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25]친구親舊 사귀기
나로서는, 금방 사귀었는데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친구를 사귀는 재주(?)가 있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친구(인간) 사귀기’가 장기長技라 할 수 있었는데, 젊어서는 훨씬 심했다. 낙향거사가 되다보니 조금은 덜하지만, 요즘에도 제대로 수인사를 하면 금세 ‘친구’가 되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어제 점심에도 그랬다. 쿠쿠밥솥 스위치를 올리려 하는데, 임실의 법무사 친구가 밥을 같이 먹자 했다. 불감청고소원, 달려갔더니 자기 단골집으로 가잔다. 가보니, 4년여 동안 나의 단골이기도 한 ‘보리밥집’이다. 법무사 친구는 나와 종씨로, 서너 달 전 어느 모임(임실군 13개 읍면에 사는 57년생 닭띠모임인데, 재밌는 것은 57년생이므로 회원이 57명을 넘을 수 없다는 거다. 거주가 임실을 벗어나면 탈퇴가 가능하나, 불치병이나 별세의 경우 결원을 충원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데, 20년이 넘었다한다)에서 만났기에 친밀함이 더 했다.
살다보니 법무상담할 일이 있지 않던가. 그 친구가 있어 마음이 편하고, 최근 한 건을 했는데, 보수료도 조금은 할인해주었다. 친구 잘둬 혜택이라면 혜택. 알고보니 단골식당 주인도 동갑. 식사 후 3인이 커피집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일단 갑장이기에 대화가 편하고 눈치볼 필요가 없어 좋았다. 다음 토요일 저녁이나 같이 하자며 콜하겠다는 임사장에게 즉석에서 오케이. 한번 만나 밥 먹고 차 한잔 마신 사이가 무슨 친구냐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내가 친구들을 사귀는 비결이 궁금하지 않는가? 무조건 어떤 일이든 생각이든 ‘솔직率直’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이다. 한마디로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란 놈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못나면 못난 대로, 잘나면 잘난대로 말이다. 그러면 상대방도 어느 정도는 솔직해지는 것을 매번 느꼈다. 사귐의 지름길? 흐흐.
두 번째는 어느 때이든 친구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서 살지 못하는 것은 ‘진리眞理’가 아니겠는가. 안동의 은자隱者 전우익 선생의 첫 번째 책제목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년 현암사 펴냄)인데, 정말로 좋은 책이다. 대뜸 자녀들이나 와이프 얘기를 노골적으로 물어본들 흉될 일이 없지 않은가. 대화의 양념으로 따라다니는 음주飮酒가 문제이자 고질병이지만, 솔직한 대화의 매개체인 것도 사실이다. 이제 내일모레이면 인생고래희人生古來稀 칠십이 아닌가. 건강이야 아무리 강조한들 지나치는 일이 아닌 것을 왜 모르랴? 한때는 "인생 뭐 있어?"하고 잔을 높이 들면, 술동지들이 "알코올이지"라고 화답하는 호기도 부렸건만, 점차 자제, 절제, 절주, 금주하는 친구들이 늘고 있다. 상당히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술 앞에 장사가 어디 있던가.
'운명공동체'인 아내가 걱정하는 것이 딱 그것이다. "당신은 이제 관계들을 정리할 나이인데, 왜 자꾸 친구들을, 사람과의 관계를 확장하느냐"는 게 단골 잔소리이자 협박이며 공갈이다. 물론 나 자신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머리털 굵어지면서 60여년 동안 숱한 친구들과 갈등도 많았다. 돈과 관련해 배신을 때린 친구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우정에 금이 가 절교한 친구도, 어찌어찌 소식이 끊겨 근황이 궁금한 친구도, 졸지에 세상을 떠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 친구도, 오랜 벗과 절친切親이라는 미명을 앞세워 숱한 말다툼과 갈등을 일삼아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를 생각하면, 어찌됐든 이런저런 친구들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원초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저 사람은 생각이 뭘까? 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살까? 인생관이나 우정관은 어떻게 될까? 왜 나와 생각이 다를까? 등 궁금증 말이다. 그런 만큼 처음이든 두 번째든 ‘코드’가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한 나의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악습이 있다. 어쩌면 경계해야 할 일이겠지만 말이다. 하여, 지금도 계속되는 일이지만, 사람들로부터 속기도 많이 하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다. 아내가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80년대초 언론인(기자)가 되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누구든 만나 ‘100가지’를 물어 ‘100가지 대답’을 들은 후, 그것을 글로 쓰고 싶어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소책자를 우연히 샀던 게 중학교 2학년때던가, 70년대초 전주고교에서 대통령 유세를 할 때였으니,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흐흐. 아무튼, 어제 오후 3인이 커피를 마시며, 결론적으로 한 말은 “우리 종종 만나 세상 이야기도 하며 재밌게 살자(식사야 돌아가며 사면 그뿐)”는 거였다. 요즘 나의 우정友情에 대한 생각은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이긴 하지만, 서로 다르거나 같음을 인정하고, 다르거나 같음을 이해하며, 서로에게 얼마쯤은 '도움'이 안돼도 그만이지만, 되면 더 좋은 사이 말이다. 내 서실書室의 편액 ‘구경재久敬齋’의 의미를 종종 되새겨보는 것이다.
구경재의 출처는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의 ‘자왈子曰 안평중晏平仲은 선여인교善與人交로다. 구이경지久而敬之온여’이다. 공자가 제나라 대부 안평중이 사람을 사귀기 좋아하면서도 (우정이) 오래 된 친구들을 처음처럼 공경하는 것을 보고 칭찬한 말이다. 이 말은 무릇 세상 사람들이 가벼이 사귀고 쉽게 (관계를) 끊지만, 친한 친구일수록 예절을 지키며 서로 공경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바로 이것일 것. 자칫하면 친하다고 서로 예의를 잃기 쉽고 우정을 악용하는 경박한 풍토도 많지 않던가. ‘포도주와 우정은 오래될수록 좋다Wine and freindship last longer, the better’는 서양 속담에서도 그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겠다. 이 구절은 많은 친구를 사귀면서도 초심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해온 터인지라, 편액을 보며 그 뜻을 성찰하며 되새김질을 하지만 ‘부족한 것이 사람’이라며 자위自慰하곤 한다. https://cafe.daum.net/jrsix/h8dk/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