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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박(輕佻浮薄)
경솔하고 방정맞으며 천박하고 가볍다는 뜻으로, 언행이 진중하지 못하고 가볍다는 의미이다.
輕 : 가벼울 경
佻 : 방정맞을 조
浮 : 뜰 부
薄 : 엷을 박
(유의어)
경박(輕薄)
경박부허(輕薄浮虛)
경부(輕浮)
천방지축(天方地軸)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하고 가볍다는 뜻으로 ‘경박(輕薄)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바로 경조부박(輕佻浮薄)의 준말이다. 그러니까 행동이나 말을 함부로 하여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경우에 쓰는 표현이다. 그런 행동을 나타내는 표현은 또 있다. 경거망동(輕擧妄動)이다.
경조부박보다 한술 더 하다. 걸핏하면 나서는데 행동에 전혀 진실됨이 없이 거짓되고 망령되니 말이다. 줄여서 ‘경망(輕妄)스럽다’라고 쓴다. 말과 행동을 조심성 없이 가볍게 하는 사람을 일컬어 경거망동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가벼움의 극치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우리 속담에는 ‘자발없는 귀신은 무랍도 못 얻어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자발없다는 말은 행동이 가볍고 참을성이 없다는 뜻이고 무랍이라는 말은 굿을 할 때 귀신에게 준다고 물에 말아 던지는 밥을 무랍 또는 물밥이라고도 한다. 결국 사람이 참을성이 없고 언행을 너무 가볍게 하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경조부박(輕佻浮薄)하다 할만한 사람들의 성향을 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타인으로 부터 자신이 줏대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원한다.
채근담(菜根譚) 제37장
순박함을 지키고 경박함을 물리쳐라
寧守渾噩而黜總明 留些正氣還天地.
영수혼악이출총명 유사정기환천지.
차라리 순박함을 지키고 경박함을 물리침으로써, 얼마의 정기(正氣)가 깃들이게 하여 천지에 돌릴지며,
寧謝紛華而甘澹泊 遺個淸名在乾坤.
영사분화이감담박 유개청명재건곤.
차라리 화려한 것을 사절하고 담박한 것을 달게 여김으로써, 하나의 깨끗한 이름을 오래도록 천지에 남기도록 하라.
똑똑하고 약은 척하며 똑날뛰지 말고 시골 사람과 같은 순박함을 지키며 자신의 본심을 파악하고 천지와 일체가 되어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호화로운 생활에는 등을 돌리고 깔끔하고 산뜻한 경지에서 안주하며 한평생을 매끈하게 천지와 더불어 보내라는 말이다.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이요 연습이란 있을 수 없는 인생이니만큼 후회는 적은 편이 좋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회한(海恨)에 눈물 젖는 것은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을 실력 이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재능을 과시하거나 허영심을 앞세워서 자기 멋대로 한 언행에 내려지는 벌인 것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26장
경박함과 조급함은 근본에서 벗어난 것이오.
重爲輕根 靜爲躁君.
중위경근 정위조군.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이며,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임금이 되오.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시이성인종일행 불리치중.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종일 행하여도 짐수레의 무거움처럼 신중함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소.
雖有榮觀 燕處超然.
수유영관 연처초연.
비록 영화스러움을 보거나 아름다운 꽃구경을 할지라도 편안하게 근본에 머물러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소.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어찌 천하 대국의 주인으로써 자기 자신(언행)으로 인해 세상을 경박하게 만들수가 있겠소?
輕則失本 躁則失君.
경즉실본 조즉실군.
가볍게 처신한다는 것은 곧 근본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조급하게 떠들어 대는 것은 곧 임금의 본분을 잃어 버리는 것이외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26장은 임금에게 직접 충언하는 대목인 것 같으며, 천하 대국의 임금으로써 항상 내면의 중심에 뿌리를 두고, 신중하게 처신하고, 경박(輕薄)한 언행은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重爲輕根(중위경근) ;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이며,
무거움이란 신중하고 말없이 사려 깊음을 의미하며, 가벼움이란 말이 많고 경거망동함을 말한다. 마치 나무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고정되어 나무의 생명을 오래동안 간직하고 있는 반면에, 나무잎이나 꽃들은 계절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것처럼, 사람의 언행도 신중하고 묵직한 것은 항상 근본에 중심이 잡혀 있어서 믿음직하고 신뢰가 가지만, 반면에 말이 많고 가볍게 행동하는 사람은 중심이 없이 가벼워 보여서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을 묘사한 내용이다.
또한 한사람의 마음을 보자면 그 사람의 내면은 움직이지 않는 묵직함(重)이지만, 밖으로 나타난 움직이는 마음은 나뭇잎 같이 가벼움(輕)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내면의 무거움(重)에 주의가 고정된 사람은 근본에 중심이 잡혀 있는 실속(實속)있는 사람이고, 외면의 움직임에만 가볍게 따라다니는 사람(輕)은 내면의 뿌리에서 중심이 멀어져 있어서 속이 비어 있어 믿을 수 없다는 속담도 있다.
靜爲躁君(정위조군);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임금이다.
위의 重爲輕根(重爲輕根)과 비슷한 의미로써,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躁(조)자는 조급함이나 성급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앞에 고요할 靜(정)자와 대비되는 의미로서 시끄러움이라는 뜻이다. 조급함이나 시끄러움이나 비슷한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중함은 성급함의 주인이고, 침묵은 말이 많음의 주인이며,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왕이다’라는 의미를 전하는 말이다. 모든 소리의 바탕은 소리 없음이다. 소리 없음이 없고는 어떤 소리도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소리의 왕은 바로 소리 없음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소리 속에는 소리 없음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만 들리는 소리만 들 수 있지만, 소리와 함께 섞여있는 소리없는 바탕은 전혀 알지를 못한다. 이 소리 없는 바탕이 바로 그 소리를 듣는 것을 아는 자인 주시자이다.
따라서 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은 소리 없는 바탕이 있기 때문에 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리 없는 바탕은 주시자로써 항상 있지만, 소리는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므로 고요함이 시끄러움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 종일 길을 가더라도.
不離輜重(불리치중); 짐 수레처럼 무거움(신중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짐수레 輜(치)자는 옛날 중국의 왕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 출행을 하는 중에 군사들과 함께 행군시에 식량과 중요 전투 장비를 가득 실은 짐마차를 끌고 가는데, 무거운 짐 마차가 빨리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짐 마차가 가는 속도에 맞추어서 전체 행렬의 속도가 따라가게 되어, 짐 마차를 중심으로 전체 군대행렬이 진행해 나가므로, 그 무거운 짐 마차같이 신중해야 된다는 의미로 치중(輜重)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즉, 성인은 하루종일 일상생활의 활동을 움직이더라도 내면의 깊은 중심의 신중함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雖有榮觀(수유영관); 아무리 영화로움을 보거나 아름다운 꽃구경을 할지라도
燕處超然(연처초연); 편안하게 머므르면서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한결같다.
영관(榮觀)이라는 단어는 자기의 영화로움을 본다는 뜻도 있고, 다른 측면으로 길을 가면서 눈을 홀리는 아름다운 꽃 구경을 한다는 의미도 있다.
성인은 자기의 명예가 천하에 드날리거나, 길을 가면서 주변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광을 본다고 하더라도, 항상 내면의 중심에 편안히 머물러서 있어서, 그러한 대상적인 영예나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이 홀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한결같이 내면에 중심을 잡고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자기 영예나 외부 아름다운 대상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일상활동에서도 내면의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이다.
奈何萬乘之主(내하만승지주); 어찌 천하대국의 주인이
而以身輕天下(이이신경천하); 자신으로 인해서 천하를 천박하게 할수 있는가?
만승(萬乘)이란 옛날 중국에서는 수레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일수록 국력이 강한 나라이며, 만(萬)대의 수레를 보유한 만승지국(萬乘之國)이란 천하의 패권을 잡은 천하의 최대강국을 말하고, 만승지주(萬乘之主)란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대국의 왕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천하를 휘어잡은 대국의 왕이 가볍게 처신하게 되면, 천하도 그에 따라서 천박하게 출렁이며 변한다는 충고의 말이다. 아마도 왕에게 대국의 왕으로서 신중해야 된다는 충고 같다.
요즘도 어떤 지도자의 말투나 사소한 행동, 습관, 심지어는 넥타이등 옷차림까지 주변의 사람들이 그대로 흉내내며 따라서 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습속인 것 같다. 지도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든 사람들이 관찰하고 따라들 하고 있으며, 또한 하찮은 음식 습관이나 기호나 말투와 옷차림 같은 세세한 일까지 관심을 가지고 흉내내는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일상적인 행동과 말과 생각은 그 조직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아야 하며, 위의 문장은 바로 이러한 지도자의 행동과 말이 신중해야지, 그렇지 않고 경거망동 하듯 가벼우면 그 조직 구성원들도 지도자의 언행을 본 받아 그 조직 자체 분위기가 천박하게 출렁이며 휘돌아 갈 수있다는 충고이다.
중심에서 벗어난 어떤 행동은 비조화 상태이며, 그 상태는 어차피 조화를 향해서 다시 움직여야 되므로 역동적인 움직임의 반작용이 나오게 되어 결국은 조화로움을 향하여 진행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는 고통과 고뇌를 주는 기상 불순상태를 거쳐야 하며, 씨앗을 뿌린 결과는 다시 성장하여 걷어 드리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러한 무상한 변화과정 속에서 변함 없음을 구하는 것이 바로 도를 찾는 것이다.
輕則失本(경즉실본); 가볍게 처신하는 것은 곧 근본을 잃어 버리는 것이며,
躁則失君(조즉실군); 조급하게 떠들어 대는 것은 곧 임금(지도자) 자격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경박한 언행(言行)은 자기 중심을 잃어 버리는 행위과 같으며, 조급하게 서두르고 말로 참견하는 일이 많으면 우두머리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대국을 다스리는 지도자는 중심에 뿌리를 두고 언행을 무겁게 가져야 하며, 너무 움직이고 말이 많으면 지도자의 원래 본분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도의 입장에서는 아주 타당한 말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히 현실의 실용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의 지도자에게는 좀 머리를 갸우뚱할 수도 있는 충고이다.
그러나 이 도덕경은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도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현대 일상사회의 관점에서는 자기 자신의 기본적인 마음자세가 항상 내면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가르침이다.
항상 중심을 잡고 신중하게 처신하며, 조급하고 경박하게 말하거나 행동을 하지 마라. 누구나 어렸을 때에 읽어보고 익히 배운 추억의 국민 동화인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의 지혜를 배우라는 가르침과 비슷하다.
경박한 겉모습과 참되고 우아한 내면의 깊이
貧家淨拂地 貧女淨梳頭 景色雖不艶麗 氣度自是風雅.
빈가정불지 빈녀정소두 경색수불염려 기도자시풍아.
가난한 집안도 깨끗이 청소하고, 가난한 집안의 여자라도 깨끗이 머리를 빗질하면 비록 요염하고 아름답지는 않다 할지라도 기상이 저절로 풍치 있고 우아하다.
士君子一當窮愁寥落 奈何輒自廢弛哉.
사군자일당궁수료락 내하첩자폐이재.
선비가 한때 곤궁함과 적막함을 당할지라도 어찌 스스로를 버리고 느즈러질 수 있겠는가?
돈이 많아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미던, 가난하여 겉모습을 화려하게는 할 수 없지만 깨끗하게 꾸미는 근본 까닭은 남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혼자 살고 있다면 겉모습을 화려하게 또는 깨끗하게 꾸밀 까닭이 어찌 있겠는가?
우리 자신에게 남이 없으니 남을 의식하고 신경 써야 할 근본적인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남이 없다면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떤 모순과 갈등이 만들어지는 근본적인 원인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게 모든 모순과 갈등이 사라진 세상을 절대세계(絶對世界)라고 하고, 남들과 더불어 살면서 끊임없이 모순과 갈등을 만들어내고 사는 세상을 상대세계(相對世界)라고 한다.
우리 자신이 절대세계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상대세계를 살면 그 어떤 모순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 참된 삶(道/眞理)을 살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이 절대세계의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남들과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상대세계를 살아가게 되면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모순과 갈등이 만들어져 참된 삶에서 멀어진 거짓 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어떤 모순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이 필요 없는 세상, 거짓(僞)에 불과한 모든 인위적(人爲的)인 요소가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마음을 가졌을 때의 삶을 말한다.
상대세계가 겉으로 꾸며지는 겉모습이라면, 절대세계는 내면의 깊이를 의미한다. 상대세계는 상대에 따라서 마음이 요동치는 세상이라면, 절대세계는 그 어떤 상대에 대하여도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함(虛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한다.
절대세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사는 상대세계에서 그 어떤 상황에 마주 치더라도 조금의 마음의 동요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동요가 없기에 그 어떤 모순과 갈등도 만들어질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떤 모순과 갈등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참된 삶이고, 그것이 곧 예수가 말하는 천국의 삶인 것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와 석가가 말한 ‘부처님은 너희 안에 있다.’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절대세계가 무엇인지 알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사는 상대세계를 살라고 하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도 깨끗이 청소하고, 가난한 집안의 여자라도 깨끗이 머리를 빗질하면 비록 요염하고 아름답지는 않다 할지라도 기상이 저절로 풍치 있고 우아하다.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내면의 깊이라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없다면 곧 싫증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 화려하게 꾸며놓고 살지라도 내면의 깊이가 없다면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돈과 겉모습은 우리의 삶의 결과일 뿐이지, 그것이 우리 삶에 목표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의 삶은 내면의 깊이에서 절대성의 진리를 찾고 무한한 사랑과 행복으로 살아가야만 하고, 돈과 명예 등은 그런 참된 삶을 살아갈 때 저절로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겉모습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보다는 비록 집안은 가난해도 몸가짐을 반듯하게 하는 여자가 훨씬 우아할 것이다. 화려하게 치장한 궁궐보다도 비록 누추하여도 소박하고 정갈한 살림이 훨씬 인간의 정취가 묻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하고자 하는 외면의 꾸밈없이 진정한 내면의 깊이를 찾았다면 꾸미고자 하는 겉모습에 관계없이 가장 참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저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성(聖)스러움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모습이 저절로 풍겨나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런 성인을 존경하고, 자신이 그런 성인이 되는 것을 매우 어려워 하지만,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을 살고 있는 성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남으로부터 또는 우리 자신 스스로가 쌓아 만든 수많은 관념들을 모두 깨부수어 없애버리면 우리는 누구나 예수와 석가와 같은 성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래야 된다, 저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수많은 관념들과 돈을 많이 벌어 행복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너무나도 쉬운 삶을 너무나도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이 지금 세상의 인간들이다. 그 근본 까닭은 삶을 거꾸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세계가 무엇인지 알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사는 상대세계를 살아야 하는데, 절대세계가 무엇인지 모른 채 상대세계에서 헤매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진정한 행복은 지금 이 순간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라 끊임없이 행복을 얻으려고 삶 전체를 헤매고 있으니 어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선비가 한때 곤궁함과 적막함을 당할지라도 어찌 스스로를 버리고 느즈러질 수 있겠는가? 비록 살림은 누추하여 가난할지라도 자신의 몸가짐은 항상 바르게 하는 사람들을 선비라고 부른다. 가난한 것도 고통스러운 것인 것 그것을 참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는 삶을 살고 있으니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는가?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세계가 무엇인지 깨닫고 삶을 산다면 가난, 고통, 행복,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절대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삶 자체가 사랑이고 행복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행복을 얻기 위하여 삶을 고통스럽게 살고 있지만, 그 사랑과 행복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몰라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랑과 행복을 찾아서 헤매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절대세계라는 우리의 내면에서 참된 삶의 답을 찾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사는 상대세계를 살면 항상 그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절대세계라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참된 삶의 답을 모르고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우리의 외면인 상대세계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예수와 석가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의 가장 높은 의식수준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을 외쳐 왔겠는가? 그것이 모든 인간이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온갖 번뇌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배움(지식)의 문제가 아닌 알아차림(깨달음)이라는 체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배움(지식)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알아차림(깨달음)은 결코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체험으로 스스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지에 이른 성인들은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 깨달음이 곧 완전한 자유와 지극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 輕(경)은 형성문자로 軽(경)의 본자(本字), 䡖(경)은 통자(通字), 轻(경)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수레 거(車; 수레, 차)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巠(경; 세로로 곧게 뻗은 줄)로 이루어졌다. 곧장 적에게 돌진하는 전차, 경쾌한 일, 가벼움의 뜻이다. 輕(경)은 가벼운, 중량이 비교적 가벼운, 육중하지 않은 또는 경쾌하고 간단한의 뜻으로, 가볍다, 가벼이 여기다, 가벼이 하다, 업신여기다, 천하다, 빠르다, 가벼이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거울 중(重)이다. 용례로는 죄인을 가볍게 처분함을 경감(輕勘), 가볍게 다침을 경상(輕傷), 가벼운 홀몸을 경단(輕單), 가벼운 정도를 경도(輕度), 언행이 가볍고 방정맞음을 경망(輕妄), 아주 작고 가벼움을 경미(輕微), 기분이 가볍하고 유쾌함을 경쾌(輕快), 경솔하게 행동함을 경거(輕擧), 움직임이 가뿐하고 날쌤을 경첩(輕捷), 덜어내어 가볍게 함을 경감(輕減), 가벼운 범죄 또는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을 경범(輕犯), 언행이 진중하지 아니하고 가벼움경솔(輕率), 언행이 경솔하고 천박함을 경박(輕薄), 가볍게 봄을 경시(輕視), 가벼운 무게를 경량(輕量), 가벼움과 무거움을 경중(輕重), 말이나 몸가짐 따위가 방정맞고 독실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경박자(輕薄子), 조그마한 일에 후한 답례를 함을 경사중보(輕事重報),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패배함을 경적필패(輕敵必敗), 마음이 침착하지 못하고 행동이 신중하지 못함을 경조부박(輕佻浮薄), 가볍고 망령되게 행동한다는 경거망동(輕擧妄動), 경쾌한 수레를 타고 익숙한 길을 간다는 경거숙로(輕車熟路), 가벼운 가죽옷과 살찐 말이라는 경구비마(輕裘肥馬) 등에 쓰인다.
▶ 佻(조)는 형성문자로 恌(조)와 동자(同字)이다. 경박할 조, 늦출 요(佻)는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는 글자 兆(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佻(조)는 경박하다, 가볍고 빠르다, 도둑질하다, 고달프다, 구차하다, 늦추다(요), 걸다(요)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생각이 깊지 않고 조심성이 없어 말과 행동이 가벼움을 경조(輕佻), 마음이 침착하지 못하고 행동이 신중하지 못함을 경조부박(輕佻浮薄) 등에 쓰인다.
▶ 浮(부)는 형성문자로 酻(부)와 통자(通字)이다. 뜰 부(浮)는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孚(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浮(부)는 물에 뜨다의 뜻으로 물에 뜨다, 떠다니다, 떠서 움직이다, 가볍다, 근거가 없다, 진실성이 없다, 덧없다, 정함이 없다, 넘치다, 높다, 지나치다, 은혜 갚음을 받다, 행하다, 낚시찌, 부표(浮標), 벌(罰), 높은 모양, 하루살이, 맥(脈)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뜰 범(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잠길 침(沈)이다. 용례로는 기체나 액체 안에 들어 있는 물체가 그 표면에 작용하는 압력에 의하여 위쪽으로 뜨게 함을 부력(浮力),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을 부상(浮上), 붙여 두었던 것을 띄어 버림을 부취(浮取), 헤엄을 치거나 물에 빠졌을 때 몸이 잘 뜨게 하는 물건을 부포(浮包), 가라앉은 것이 떠오르거나 떠오르게 함을 부양(浮揚), 교각을 세우지 아니하고 널조각을 걸쳐 놓은 나무다리를 부교(浮橋), 떠서 흐르는 것을 부류(浮流), 물거품을 부말(浮沫), 물 위에 떠 있는 나무를 부목(浮木), 한곳에 붙박이로 살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백성을 부민(浮民), 물 위에 띄워 어떤 목표로 삼는 것을 부표(浮標), 근거 없는 거짓말을 부와(浮訛), 마음이 들뜨고 경박함을 부박(浮薄), 무늬를 떠 보이게 짠 직물을 부직(浮織), 덧없는 인생을 부생(浮生), 부증으로 말미암아 부은 상태를 부기(浮氣), 부랑자의 점잖은 말을 부랑자제(浮浪子弟), 뜬 인생이 꿈과 같다는 부생약몽(浮生若夢), 아무 근거없이 널리 퍼진 소문을 부언낭설(浮言浪說), 뜬구름과 아침 이슬이라는 부운조로(浮雲朝露), 떠돌아 다니는 허황한 말을 부허지설(浮虛之說), 살 도리가 없어서 정처 없이 떠다니는 낙오된 신세를 부평전봉(浮萍轉蓬) 등에 쓰인다.
▶ 薄(박)은 형성문자로 簿(박)의 속자(俗字)이다. 엷을 박, 동자기둥 벽, 풀 이름 보(薄)는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가까이 다다른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溥(부, 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薄(박)은 풀이 서로 가까이 모여 무더기로 더부룩하게 나다, 가까이 모인다는 뜻에서 얇다는 뜻으로 엷다, 얇다, 적다, 야박하다, 싱겁다, 맛없다, 깔보다, 업신여기다, 척박하다, 가까워지다, 숲, 대그릇, 동자기둥(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벽), 두공(기둥 위에 지붕을 받치며 차례로 짜올린 구조)(벽), 풀의 이름(보), 박하(薄荷)(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얕을 천(淺),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두터울 후(厚)이다. 용례로는 대나 갈대 따위로 만든 그릇을 박기(薄器), 적은 이익을 박리(薄利), 복이 없고 사나운 팔자를 박명(薄命), 많지 않은 봉급을 박봉(薄俸), 메마른 땅을 박토(薄土), 불친절한 대우를 박대(薄待), 얇은 심덕이나 적은 덕행을 박덕(薄德), 상냥하고 아담한 자태를 박미(薄媚), 적디 적음을 박소(薄少), 적은 수확을 박수(薄收), 됨됨이가 변변하지 못하고 아주 나쁨을 박악(薄惡), 굳세지 못하고 여림을 박약(薄弱), 변변하지 못한 재주를 박재(薄才), 인정이 적음을 박정(薄情), 어린 마음과 뜻을 박지(薄志), 아내에게 몹시 인정없이 굶을 박처(薄妻), 보잘 것 없는 학식을 박학(薄學), 볼품없는 예물이란 뜻으로 사례로 주는 약간의 돈이나 물품을 박례(薄禮), 적은 녹봉이라는 뜻으로 불행을 이르는 말을 박록(薄祿), 이익을 적게 보고 많이 팔아 이문을 올림을 박리다매(薄利多賣), 아주 자질구례하고 변변하지 못한 사물을 박물세고(薄物細故), 엷은 얼음을 밟듯이 세상의 처세에 조심함을 박빙여리(薄氷如履),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위태로움을 박빙여림(薄氷如臨), 더할 수 없이 박함을 박지우박(薄之又薄), 메마른 밭과 논을 박전박답(薄田薄畓), 맛이 변변하지 못한 술과 산나물이란 뜻으로 자기가 내는 술과 안주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박주산채(薄酒山菜)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