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세/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아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옥이 잠깐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 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시 읽기> 삼십 세/최승자
최승자가 젊은 날에 썼던 시를 떠받치는 것은 파괴 열정, 어떤 독기, 죽지 못해 꾸리는 누추한 삶을 향한 풍자와 자학이다. 이것은 지난 1980년대의 황당무계한 죽임과 죽음의 문화에 맞서는 절망과 애도의 노래일 테다. 현실을 ‘개 같다’라거나 ‘이것은 아냐!’라고 전면 부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최승자는 죽음의 이미지들, 몸속에 말뚝 뿌리로 박힌 아버지, 병든 자궁 같은 자학과 혐오를 덧씌운 이미지들로 1980년대의 절망과 지옥 같은 현실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1980년대에 바친 조사弔詞이자 더없이 암담한 추도사일 테다.
서른 살은 어떻게 오는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고 노래한다. 최승자의 「삼십 세」는 바하만의 「삼십 세」와 견줄만하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번뜩인다는 점에서 바하만의 시보다 더 불행에 침식된 것으로 읽힌다. 시인은 죽음에 친화적인 상상력을 열어젖힌 채로 제 부정적 상상력을 어디까지 밀고 나아가는가? 그의 촉수는 극단으로 치닫고, 그 상상력은 막장이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라는 구절에서 피, 손톱, 머리칼은 각각 젤리, 톱밥, 철사로 변한다. 그리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라는 구절로 유추하자면 죽음의 징후와 파괴에의 불길함에 가 닿는다.
―장석주, 『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포레스트북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