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야기 - 장충동 격동의 역사를 지나온 골목 장충동은 서울 중구에 속한 마을로 남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인기멤버
hanjy9713
2023.09.14. 02:02조회 9
댓글 0URL 복사
골목이야기
장충동
격동의 역사를 지나온 골목
장충동은 서울 중구에 속한 마을로 남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 나라를 위해 순직한 충신들을 추모하는 장충단을 만든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일제 강점기엔 박문사가 세워져 굴욕의 역사를 겪었고, 해방 이후엔 국가 주도의 건물들이 세워지며 굵직한 역사 현장을 오롯이 지켜봐왔다.
남산자락 아래서 우리 근대사의 아픔으로부터 시작된 장충동 역사. 대한제국 최초의 현충시설이었던 장충단(奬忠壇)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굴욕의 역사를 맞는다. 해방 이후 '충성을 장려하는' 이름은 돌아오지만 바른 역사는 잊힌 채 살아왔다. 현대를 지나며 다양한 역사 현장을 지나온 장충동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한국 근현대사 격동의 현장을 오롯이 지나온 골목, 장충동을 가보자.
1. 영욕의 시간을 지나온 장충동 역사
[골목이야기]영욕의 시간을 지나온 골목…장충동의 역사
대한제국 최초의 현충원, 마을의 이름으로 돌아오다
원래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11방의 하나인 명철방(明哲坊)에 속했던 이 지역은 한양도성 성곽을 중심으로 형성돼, 도성 수비와 방어를 담당한 남소영(南小營‧어영청의 분영) 중심의 국가 관리 지역이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는 광무4년(1900년) 남소영 자리에 을미사변으로 순사(殉死)한 충신과 장병들을 위한 제단을 만들게 했고,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의 희생자 역시 함께 추모하게 했다. 그리고 그 제단을 가리켜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의 장충단(奬忠壇)이라 명명했다.
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마친 이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추모한다'는 근대 국가의 의미를 담긴 것이었따.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가 현충 시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장충단의 제사를 금지시켰고, 1919년엔 이 지역을 공원으로 만들어 제단을 헐어버린다.
마을 이름 사헌정(四軒町)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 사헌은 에도시대 영주를 지키던 동서남북의 네 무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의 대상이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일제는 1932년 장충단 자리에 을사늑약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을 딴 사찰 박문사(博文寺)를 짓고, 그를 추모하며 대한제국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려 한다. 심지어 경희궁 흥화문을 뜯어와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거나, 강제 철거한 광화문의 자재들로 부속건물을 짓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 이어온 국가 공간을 일제의 정신지배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 성곽 마을은 다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일제 건물들 역시 허물어졌고, 공터가 된 자리에선 남은 비석과 함께 대한제국과 충(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장충단 비석은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 의미 역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사헌정으로 불리던 마을은 1946년 10월 1일 '장충동'으로 돌아온다.
장충동 변천과정
조선초기 한성부 남부 명철방(明哲坊)
조선후기 어영청의 분영 남소영(南小營)
1900년 고종에 의해 장충단 조성 (奬忠壇)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토 히로부미 주도)
1914년 동사헌정(東四軒町), 서사헌정(西四軒町)으로 명명
1919년 일제에 의해 장충단 일대 공원 조성
1921년 장충단 일대 공원 개장
1932년 장충단 자리에 박문사(博文寺) 건립
1943년 사헌정(四軒町) 일대 한성부 중구로 편입
1945년 일제 패망, 광복
1946년 서울시 중구 장충동1,2가로 행정구역 변경
1985년 묵정동, 장충동 1,2가 통합 행정구역 '장충동'
2. 근현대사 격동의 현장, 장충동
[골목이야기]근현대사의 중심을 만나다…격동의 현장 장충동
근현대사 명과 암 모두를 받아들여
역사의 중심이 되다
일제강점기 굴욕의 역사를 지나 충혼의 마을로 돌아온 장충동은 다앵힌 현대사를 거치면서도 역사의 중심에 서왔다.
해방 이후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일제 강점기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박문사 자리에 국가의 귀빈을 모시는 공간 영빈관(迎賓館)을 세워 국가의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는 식민지배 색채가 강한 장소들의 흔적 지우기 작업을 빠르게 진행했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였다.
현충시설이었던 장충단의 의미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소적 활용가치만 염두에 두고 영빈관이 들어선 것인데, 당시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의식의 부재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어 박정희 정부는 장충동 지역을 민족 정통성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먼저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을 세워 국가의 힘을 과시함과 동시에 자유센터를 지어 반공을 강조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갔다. 장충공원에는 순국선열 동상과 기념비를 세워 민족의 공간으로 키우려했다. 또 태평로에 세웠던 유관순 열사 동상을 장충동으로 옮겨와 장충동을 민족의 공간으로 규정하려 했다.
개발독재시대가 끝나고 민주화 되면서 장충동은 다시 변화를 맞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에 모인 동상과 기념비 덕분에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근대사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살아났다.
2000년대 들어선 국내 최초의 문학박물관인 한국현대문학관이 장충동으로 들어왔다. 이 문학관은 수필가인 고 전숙희 선생이 문예잡지 동서문학(東西文學)을 발간하며 모아온 작가들의 원고와 책자, 사진자료 등을 정리해 개관한 공간으로 한국 근현대문학 100년사를 집대성한 박물관이다.
또 근현대사의 정리는 서울 중구에서도 이어졌다. 장충단 공원내에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 장충단 역사와 남산의 역사를 정리했고, 해설사를 두고 장충단 호국의 길'탐방코스를 운영해 역사를 알리기도 했다.
장충동은 장충단을 중심으로 굴곡진 근대사와 산업화‧현대화 과정에서의 현대사를 중심을 받아들여왔다. 덕분에 긍정적 역사와 부정적 역사가 혼재한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골목으로 자리잡았다.
장충동 현대사 변화
1959년 이승만정부 장충단 자리에 영빈관(迎賓館) 조성 발의
1960년 4.19혁명으로 공사중단
1963년 장충체육관 개관
1964년 자유센터 준공
1964년 일성 이준열사 동산 건립
1964년 이한응 열사 순국기념비 건립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영빈관 추진 지시
1967년 2월 영빈관(迎賓館) 준공
1971년 태평로에 있던 유관순 열사 동상 장충동으로 이전
1972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1973년 국립극장 준공
1984년 장충단공원 근린공원화
2000년 한국현대문학관 장충동으로 이전
2013년 서울 건축 문화지도 발행 (장충동: 근현대사 격동의 현장)
2014년 장충체육관리모델링
2016년 서울시 중구, '장충단 호국의 길' 탐방코스 개발
3. 시민의 삶을 담은 골목 장충동
[골목이야기]골목에서 핀 마을의 전통…장충마을 생활사
사람들의 생활이 역사와 전통이 되다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품어온 마을 장충동은 현대화를 거치며 도시 생활사 역시 품어왔다.
일제강점기 문화주택(일본인들이 지은 서양식 고급주택)이 많이 들어서며 대형 주택가로 자리잡았던 장충동은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돔형 체육관이 들어서며 변화를 맞는다. 이 장충체육관에서 권투, 프로레스링 등 스포츠는 물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 문화행사가 자주 열리면서 많은 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전당대회나 유신체제 선전 행사가 열리는 등 당시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지만 체육관은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었고, 덕분에 장충동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이주해오며 마을 현대화 역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당시 장충동의 이주민들 중엔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장사를 시작하며 골목은 다시 변화를 맞는다. 장충동에 '벌집촌'이라고도 불리는 좁은 골목에 터를 잡은 이들은 냉면 등 고향음식을 팔기 시작했고, 이 때 오향장육을 흉내내며 평안도식으로 만든 족발도 팔기 시작했다.
또 1973년엔 명동에 있던 제과점인 '태극당'이 장충동에 분점을 내고 공장과 함께 들어왔다. 1946년 시작해 당시에도 '사라다빵', '모나카' 등으로 유명했던 이 빵집은 금세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충동의 명물이 되었다.
현대식 체육관이 들어서며 도시로서 자리잡은 장충동은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문화가 어우러지며 이 마을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2000년대를 지나며 장충동은 다시 변화를 맞았다. 40여년의 세월이 지나자 '현대식' 공간도 '구식'이 되어갔다. 최초의 실내체육관이었던 장충체육관은 가장 낙후된 시설이 되었고, 마을의 명소였던 빵집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이 돼버렸다. 오래된 주택들은 이전하면서 공터가 되거나 새 건물로 바뀌며 옛모습을 잃어갔다.
하지만 당시의 추억을 간직한 장충동은 지난 추억들은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불편하고 낡은 것만 고쳐 쓰기로 하면서 2014년엔 장충체육관이 이듬해엔 태극당이 리모델링되었다. 특히 태극당은 옛 방식 그대로 고수하며 빵 이름까지 '로루케익', '사라다빵'으로 전통을 유지했다.
또 실향민들이 만든 족발골목은 지난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에 등재되며, 장충동의 대표 문화로 알려지기도 했다.
장충동 마을은 이처럼 도시생활 40여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마을의 문화와 역사로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1980년대 태극당의 모습 @태극당 제공
장충동 생활사
1963년 장충체육관 개관
1970년대 실향민 거주지 '벌집촌' 형성
1970년대 장충동 족발골목 형성
1973년 태극당 명동에서 장충동으로 확장 이전
1973년 영동지구 개발촉진지구 지정, (이후 장충동 1가 대형 주택 이전)
2013년 장충동 족발골목, 서울미래유산 선정
2014년 장충체육관 리모델링
2015년 태극당 리모델링
언제나 역사의 변화 중심을 지켜온 골목
일제강점기 굴욕의 역사와 산업화‧민주화 모두를 지켜봐온 장충동은 그 시간들을 오롯이 받아들여왔다. 장충단을 비롯해 마을 곳곳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장충동은 그마저도 역사의 하나로 이어오고 있다.
어두운 과거와 영광의 순간도 모두 역사의 한 조각. 골목이 사람들의 이야
[네이버 지식백과] 장충동 - 격동의 역사를 지나온 골목 (골목이야기)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