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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 연구는 현대 사회에서 부상한 ‘정보철학’과 그 관점에서 도출된 세계의 윤리적 변화를 동아시아의 철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을지, 양자의 성긴 연결을 통해 어떤 함의를 도출할 수 있을지 검토하려는 시도이다. 특히 이 논문은 전통적인 기 개념을 당대 서구 과학을 통해 입증하고자 했던 19세기 조선 유학자 최한기의 ‘기학(氣學)’을 정보철학과 정보 윤리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최한기는 전통적인 기의 의미망을 넘어 인식과 경험, 기계의 원리와 작동, 사회와 우주의 운용에까지 기라는 개념을 일관되게 적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최한기의 체계에서 만물은 각자 평등한 정보존재자로서 패턴을 교환하고 상호 작용하며 최종적으로는 상호적 책임으로 무한히 연계된다.
(이 논문은 최한기가 제안하는 보편학, 즉 기의 실증성과 포괄성을 학술 구조 안에 담고자 했던 기학(氣學)의 구조와 세부를 매개 삼아 정보철학이 제안하는 새로운 윤리학의 가능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앞부분 생략)
Ⅲ. 정보철학 관점에서 바라본 기(氣)
정보철학이 하나의 메타 이론으로 성립할 수 있다면 이는 개별적인 철학적 시도들을 구획하고 재배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이론과 개념을 검토할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을 제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정보 이론-철학이 수학과 공학 등 현대 과학의 이론을 토대로 한다는 점, 외부에서 쉽게 개입할 수 없는 독자적 문법과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외부의 다른 전통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동아시아 철학은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고 따라서 사태-현상의 이론적 해석자가 아니라 해석되는 자원-대상이 되어버렸다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 서구 혹은 현대 이론에 포착된 동아시아 사유는 관찰되는 (비)체계에 가깝다. 동아시아 철학이 외부의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는 수동적 대상-자원의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 중 하나로 고대부터 이어져온 동아시아인들의 고유한 존재론적 관념 중 하나인 기(氣)를 제안할 수 있다.
기란 무엇인가? 이는 동아시아 철학의 전통적인 질문 혹은 논제라기 보다는 현대 연구자들의 관심이 반영된 논제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동아시아 담론에는 ‘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정의적 서술이 많지 않다. 본래 정의란 더 많이 알려진 것으로 덜 알려진 것을, 더 명료 한 것으로 덜 명료한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왜 동아시아 담론에 ‘기’에 대한 정의적 설명이 발달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근저이자 원리이자 그 현실화였던 기는 개념적분석이 필요없는, 다시 말해 다른 개념을 동원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는 세계의 구성 원리이자 물질적 구성 성분이었으며 생명이자 운동성이자 변화의 토대였다. 주지하듯 동아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존재론적 개념인 기를 통해 세계와 인간, 생명과 운동, 사유와 도덕적 실천을 설명해 왔다. 이와 동시에 기는 세계의 인식론적 단위이기도 했다.
기라는 존재론적 단위는 세계의 근원을 묻는 질문의 대상에 아니라 어떻게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감당할 것인지를 묻는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의 대상에 가깝다. 고대부터 동아시아인들은 대체로 주체 또는 행위자와 그를 둘러싼 세계를 ‘어떻게 아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어떻게 행위하고 실천하는가에 집중했다.
그것은 아마도 아는 주체와 알아야 할 대상이 본래 같은 근원-즉 동일한 형이상학적 원리(理) 혹은 자연학적 토대(氣)-에서 출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우주와 연동되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본성의 차원에서 인간 자신의 본질을 미루어 거시 세계를 추상화하고 다시 동일한 원리를 주변 세계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대상에 적용했다.
자연 세계는 매우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현상과 원리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각각은 동일한 원리가 무한히 확장되고 변용된 결과일 뿐이라는 점에서 별도의 증명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인들은 서로 다른 계열의 사건을 연결하고 확장하며 상호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 수학적 공리를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이론화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동일한 패턴을 복합적으로 적용하면서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현상도 나름의 체계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기는 본래 객관화된 지표에 따라 양적으로 측정되어 표준화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 일상어 안에도 ‘기온(氣溫)’, ‘기압 (氣壓)’ 등 물질적 현상 대한 수학적 측정을 바탕으로 한 단위어로 쓰이는 기의 확장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근대 이후에 등장한 번역어들이다.
서양 철학과 자연학을 중국에 이식하려 했던 예수회선교사들이 동아시아 자연학의 근본적 개념이자 단위인 오행(五⾏)을 서양 철학의 기본 단위인 사원소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기(氣)’ 개념을 사원소 중 하나인 공기(air)로 바꾸고자 했다. 이후 기는 에테르 등의 물질 개념의 번역어로 채택되는 등 점차 근대 과학에 연접하게 되었고 일본을 중심으로 다양한 자연 과학적 개념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 일상화되었다. ‘기’ 라는 개념이 활용된 과학적 개념은 모두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따라 20 세기 이후 형성된 것들이다.
신 없이 세계를 설명하던 동아시아 세계관 및 철학과 대면해야 했던 예수회원들은 만물의 원리로서의 기의 역할을 최대한 낮추어 질료화하고자 했다. 질료를 철저히 수동적으로 보는 서구에서 생명성과 자율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정 등 인격적인 측면까지 포함하고 있는 기의 의미망은 인격적 신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개별적인 현상들을 계측하고 계량하는 분과 지식이 일반화되자 이제 기는 알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인간-자연현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이탈하게 되었다.
특히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기는 다양한 범주에서 구체적인 의미와 역량을 가진 개별적 의미로 바뀔 수 있다. 후한(後漢) 시대에 만들어진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解字)』에서 기는 구름의 형상에서 유비된 것으로 설명된다. 이로부터 의미가 확장되어 고대 중국의 여러 경전에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인 기라는 의미에서 원기(元氣)로, 만물을 유동하는 가장 미세한 물질이자 생명력으로서 정기(精氣)로, 생명과 순환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신기(神氣)로 불렸다. 기의 파생어들은 기의 파생물이거나 부분이라기보다는 상황과 국면에 따라 붙여진 계기적인 명칭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질문이 다시 시작된다. 정보철학의 관점에서 기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기와의 비교는 정보철학의 문맥에 어떤 유효한 철학적 교훈이나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까? 우선 확인할 것은 동아시아에 ‘information’에 대응하는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의(意)나 상(象), 지(旨) 등 정보의 내용으로서 메시지를 의미하는 개념은 존재하지만 명확하게 “한 곳에서 선택된 메시지가 다른 곳에서 정확하게, 또는 대략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며 “가능한 메시지들의 집합에서 선택하는 것”이라는 섀년 식의 정보 개념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기는 어렵다.
한편 동아시아인들도 자연 현상이나 물질의 질서 또는 패턴을 일정한 단위로 잘라 측정해 왔지만 이를 일정한 양적 단위로 전환하고 그 전송을 측정하기 위한 개념은 발달하지 않았다. 통신 기술을 바탕으로 수학-공학적으로 정보를 다루 었던 섀년 식의 정보 관념은 사실상 동아시아적 사유에 연결될 여지가 적다.
그보다는 차라리 “정보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 계에 형태 변화를 산출하는 작용이다. 정보는 형태변형을 촉발하는 행위와 수용 작용을 벗어나서 정의될 수 없다.”는 시몽동의 정의가 동아시아적 입장에서는 좀 더 유용해 보인다. 동아시아에 한 지점 에서 다른 지점으로 동일한 단위-비트로 전송되는 디지털적 ‘정보’의 통신 과정을 모델화할 개념-이론은 없지만 끝없이 유동하며 소통하는 존재의 패턴과 그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기가 곧 정보는 아니지만 기의 패턴이 정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에는 물질·사물·현상이자 그 사물의 질서라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는 물질·사물·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원리이자 작용이며 그 물질적 변화를 포괄하기 때문에 ‘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이자 ‘계에 형태 변화를 산출하는 작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동아시아에서 정보와 가장 가까운 개념은 다시 말해 모든 국면을 통틀어 관찰 또는 변별가능한 대상 즉 상태·현상·사건·존재·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보편적 개념은 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정보로 해석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기(의 패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구체적인 물질부터 자연적 현상과 기제, 생명과 그 반응, 인지, 판단, 추론과 감정, 기계와 그 구조, 기능, 작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기로 설명해왔다고 할 수 있다. 기는 가장 미세하거나 세부적인 단위 및 그 현상까지 쪼개어 개념화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개별적 수준을 포괄하는 무한한 보편성을 가진 원리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파생형을 가진 기의 이름들이 결과적으로 기의 패턴을 이루며 이 패턴들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경로가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면과 계기에 따라 기가 다른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인식의 차원에서 기가 특정한 패턴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만물에 모두 편재하되 개체와 현상에 따라 다르게 내재되어 있으며 인식론적 추상화의 과정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기는 일종의 정보의 패턴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기 자체가 곧 정보는 아니지만 기의 존재와 활동은 일종의 패턴으로 변별되며 무엇보다 추상화 수준에 따라 동일한 기가 여러 맥락에 위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라는 점에서 기의 패턴은 인간에게 알려지거나 혹은 구성되는 정보의 형태에 가깝다.
정보 이론의 발전에 따라 생명 역시 정보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정보철학은 정보의 포괄적 범위에 생명과 그 현상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기 역시 단순한 질료나 변별적으로 식별가능한 현상 또는 존재에 한정되지 않으며 생명과 신체성에도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무엇보다 기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동일한 근원이라는 점에서 정보와 마찬가지로 인지적 주체와 대상을 통합적·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이론적 틀이다.
정보철학이 “정보 패턴이라는 공통적 속성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연속성과 유사성에 주목하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을 정보적 존재자로 간주함으로써, 정보철학은 자연과 인공,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기계, 정신과 신체, 인지와 비인지 등 이분법적 경계를 넘는 새로운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것이라면 이원적 분리 없이도 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던 동아시아적 사유에서 이런 시도가 낯설지 않다. 비록 수학적 계산에 기반한 모델링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보편적인 지향성 수준의 문제의식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인 방향성을 공유한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정보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독립된 개체로 변별적으로 존재하는 뉴턴적 존재가 아니라 정보 환경과 상호적으로 연결된 유기체로서, 기술적 대상과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비인간 행위자들과 공진화하는 존재”라면 기만큼 존재자들의 상호 연결성을 보여주는 개념은 드물다.
단독자 개인이 이성적 판단과 그에 따라 구성된 규칙에 따라 규범적인 차원에서 호혜적인 연결성을 인정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달리 기의 차원에서 개별 존재자는 그것이 속한 세계 또는 장과 동일한 구성 원리로 이루어져 있어 연결은 본질적인 조건이자 본질이 된다.
기의 세계는 이미 패턴화 자체에서 가치가 발생하는 장이다. 외부에서 윤리적 조건을 명령하지 않고 가치를 주입하지 않는다. 기의 운동성 자체가 모종의 질서를 이루는데 이 질서는 개체들이 참여하고 연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안정성과 변화에 부여되어 있다.
정보철학에서 정보는 파생된 객체나 해석을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 존재자로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와 현상이 정보 덩어리라면 기의 철학에서 기는 인간이 파악하는 외부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그 자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존재자들이자 그로부터 추상화된 신호와 기호들의 패턴들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기는 그 자체로 정보가 아니지만 기가 드러내는 무수한 패턴들과 양상들이 곧 정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는 작게 자를 수 있는 최소 단위의 물질에 한정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0과 1 로 이루어진 비트처럼 음과 양의 조합과 구성에 의해 패턴화되고 그리하여 무질서와 질서 사이를 오고가는 정보의 형태를 띤다. 그러니까 기는 이미 비트이면서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기는 물질이자 생명이자 신호이자 그 모든 것들의 패턴이다.
범주적인 차이, 수학적 계산 가능성 여부, 이론의 구조와 세부 등 다양한 맥락에서 정보 개념과 기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렵다 할지라도 모종의 지향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 성긴 연결은 정보철학의 설명력과 포괄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 :『정보철학 관점에서 본 최한기의 기학(氣學)』 김선희
정보철학 관점에서 본 최한기의 기학(氣學) (kci.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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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책의 기와 정보, 패턴으로서 정보인식 등
공감이 되는 면이 많습니다.
氣는 정보 자체이자, 연결된 네트워크(공간이라는 양자장)에 존재하며, 서로 교류,작용을 하겠지요.
정보(생각,마음 등 포함)라는 氣를 인식하는 유기적 시스템이
곧 몸이고, 몸은 物과 非物상태를 겸비하고 특정 시공을 넘나들고...
정보에 대한 고유한? 개별적? 특수적? 인식 패턴이
내 자아, 개성과도 연결되고...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습관적? 자동적? 반응,
사고습관, 가치관, 사유력, 의식의 폭? 범위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
그리고 이러한 특성으로의
몸(物과 非物적 구성체)의 존재인 우리 각자는
느낌,생각,감정,이성을 통한 정보의 인식자이자,
수용자이며, 생산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개인은 능동과 수동, 주체와 객체로써 동시에
존재하며,
그 각자 고유한? 굳어진? 정보 인식의 패턴을
새롭게 하고,확장하고,
주체성과 능동적 선택의 힘을 더 확보해가는 과정이
곧 자천의 과정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