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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묵상글 ( 대림 제1주간 월요일. -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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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대림 제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 첫날인 오늘 백인대장 얘기를 교회 전례가 들려주는 것은
창세기의 그리스도론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1장은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얘기입니다.
이 하느님은 신비의 하느님이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에 비해 2장의 하느님은 인간이 있는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땅에 다시 내려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십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땅에까지 내려오지 않고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
굳이 땅에까지 다시 오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능력으로만 구원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치유해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는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하시는데
백인대장은 주님이 자기 집에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으로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음을 보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도 백인대장과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종에게는 사랑을,
주님께는 믿음을 지닌 백인대장과 같이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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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은 둘 다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만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에게서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묵시록>의 말씀에서처럼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또한, 당혹스럽고 놀라운 것은 백인대장의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한 참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바로 그 속에서 이미 자비와 사랑의 위력을 알기에 믿음의 굳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으로부터 진정한 참된 힘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말씀의 힘에 승복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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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 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오래전 일이지만 너무도 확실한 기억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 가슴으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 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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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에 가면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곤 했습니다. 늘 감사했고, 고마웠습니다. 저를 위해서 공항까지 와 주셨고, 잠자리는 물론, 식사까지 챙겨주셨습니다. 지난 11월 신문 홍보 때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직접 공항까지 와 주셨고, 수도원에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아침이면 수도원 경당에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 때처럼 편안함은 적었지만, 신부님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뉴욕에서는 두꺼운 잠바를 입어도 추웠는데 LA에서는 잠바를 벗어도 될 정도로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날씨도 좋았고, 따뜻한 신부님의 배려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신문 홍보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뉴욕에 오시는 분들이 편안하게 지내다 가실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2023년에 제가 있는 뉴욕의 신문사에도 20여명 이상의 손님들이 왔다 갔습니다. 2024년에도 손님들이 오시면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이번 주에도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의 강의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부정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용서’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누가 죄인인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부정한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죄인을 심판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서 죄인을 용서하려고 하십니다. 성전은 이제 심판과 단죄의 장소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심판은 부당한 심판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부정한 행위를 했다면 남자도 같이 벌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에는 부정한 남자는 없고, 부정한 여인만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사람들은 죄를 고발하려고 모였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한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려합니다. 직분이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사제와 수도자가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습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직분에 따라서 종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성직자들이 조심해야 할 생각입니다. 사제도 베풀 줄도 알고, 나눌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의식과 주인이 되려는 마음은 다릅니다. 주인이 되려고 하면 심판하고, 비난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배우자와도 그렇습니다. 주인이 되려고 하면 심판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악용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약자에게만 적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썼을까?’는 중요한 것이 압니다. 무엇을 쓰셨는지가 아니라 ‘왜’ 쓰셨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인에게 쏠려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닥에 글을 쓰시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여인의 몸은 잠시나마 자유로워졌습니다. 그것이 죄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신 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디에 있느냐?’는 창세기의, 하느님의 물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누가 과연 죄인인가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숨어 버렸습니다. 진짜 죄는 하느님 앞에 숨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이웃을 심판하는 것이, 큰 죄입니다. 여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인이 되지 않으려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웃은 비난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그 사람을 살리고, 희망을 주고, 하느님께서 하려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자세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심판하려는, 비난하려는, 단죄하려는 그 마음을 버리면 좋겠습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나도 종이라는 생각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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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백인대장이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특이한 것은 로마인인 백인대장이 우리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스승님도 아닌 주님으로 말입니다. 우선 이 대목에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우리는 살짝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노예를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백인대장은 그의 깊은 믿음을 또다시 드러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 한마디를 통해 우리는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과 믿음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화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겸손과 믿음을 지닌 자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대로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훗날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함과 믿음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흔적들일 것입니다.
생강차
날씨가 쌀쌀해지면
가끔 몸에 한기가 돌 때가 있습니다.
목이 간질간질 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날….
꼭 이런 날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냉장고에 들어있던 생강차를 찾았습니다.
꼭 오늘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생강차는 아주 맛 좋게 익어 있었습니다.
따뜻하게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그리고 훈훈하게….
생강차….
매일은 아니지만 꼭 생각나는 날이 있습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꼭 생각나는 사람이 생강차 같은 사람 아닐까요.
따뜻하게 강렬하게 그리고 훈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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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아프게 하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아픔을 주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망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뜻은 남편을 여의고 혼자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한자 뜻을 살펴보면, 아닐 미(未), 죽을 망(亡), 사람 인(人)으로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유교적 사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살색’ 역시 황인종 중심의 사고로, 피부색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표현입니다. 또 ‘결정 장애가 있다’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주저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지만, 장애를 단순한 불편함이 아닌 부족하고 열등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그런 잘못을 많이 범했음을 반성합니다. 실제로 제 말을 듣고서 크게 상처를 받았다면서, 한동안 저를 많이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계속해서 실수할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하는 데 노력해야 그나마 아픔을 주는 말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이 중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백인대장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표징만 보여달라는 말이었고,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행한다면서 철저하게 반대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말이었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하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특히 주님께 하는 말은 어떠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과 감사의 말이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대한 불평에서 나오는 불평과 원망의 말이었습니까? 우리의 말에 주님께서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슬퍼하실까요?
오늘의 명언: 길이 막혔다면 원점으로 돌아가세요. 미로에서 헤매느라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의외로 색다른 발견을 가져다 줄 수 있답니다(쿠니시 요시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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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겸손과 평화의 참 좋은 사람들!-
행복한 체험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일년중 가장 별들이 잘 보이는 계절이 초겨울의 요즘일 것입니다. 거의 날마다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한 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 오는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의 체험은 늘 새롭고 마음을 황홀한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승의 세계가 이처럼 아름답다면 저승의 천국문이 열렸을 때의 그 아름답고 황홀함은 상상을 초월하리란 생각이듭니다.
이어 집무실을 열고 들어오자 마자 바치는 만세육창 기도가 또 하루의 출발을 행복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 주모경을 바친후의 만세육창과 신원 확인을 하면 마음이 참 상쾌해집니다. 아무리 인용해도 늘 새롭고 좋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와 겸손, 그리하여 참 좋은 평화의 삶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 수도승(修道僧)이다.”
어제 인용했던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발표된 교황님 말씀을 다시 나눕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 주옥같은 내용들인지 다시 정독할 계획입니다. 종파를, 국적을 떠나 세계 최고 영적 지도자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충심으로 호소합니다. 생명을 선택합시다! 미래를 선택합시다! 지구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가난한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입시다! 젊은이들의 희망에, 어린이들의 꿈에 민감합시다! 우리는 그들이 미래를 부정하지 않도록 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이런 호소에 응답하는 이들이 참으로 겸손과 평화의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원장 수사와 대화중 일치된 내용이 있습니다.
“피정 지도 신부님을 구할 때 우선적 조건이 학식 많은 분이 아니라 좋은 분을 선택합시다. 사람이 좋으면 말도 글도 행동도 생각도 다 좋기 때문입니다.”
우선적 선정 조건이 참 좋은 겸손과 평화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이들어갈수록 점점 평등해지는 사람들이요 남는 것은 좋고 편안한 사람인가, 사람 하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말할 것도 없고, 백인대장은 이교인인데도 참 좋은 겸손과 평화의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겸손과 평화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세 스타일을 지닌 분들입니다. 친밀하고, 연민의 사랑 가득하며. 부드러운 분들입니다. 마침 어제 새벽 겨울 나무 가지들마다 가득 달린 별들을 보며 산책 기도중 써놓은 “나, 겨울에는” 시의 겨울 나무, 겨울 땅 같은 겸손하고 평화로운 분들이 바로 예수님이요 백인대장입니다.
-“푸른 하늘
배경한
빛나는 별 열매들
가득 달린
텅빈 충만의
겨울 나무들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밤마다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
꼭꼭 품에 안아 두었다가
봄, 여름, 가을에
무수한 사랑의 꽃들 피어낼
텅빈 충만의
겨울 땅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나
겨울에는 동안거(冬安居)의
추위에도
따뜻한
텅빈 충만의
겨울 나무가, 겨울 땅이 된다
이 행복에 산다
나 겨울에는!”-2023.12.3.
저는 어제 엊그제 12월2일 뉴욕타임스 “한국 소멸하나? 흑사병 창궐 수준 인구 감소”라는 칼럼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백인대장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 병든 사회, 병든 대한민국을 고쳐 주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각골분투(刻骨奮鬪)의 노력과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다음이 바로 매우 불길한 내용들입니다.
‘지난 29일 통계청에 의하면 한국의 올해 3분기(7-9월) 합계 출산율은 0.7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합계 출산율은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이다...그는 “2067년 한국 인구가 3500만명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통계청 인구추계를 인용하여 이 정도만으로도 한국 사회를 위기에 넣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 저출생 원인으로 극심한 입시경쟁, 남녀대립, 인터넷 게임에 빠진 한국 남성들이 이성보다 가상의 존재에 빠져들게 한 점이 거론된다고 적었다.
그는 “노인 세대는 불가피하게 방치되고 엄청난 유령도시와 황폐해진 고층빌딩이 생기고, 고령층 부양 부담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의 이민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한국이 유능한 야전군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합계출산율 1.8명인 북한이 어느 시점에선가 남침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합계출산율 남과 북이 “0.7대 1.8” 너무 충격적입니다. 단적으로 총체적 위기의, 병든 한국사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하나 깨어 참 건전하고 건강한 영육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때입니다. 정말 개인이든 사회든 영적 혁명과 같은 기도와 회개, 겸손과 평화의 삶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백인대장같은 겸손하고 평화로운 참된 믿음의 삶이 절실할 때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한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 근거한 미사중 성체를 모시기 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백인대장의 믿음에 대한 감동의 고백에 하늘나라 잔칫상에 자리잡을 사람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서 예언의 실현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여기까지가 백인대장 믿음에 대한 감동의 고백이고 다음 내용이 실로 중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대로 믿는 우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교인 백인대장이 초대 손님의 모범으로 제시되는데 바로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은 나았다 합니다. 바로 하늘 나라 잔칫상에 초대 받을 자격은 백인대장 같은 겸손한 믿음을 지닌 평화의 사람들임을 봅니다. 참으로 겸손한 믿음을 지닌 평화의 사람들이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사야가 환시로 받은 내용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으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참으로 주님께 배워야 할 것은 주님의 길, 평화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참 좋은 사람은 겸손과 평화의 사람입니다. 바로 다음이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영원한 평화의 꿈입니다. 바로 이런 꿈을 실현하러 오시는 대림의 주님이요, 그 모범적 인물로 제시되는 참 겸손한 믿음의 사람, 평화의 사람, 백인대장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바로 이런 평화가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자 꿈이요 우리에게, 특히 정치지도자들에게 부여된 평생과제입니다. 무기로 낭비되는 돈을 인간복지에 사용한다면 모두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으로 전환하여 참으로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 살아야 할 것이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평화의 전사들이 되어 주님의 빛 속에 걸어 가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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