜻밖의씩씩함과 거침없음이 꽉 막혀있던 사회의기분을 풀어주는 대리만족이었을 것이다.
여기다 김추자는 목소리도 시원스러워서
고음을 넘어가는 모양새도 여간 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권 친화적이고 건강한(?) 노래를 이렇게 퇴폐적이고 야하게 소화해냈던
그녀였기에 시대는 그리 그녀에게 녹녹하지 않았다.
마흔을 넘은 이땅의 사내들에게 김추자는 그 자체가 성적인 도발의 기호로
각인되었다.
졸고있는 돌부처도 일으켜세운다는 묘한 찬사도 있었지만, 김추자의 무대는
그저 귀만 열어두는 여느 공연과는
달리, 사람을 혼을 쑥 빼놓는 귀기같은 게 있었다.
김추자/ 댄서의 순정
김추자/
꽃잎
김추자/살짜기 옵서예
71년에 발표한 '님은 먼곳에'는 그녀의
최고의 성가를 건져올린 곡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그렇게 활달하고 사내같은 기색까지 지닌
김추자였지만
그녀는 목청이 잦아드는 저음이나 고음에서 꺾여내려오는 쓸쓸한 곳에서
여인의 애절한 신음같은 소리를 섞는 야한 창법을
구사했다.
늦기 전에'가 이제
한창 불붙는 여인이 부르짖는 S.O.S라면
님은 먼 곳에'는 표현하지 못한 속내사랑으로 사랑을 잃어버린 여인의 후회와 탄식이다
표현한
적이 없었기에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오직 그녀의 마음 속에 깃든 남자.
이 땅의 뭇사내들은 바로 그 남자가 되어, 쉽게
걸어와버린 인생의 저 만치 쯤에,
자기를 먼발치서 바라보며 한숨 짓는 김추자를 바라본다
그런 구체적 사실보다 김추자는 우리들의
푸른 감성을 폭발시키며
청춘을 점령했던 강렬한 기억의 편린이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님은 먼 곳에'의 한 귀절인 '사랑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라는
대목의 마지막을 우린 '몸도 주고'로 알았고 그걸 철석같이 믿었다.
김추자는 그렇게 서슴없이 야한
발언을 할 줄 아는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줬는데 나쁜 '눔'의 남자가 떠나갔다.
그 청승스럽고 노골스런 한탄이
이 노래의 백미다.
김추자 /빗 속의
여인
김추자 /거짓말이야
김추자/마부
1995년 부산에서 대학교수인 남편과 살고 있다는
근황을 접한다.
최근 한 영화의 주제가인 '꽃잎'이 그녀가 부른 노래였다는 점 때문에
반짝 화제가 된 것이라든가, 최근의
리메이크, 리바이블 붐에 힘입어,
'빗 속의 여인' '꽃잎' '님은 먼 곳에' '꿈 속의 나오미' 등이
새롭게 전파를 타는 정도의
뉴스들 밖에 알지 못한다.
이제 김추자의 삶을 좀 들여다 보자.
춘천에서 다섯 자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김추자는
명문 춘천여고 재학시절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운동도 아주 잘하고 활달해서,
강원도 기계체조 대표선수를 지냈으며 응원단장도 맡았다.
그녀는 춘천
향토가요제에서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다.
당시 배뱅이굿의 일인자인 이은관씨가 김추자의 창을 극찬했다고 한다.
이때
김추자는 가수의 꿈을 가슴에 심기 시작했다.
언니들은 대부분 선생이 되었으나, 그녀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다.
대학 신입생
노래자랑에서 김추자는 춤과 노래로 심사위원과 관객 모두를 사로잡았다.
당연히 1등이었고 그녀의 대학생활은 이같은 인기와 더불어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김추자가 운명의 파트너인 신중현을 만난 것은 이 시절이었다.
대학 1학년이었던 그녀는 삼각지에 있는 당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작곡가인 신중현의 녹음실로 무작정 찾아갔다. 가수 좀 시켜달라고 조르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상희의 신곡을
발표하기 위해 바빴던 신중현은
이 당돌한 여대생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일주일 내내 녹음실을 서성거리며 귀찮게 구는 김추자를
쫓아버리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는 심산에서 신중현은 그녀에게
노래 테스트를 했다. 이 황금같은 기회를 김추자는 움켜잡았다.
김추자의 노래와 춤을 본 신중현은 한 동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 해 10월 신중현의 작업실에서 그녀의
데뷔앨범 '늦기 전에'가 탄생한 것이다.
김추자는 대중의
열광을 업고 그 묘한 바이브레이션과 현란한 춤으로
무대를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무대 바깥에서의 스캔들도 풍성하게 달고 다녔다.
데뷔 앨범 작업을 함께 한 프로레슬러 가수인 소윤석은
김추자의 보디가드 겸 매니저 역할을 했다.
김추자를 놓고 스카라 극장
앞에서 이 소윤석과 가수 박일남이 벌였던 노상 혈투는
당시의 입방아들을 벌집 쑤시듯 쑤신 전설로 남았다.
그녀는 자주 출연
스케줄을 어기고 잠적을 밥 먹듯이 했다.
그녀의 노래 '거짓말이야' 는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부메랑같은 지적이 되었다.
71년 7월초
배호 등과 함께한 부산의 쇼무대에서 피날레를 누가 장식하느냐를 놓고
김세레나와 머리채를 휘어잡는 한 바탕 육탄전을 벌여 세간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이 사건 뒤에 씩씩거리며 출연 도중 사라져 버렸다.
김추자 /석양
김추자 /왜 아니 올까
김추자 /님
이주일씨는 무명 시절의 애환을 얘기하면서 김추자의
잠적사건을 얘기한다.
김추자가 공연 약속을 빵꾸내고 갑자기 나오지 않자 급해진 주최측은,
무명 코미디언 이주일을 시간 땜빵용으로
내보냈다.
갑자기 무대에 선 이주일은 서영춘의 어설픈 흉내를 내다가
관객들의 조롱을 받고 시간도 못채운 채 무참하게
쫓겨났다.
김추자는 한국 가요 사상 처음으로 공연
땡땡이라는 죄명으로
3개월 가수 자격정지 처분을 가수분과위원회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그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방송사의 가수왕을 휩쓸었고,
2년 사이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약을 했다.
소공동 '라스베가스'는 그녀가
출연하던 주무대였다.
김추자 /즐거운 일요일 (Beautiful Sunday)
김추자 꿈속의 나오미 (I Dream of Naomi)
김추자/ 마음은 짚시
(Il Cuore E Uno Zingaro)
1969년
10월20일.
그 김추자가 첫번째 앨범을 들고(월남에서돌아온 김상사/늦기전에) 데뷔한날입니다.
[에피소드]
1951년
춘천에서 다섯자매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많은 끼를 지닌듯 하다..
춘천여고시절 강원도 기계체조 대표선수 였으며
응원단장까지 도맡아 할정도로 외모 또한
그녀의 끼를 부축이는데 충분 했었다..
그런 그녀가 가수의 생활로 접어 들었던
맨
첫 관문이 춘천향토제 였으며 그때 입상했던게
게기가 되어 그녀는 동국대 연영과를 입학하게 되고
신입생 노래자랑 대회에서 그녀는
여고시절 키워 오던
노래와 춤 솜씨로 1위를 하게 되고
그 일로 인하여 한 선배님으로 하여금 신중현에게 소개를
받게
되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신중현은 새로운 가수와 기존의 인기가수들의
음반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바쁜 상황에서
신중현의 눈에 김추자가 들어 올리 없었고
며칠간을 그렇게 김추자는 말없이 그의 작업실에
앉아 있다 가곤 했다 한다...
그러다
신중현의 그런 그녀에게 테스트겸 그녀에게 노래를
시켜 보았고...천부적인 그녀의 끼를 단번에 알아 차리곤
곧바로 그녀의 첫 앨범
작업에 들어 가게 된다..
그 앨범이..
1969년 10월 20일에 출시된 앨범이다..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노래..
[늦기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가 수록되어 있다..
신중현이 1967년에 결성한 `덩키스`의 반주로
제작된
이 음반은..앞면은 6곡의 김추자님이 부른 곡이 잇으며
뒷면엔 레슬러 출신이라는 소윤석님의 곡이 3곡 (소야
어서가자외.)
그리고 7분이 넘는 연주곡의 김선(떠나야할 그사람) 이란 곡이
수록 되어져 있다..
이음반에서 나왔던 소윤석이란
사람은
그후 김추자의 매니져겸 경호원이 되지만..
후에 김추자와 결별을 하며 참 무시시한 사건을 일으키는 장본이기도
하다..
그럼 다시 김추자님의 이야기로 돌려서..
그녀의 첫 앨범은 대 힛트를 쳣고..
티브이 브라운관에서
비추어진 그녀와..
그녀의 리싸이틀 공연장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현란한 춤솜씨와 그녀의 몸매를 한눈에
드러내게 되는 의상은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앗었다..
그러나 인기 잇는 사람은 가만 놔두지 않는게
우리의 연예계 사정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듯 하다..
그녀의 스캔들은 끈임없이 터져 나왔으며..
김세레나와의 몸싸움에서 가수 자격정지 3개월..
1971년
4월에 나온 [거짖말이야]라는 곡은 그녀가 간첩이며
그녀의 노래하는 몸짖은 수신호 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녀는 또한번의 역경을 맞고
만다...
그리고..터져 나온 그녀와 매니져 소윤석의
[깨진 소주병 난사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으로 하여금
그녀의 얼굴은 만신차이가 되지만..
그 얼굴에 붕대를 감고 무대에 섰던 그녀에게
관중들과 국민들은 그녀에게 안쓰러운 마음으로 다시
격려를 보내고
그렇게 그녀는 다시 일기 몰이를 시작 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앨범과 인기곡을 냈지만..
1975년 대마초
사건과 함께 그녀는 2년동안 연예인협회에서 제명이 되지만..
1978년 대한극장 재기 리싸이틀를 가지면서 대 성황을 이루지만
그녀는
점점 그 인기 정상에서 멀어지게 되고
( 그 이후로 그렇게 힛트 쳤던 곡이 나오지 못했다..)
1981년 동아대 교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녀의 모습도 잠잠 해져 갓다...
그러다 1986년 모 방송국에서 그녀가 갑자기 출연을 하여
그 예전
인기를 회복하려 하지만..
예전 그녀의 모습과 사뭇 달라져 있는 그녀의 외모(첫딸 출산후 비대해진)에
많은 팬들은 실망을 하게
되고..
그후로 몇장의 앨범을 내지만..
예전 힛트곡을 모아 놓은 정도의 그녀의 컴백 앨범은
수많은 팬들의 마음을 다시
일으키지는 못하엿다..
80년대 말 그녀는 그렇게 우리들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김추자의 노래는 '사랑이 뭔지 몰라도' '꿈속의
나오미' '연극배우' 등등이다.
물론 '눈이 내리네'나 이용복도 불렀던 '마음은 짚시'등의 번안곡도 좋아했다.
신중현이 '미인'을
비롯해 곡을 내는 족족 금지곡이 되어
숨 막히는 유신의 공기 속에서 질식해가기 시작했을 때 김추자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녀는 대마초 사건으로 75년 연기처럼 무대를 떠난다.
어쩌면 그 한 때의
열광과 매혹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후로 우리는 내내 김추자의 환영을 노래 속에 피워올리며 살아왔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그럴 수가 있나요''무인도' 가 저렁저렁하게 울려나오는 건
그런 이유이다.
첫댓글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