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60
7월23일[연중 제16주일(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5baDwvvv9w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끝없이 기다리시는 하느님>
한 형제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조금은 거창하지만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던가?
곰곰이 돌아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가난하고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부모님 사랑 듬뿍 받으면서 걱정 없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공감했습니다. 신학적 지식도, 수도 생활에 대한 경험도 일천하던 지원자 시절, 비록 몸은 고달프고, 때로 춥고 배고프고, 다방면에 걸친 결핍된 생활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또 한 번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럭저럭, 설렁설렁, 마지못해 살아가지, 그때 당시처럼 마냥 설레고, 마냥 행복하고, 그렇지가 못하다는 데 깊이 공감했습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결론 역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가라지’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 인생의 밭에 가라지들이 슬슬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라지들과 맞서느라 삶의 많은 에너지들이 빠져나갔습니다. 삶의 피로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반비례해서 행복지수는 낮아져만 갔습니다.
내 안의 가라지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별것도 없으면서 ‘내가 누군데’ 하는 쓸데없는 자만심이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과 우월감이었습니다. 내가 그쪽보다 나이가 많은데, 내가 그쪽보다 수도 생활을 얼마나 더 오래 했는데, 내가 이 분야에 얼마나 오래 종사했는데...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순간순간 분노하시고, 강력한 처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우리 가운데 과연 남아있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 단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고 막차라도 타게 하시려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일일이 다 통제하신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아버지께서 엄격한 아버지, 단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쉽게 보복하고, 쉽게 진노하는 아버지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면 죽음인데, 돌아가면 무시무시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데, 객사하면 객사했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는 늘 당신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우리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열려계시는 하느님, 늘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환대의 주님, 우리가 돌아갈 때 마다 그저 용서하시고 등 두드려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하든 그저 묵묵히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도 참아내시는 분, 우리의 악행을 끝까지 견뎌내시는 분, 우리의 불효를 끝끝내 인내하시는 분,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isCajF7Rps
++++++++++++++++++
<밀과 가라지는 이것의 있고 없고 차이>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하느님의 사람이고 구원받을 사람이며 가라지는 사탄의 씨를 받은 가짜이고 불 속으로 갈 운명입니다. 이는 마치 하늘나라의 비유 중 심판에 관한 물고기를 종류대로 골라 어떤 것은 담고 어떤 것은 바다에 다시 던지는 내용이나, 혹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내용과 같습니다. 이 모든 비유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새로 태어남’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처럼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가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단순한 인간이 아닌 신이 된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임은 ‘십자가’를 받아들임과 같습니다. 이태리 몬테팔코라는 작은 동네에 가면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성녀가 기도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왜 슬퍼하시느냐고 성녀가 묻자 “요즘엔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는 너무 가슴이 아파 “당신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리스도는 당신 십자가를 성녀의 심장에 꽂았고 성녀의 심장에는 그 십자가가 새겨져 지금도 썩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받아들였다고 다 가라지가 아니라 밀일까요? 생명나무를 먹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바쳐야만 했습니다. 모든 땅의 소출의 10분의 1은 하느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 때문에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을 따라주는 때는 감사할 때뿐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저항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구분은 성체를 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감사를 준비했느냐는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감사하지 못해서 성체를 영하고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감사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오프라 윈프리는 흑인으로서 미국 첫 앵커가 되었고 엄청난 성공과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는 ‘감사 일기’의 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감사를 찾으려고 했더니 정말 감사한 것들이 눈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감사를 받으면 더 감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자존감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칼릴 라파티라는 사람은 노숙자에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받고 싶으면 먼저 길거리 떨어진 휴지부터 주워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같은 노숙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였더니 주위 사람들이 감사한다고 했고 그의 자존감은 높아졌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행복이었습니다. 이것에 저절로 감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의 삶도 그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가지냐, 가지지 않느냐는 나의 ‘선택’입니다. 김지은 씨는 북한에서 9년간 한의사로 일하면서 절망을 느꼈습니다. 이에 맨몸으로 두만강을 건너 갖은 고생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다단계 판매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정착금으로 받은 것을 몽땅 잃었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북한에서 하던 한의사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보건복지부를 찾아갔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무심하게 “북한에 가서 대학 졸업증명서를 가져오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1분 후면 목숨이 끊어질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고요함이 밀려왔습니다. 시야가 매우 투명해지고 지나간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 갔습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많았구나! 그런데 왜 세끼 밥을 다 먹을 수 있는 지금 죽으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조금씩 잘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의 한의대 진학을 도와주었습니다.
몇 년 후 마침내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남북한의 한의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최초의 한의사가 되었고 개인 병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신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13,24-43: 하느님 나라의 비유: 밀과 가라지, 겨자씨, 누룩
오늘 복음에는 가라지와 겨자씨 그리고 누룩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가라지의 비유만 보기로 하자.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원수가 악한 뜻으로 거기에 가라지를 뿌린다. 그런데 가라지는 꽃이 필 때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을 보고 종들이 주인에게 알리며,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버려두었다가 가라지와 밀을 가리도록 하고 있다(29-30절).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악은 바로 잡을 수 있고 회복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선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메시아 시대는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기에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라지가 밀과 같이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지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악은 죄의 의미보다 그것이 극복되기 위해 하느님의 현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세주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존재임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악은 실제로 마지막 추수 때(30절) 극복될 것이다(41-42절 참조).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 승리를 즉시 보고 싶은 마음에 그 가라지에 대해 참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세는 열심한 자세라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태도이다. 그것을 뽑아버리면, 잘라버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선과 악은 마음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억센 거라지를 뿌릴 수 있다. 이 가라지를 제거하는 노력과 수고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는(참조: 교회 5) 교회도 가라지에 의해 침해되어 황폐화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비유의 후반부에서 선과 악의 현실적인 공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으로 강조점이 옮겨지고 있다(38-42절). 마지막 구절인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도 종말론적 관점을 말한다. 이렇게 강조점이 심판에 두게 된 것은 공동체가 처음에 가졌던 열심을 다 잊어버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도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기준이 되지는 못하며, 반드시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선과 악이 공평하게 드러나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제 사랑의 법에 불충실하면 모두가 단죄를 받을 것이며, 사랑의 법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하느님 앞에는 어떤 특권도 없다. 신앙에는 특권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모두 심판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지혜서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권능으로 하실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참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지혜 12,18-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우리들의 회개를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에 악을 너그러이 참아주시는 하느님을 또다시 대하게 된다. 이러한 당신의 행동을 그분의 백성인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신다(참조: 지혜 12,19). 회개한,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가라지에서 풍성한 결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 성령의 기도는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갖게 해 주며, 세상의 악이 존재하는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그 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의 능력과 세상이 희망으로 차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라는 표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결국은 역사의 마지막 장에 가서는 보다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약점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을 잘 보지 못하면서, 또 나 자신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는 선악도 보지 못하면서 쉽게 다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약점을 판단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또 나도 그런 약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느끼고,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볼 때, 가라지는 회개하여 언제든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 주어야 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작년까지는 신문사에서 주방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제가 혼자서 주방 일을 하고,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고추, 오이, 상추의 모종을 심었는데 돌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방 자매님은 수시로 텃밭에 나가서 물을 주고, 졸대를 세워 주고, 잡초를 뽑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 직원이 먹고도 남아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을 때는 물을 주고 있지만 외부 출장 일이 많아서 올해는 모종들이 많이 말라 버렸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들이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땅과 모종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땅에 거름을 주고, 모종에 물을 주면서 잘 키우는 사람의 정성이 문제였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도 비슷합니다. 거짓과 쾌락과 비판의 거름을 주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온갖 악취가 풍기기 마련입니다. 나눔과 희망과 격려의 거름을 주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사랑의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난 6월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하면서 첫 미사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주제로 강론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아껴주고, 격려한다면 성지순례라는 나무에서 기쁨과 희망의 열매가 열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짜증내고,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어내면 성지순례라는 나무에서 갈등과 분노의 열매가 열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성지순례의 목표는 ‘멈춤, 만남, 변화’입니다. 일상의 삶을 멈추고 성지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행객으로 순례를 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례자로 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례의 여정 중에 분심과 짜증이 생기곤 합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의 습관과 성격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날씨가 덥다고, 자유시간이 적다고, 물건 구입할 시간이 없다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두가 감사의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마칠 수 있는 것은 매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동 중에 묵주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기도 시간이 길어지면 불평의 말들이 줄어드는 것을 봅니다. 오직 기도만이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이해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가능성의 나라입니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는 나라는 아닙니다. 지금 부족한 사람도, 지금 잘못한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아주 작은 양이지만 빵을 커다랗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시작은 비록 작을지라도 끝은 아주 풍요로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작은 겨자씨는 자라면 새들이 깃들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생명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커다란 코끼리도 그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크기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움이 함께하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읽으면 ‘아메리카 원주민과 손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있단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대답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파란 늑대가 이기고, 검은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검은 늑대가 이긴단다.” 손녀는 할아버지의 말을 곧 이해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겸손하면 나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쁜 일을 하고, 교만하면 나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적과의 동침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걱정도 되고, 힘들게 만들어 놓은 공동체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버림받은 이들, 잘못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관대함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라지의 비유>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9-30)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7-43)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밀’이나 ‘가라지’로 판단하는 일은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15; 루카 17,3ㄴ) 죄는 막아야 하고, 악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기 위한 ‘형제애 실천’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실제 농사에서는 밀은 그냥 밀이고, 가라지는 그냥 가라지입니다. 밀이 가라지로 변하거나 가라지가 밀로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는 밀이었던 사람이 타락해서 가라지 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고, 가라지였던 사람이 회개해서 밀과 같은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지금 판단하지 말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바라면서 기다리시는 것처럼 우리도 형제의 회개와 변화를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나 자신’이 지금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회개를 기다리시고, 형제들이 나의 변화를 기다려 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절대로 가라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누구든지 살면서 밀이 될 때도 있고 가라지가 될 때도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밀이었던 분도 분명히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밀이 되었다가 가라지가 되었다 하면서, 즉 오락가락 하면서 살기도 하고, 자기 안에 밀과 가라지를 모두 동시에 가지고 있는 채로 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그런 문제로 고민했으니 보통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할 뿐입니다.
‘가라지의 비유’ 자체는, 기다려 주라는 ‘주님의 뜻’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가라지의 비유의 설명’은 ‘종말의 심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하더라도 종말의 심판 때가 되면, 가라지는 가라지로 심판받을 것이고, 오직 ‘밀’만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교회에 왜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의도하신 일도 아니고, 우리가 원한 일도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복음 말씀에는 악마가 한 짓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악마 탓’만은 아닙니다. 악마는 원래 ‘모든 사람’을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밀’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극복한 사람이고, ‘가라지’는 그 유혹에 넘어간 사람입니다. 결국 ‘사람 탓’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할 테니까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유혹을 받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백전백패입니다.(마르 9,29)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가라지의 비유에 관한 예수님의 해설은 비유가 전하는 의미를 거의 모두 담고 있습니다. 비유는 이따금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오늘 복음은 다르게 풀이하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어색할 만큼 가라지의 비유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비유에서 하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과 비교됩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고, 하늘 나라의 신비는 그분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금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유 속에서 예수님의 인내와 사랑을 찾아냅니다. 수확할 때까지,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가라지를 내버려 두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인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분명히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겠지만 지금이 그때는 아닙니다.
비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 나라의 특성을 말하여 줍니다. 하늘 나라는 무엇보다 인내와 사랑과 자비의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회개를 위한 시간이고, 회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하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이 시간은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이웃 안에서 자비를 실천하고 용서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님(사목국 노인사목팀 담당)]
<그대는 주님의 자비를 잊지 않 살아가는 신앙의 전달자입니다>
오늘은 제3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교황님은 이날을 기념하고자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루카 1.50)라는 말씀을 주제 성구로 뽑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에 실려있습니다. '마니피캇'이라고 하는 이 노래는 성모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하느님께 바친 찬미가입니다.
교황님은 이 주제 성구를 통해 잊힌 존재로, 실의에 빠진 채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삶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늘 함께하는 분이시며, 어느 순간에도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고 베풀어 주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실의에 빠진 노인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당부하십니다.
한편 교황님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날마다 기도하며, 성사를 받고,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내면의 삶을 가꾸어야 한다고 전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덮쳐오는 파도에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빼앗겨 물 위를 걷다가 물속으로 빠져버린 베드로와 같이, 버림받은 듯한 부정적인 느낌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또한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으로 채워진 충만한 내면의 힘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도 써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 말씀 중 '밭'에 해당하는 어린 손자녀들에게 신앙이라는 '좋은 씨를 뿌려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조부모 여러분! 손자녀들에게 신앙이라는 '좋은 씨를 어떻게 뿌려야 할지 걱정하고 계시는가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요. 인자하고 자비로운 성정을 유지하고 따뜻한 미소로 손자녀를 바라보기. 손자녀들에게 성호긋 는 법을 가르쳐 주고 함께 정성스럽게 바치기, 식사 전후 기도를 꼬박꼬박 바치기, 본당 성모상 앞에서 초를 봉헌하 며 함께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기, 늘 묵주를 가지고 다니면 묵주기도 드리는 모습을 손자녀들에게 자주 보이기. 고 사리 같은 손자녀의 손을 잡고 주일 미사에 함께 다녀오고. 예수님 이야기 들려주기와 같은 방법입니다.
위와 같은 방법들로 손자녀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은 아주 미소한 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치 작은 '겨자씨'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마태 13.32) 정도로 커집니다. 여러분 손자녀들의 신앙도 성령의 이끄심과 도우심으로 그렇게 커갈 것입니다.
=====================
《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재복 모세 신부님(묵호본성당 주임)]
<웬만하면 자비롭게, 웬만하면 너그럽게, 제발 행복하십시오.>
가라지는 피라고 불리는 볏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 식물입니다. 피는 쌀과의 혼식 이외에 떡, 엿 등을 만들고 된장, 간장, 술의 원료가 된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경우 멀의 사료나 빈민들의 양식이었을 만큼 소중한 구황작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라지는 벼와 함께 자라면 벼의 생육을 방해하고, 강풍이 불 때 피로 인해 벼들이 쓰러져 수확량이 적어질 뿐 아니라, 쓰러진 벼를 추수할 때 어렵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물 관리로 피가 나지 않도록 하고, 피 뽑는 데 땀을 흘립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종들은 밀밭에 난 가라지를 뽑아버리겠다고 하고,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지 모르니 수학 때까지 두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종과 주인의 시각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종들의 의도는 악을. 다시 말해 악한 사람들을 즉시 제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의인보다 죄인을 찾으러 오셨고, 튼튼한 이들보다 병자들을 먼저 돌보러 오셨다면 (마태 9,12-13 참조),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의 행동 또한 악인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인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역사를 살아가고 행동하는 두 가지 방식을 소개해 줍니다. 한편에는 멀리 내다보는 집 주인의 시선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문제를 바라보는 종들이 있습니다. 종들이 돌보는 것은 잡초 없는 밭입니다. 집주인은 좋은 밀을 돌봅니다. 주님은 좋은 밑에 집중하는 당신의 시선을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것은 잡초들 사이에서도 밀을 보호할 줄 아는 시선입니다. 타인의 한계와 결점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잘 협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회와 역사의 밭에서 조용히 자라는 선을 알아보고, 그것이 무르익을 때까지 일구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잘 협력합니다."(프란치스 코 교황 2020년 7월 19일 삼종기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다 좋은데 말이야 ㅇㅇ만 없었으면', '다 좋은데 말이야 ㅇㅇ만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나 나의 삶에서 가라지와 같은 것들이 없어져야 행복해지고, 더 나 은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사회 문제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습니다. 유혹에 빠진 이브처럼 선악과나무 주변을 배회하면서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받아 누리고 있 는 것에 감사해야겠습니다. 남을 탓하는 불평보다는 '남이 나로 인하여 지은 죄' 도 있음을 생각하여, 타인의 잘못을 인내로이 견디면서 서로 성장을 돕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불평과 험담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가라지를 더 자라게 할 뿐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가라지를 밀로 바꿉니다. 사랑과 자비가 담긴 말이 하느님 나라를 성장시킵니다. 오늘 조부모와 노인의 날에 그분들이 계심에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
《대구주보》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권대진 다마소 신부님(성안드레아성당 주임)]
<무질서속의 질서>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과르디니는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자, 다음과 감이 말했습니다. "최후 심판 때 나는 질문을 받기만 하지 않고, 주님께 묻기도 하겠다. .. 어떤 책이나 글, 교회의 교리나 교도권도 답할 수 없는 문제, 곧 '하느님은 왜 죄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라는 구원에 이르는 끔찍한 우회로를 마련하셨는지' 답변을 듣고 싶다." 덧붙여 이 보든 세상의 고통과 죄악이 일어날 때 하느님은 어디 계셨으며,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 지금도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지, 아직도 많은 사람은 질문울 던집니다. 여기에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말씀으로 대답해 봅니다. "(교회는) 보든 시대의 오류를 견더 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종종 오류를 단죄하였고 때로는 매우 엄하게 대처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라는 무기를 들기 보다 '자비' 라는 치료제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하느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벌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와 기다림, 사랑이 가득하신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하느님을 보릅니다. 율이 부르짓는 것처럼 부르짓을 뿐입니다. 세상의 무질서만 바라보고, 그 무질서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노님을 바라보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
'무질서 속의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시선으로는 무질서입니다. 가라지를 뽑아 버려야 질서 정연하고, 더 잘 자라는 밀을 통해 세상의 더 큰 선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질서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은 없습니다. 정의의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질서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옵에게 말씀하실 때, 결국 율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옵 42,5) 우리는 지금 어떤 하느님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무질서 속의 질서를 마련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우리가 언제나 가서 보올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
[부산교구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밀과 가라지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여기서 밀은 곳간에 모아들일 귀중한 삶을, 가라지는 뽑아 불에 태워져야 할 잡초, 즉 세상의 욕망이나 인간적인 나약함, 자신의 악습이나 부정적인 언행들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에서 눈여겨볼 점은 밀이삭과 더불어 가라지도 자라게 내버려 두는 주인의 행동에 있습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라고 물었을 때, 주인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밀이 가라지에 눌려 전혀 수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답변이며 동시에 오늘날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빚어지는 갈등과 하느님의 부재를 말하는 이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밀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고 가라지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인내는 하느님 편의 승리를 즉시 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성급함을 깨우치게 하며, 끝까지 기다리는 참을성을 키우도록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심판보다는 구원의 은혜를 드러내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라지가 좋은 씨앗인 밀과 더불어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악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를 드러내는 사랑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스로 밀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혹 가라지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스스로 가라지라고 생각해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자비와 사랑을 믿으며 삶의 자세를 바꿀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도록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해 주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팔거나 잠든 사이에 누군가 가라지를 뿌릴지도 모르니 깨어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말며 수시로 우리 삶을 신앙 안에서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예수고난회 김준수 이우구스티노 신부님]
유대 경건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드러난 비전은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자체)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바로 유대 경건자들과 근본적인 차이와 차별이 드러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하느님의 다스림과 나라’에 관한 것임은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를 깊이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악에 관해 어떤 처신을 해왔고,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반면교사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 점은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선의 좌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과 구별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한 선행의 실패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서 꿋꿋이 자신이 해야 할 바, 곧 하늘나라의 선포를 실천해 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리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단호히 선으로 악을 대처하는 대신 자신을 악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를 견책하신 듯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 곧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가치인 밀밭에, 악과 배격해야 할 악의 가치인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그 실체, 곧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13,28)라고 악의 실체를 인지하고 직시하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뜻과도 상반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게 진솔한 세상(=교회/가정/개인)의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이런 현실 앞에서 당황스럽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으며 즉각, 가라지(=악)을 보고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13,28)라고 대응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잠시라도 직시하고 직면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단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졸속한 해결책에 “아니다. 가만두어라.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29~30)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농사법은 세상의 농사법과 다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성급함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더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신앙의 시선)에서 신중히 바라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악을 우리 가운데 두고 견디어 내자는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처신이 엄청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방안처럼 들릴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은 이런 방안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셨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시초에는 선과 악을, 밀과 가라지를 분명하게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목 현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목자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입견에 따라서 성령 운동이나 다른 신심 운동, 혹은 어떤 봉사활동이나 모임 등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가리지(=악)를 뽑으려다 밀(=선)까지 말살하지 않고는 악을 세상(=교회, 공동체, 가정이나 개인)에서 멀리 몰아낼 능력이 애당초 인간에게는 부족하고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밀과 가라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보면 밀까지 뽑아버릴 수가 있으며,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밀과 가라지 뿌리가 서로 얽히게 되어 있어서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밀까지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고, 이를 아시는 예수님은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30)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확실히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악(=개인, 그룹이나 부류)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구별 지으려고 했고 함께 더불어 공존하고 공생하기보다 배격하고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자신들의 약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종교의 엘리트 의식 곧 선민의식에서 자신들은 거룩하고 교회 밖에 사람들은 죄스럽다고 단정하고 확신했기에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고 의식에 감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태도는 무엇보다 먼저, 일단 타인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내 탓보다’ 늘 ‘네 탓’으로 돌려 면피하려고 합니다. 그 책임을 돌리기 시작하면 우리네 삶의 태도는 좀 더 신중하게 자기 일이나 하겠다, 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악의 실체를 인식하면서도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꿋꿋이 선을 실행하는 길’ 밖에 달리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 하나만이 악에 대처하는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다 보면, 끊임없는 악순환만이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율법이 인간의 구원을 제약하는 곳이 어디든지 율법을 반박하였고, 오로지 하느님의 선으로만 하늘나라를 현실화하려고 묵묵히,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보다 현실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13,30.39.43)
여러분의 가정이나 공동체의 밭에도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 않나요.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가라지를 인식하고 인지할 때, 어떻게 처신하고 대처하며 살고 계십니까?
++++++++++++++++++
(2)
1973년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발표함으로써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하나의 대중적인 명제이자 화두가 되었습니다. 슈마허는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한 문장에 함축했었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한다는 주장, 오직 수치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성공, 환경에 대한 무지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고 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계화나 경쟁력 같은 사회경제적 가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교회의 성장이즘도 반성해야 합니다. 크고 화려하게 성전을 짓는 게 성장의 척도는 아니지 않나요? 행사의 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화려한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작고 보잘것없는 겨자씨와 그리고 하찮은 작은 누룩처럼 하늘나라는 무한한 성장의 비밀, 외적 성장이 아닌 참된 내적 성장 그리고 파급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씨가 그렇지만 특별히 작은 겨자씨는 땅에 뿌려지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찾기도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도 그 시작은 겨자씨와 같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언젠가 큰 나무처럼 장대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사랑한다는 그리고 고맙다는 한마디 말이 하늘나라의 시작입니다. 겨자씨처럼 잘 보이지 않은 작은 말 한마디나 행동이 나의 주변을, 세상을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만듭니다. 하늘나라는 먼 곳이 아닌 여기에, 하늘나라는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닌 작고 하찮은 나의 따뜻한 말과 길을 걸으면서 쓰레기 하나라도 줍는 작은 행동이 하늘나라의 시작입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고 숙성시킵니다. 또한 누룩은 빵을 맛있게 변화시킵니다. 이처럼 누룩은 처음에는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많은 양을 발효시키며 맛을 내는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빵을 부풀게 하고 맛을 내는 누룩처럼 내적 변화(=부풀림과 맛을 냄)는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의 출발입니다. 사랑으로 자신부터 변화하기 시작해서 점차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참된 내적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누룩 같은 능력으로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공동체에 맛을 내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의 신비를 자신의 삶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누룩의 사람이 진정으로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하신 까닭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13, 13)고 지난 주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오늘 복음에서 재차 “예언자(=이사야)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13,35)라고 명백히 다시 밝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루17,21) 하지만 우리는 볼 눈이 없고, 들을 귀가 없기에 하느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고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눈이 있는 사람은 보아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인내하시는 모습입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으시고 추수 때까지 밀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것은 곧 심판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시는 애절한 사랑입니다. 이 시간 인내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더 모범적인 삶을 살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다 양심적이고 올바르고 모범적인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받고 신앙생활을 멈추고 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보기 싫어 다른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가 보면 또 거기에도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뭐 피하려다 더 큰 골치덩이를 만나기도 합니다. 산 너머 산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을 키우게 됩니다.
맘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무슨 일을 하면 재미있다고 합니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 보면 서로의 속을 보게 되고 마음 상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서로의 열심히 달라서 비교하게 되고 열심히 하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못마땅해하고 속상해합니다. 내가 커지지 않는 한 불평불만의 요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마음으로 불편함이 있다면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내 마음단속을 먼저 해야 합니다.
MBTI라는 성격검사 유형이 있는데 검사의 결과물을 가지고 같은 성향끼리 모여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내가 싫어하고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의 그룹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볼 때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 흉이나 보고 험담하고…뒷담화를 한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서 나의 속을 보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챙겨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만 모아 놓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다시 그 맘 맞는 사람들 중에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인생 여정의 한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가 완벽하지도 않고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가라지’이고, ‘나는 밀’인양 ‘이렇다’‘저렇다’ 상대를 판단하게 됩니다.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 말고는 심판할 수 없음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부디 하느님행세를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착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잘 안되고 악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잘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못된 사람을 왜 그냥 두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밀과 악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가라지에 대해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십니다.
왜 그냥 두실까요?
1)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이 잘못했으면 즉각 벌을 내리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참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그래도 거두어 낼까요? 뽑아버릴까요? 여러분이나 저나 잘못을 했을 때 즉시 벌을 내리셨다면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회개의 기회, 은총의기 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독서 지혜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만 힘을 드러내시고, 너그럽게 심판 하시며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니 악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2,9). 세상이 변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2) 의인들에게는 단련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금도 불에 달궈야 순금이 됩니다. 시련과 역경을 통해 단련되고 강해지게 됩니다. 악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길로 인도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입니다. 공로를 쌓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얌체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를 다듬어 주고 견고하게 하는 복덩이 입니다. 자, 옆에 계신 분에게 ‘당신은 복덩이입니다.’하고 말씀해 주세요.
3). 악인에게도 어느 정도의 선은 다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선한 모습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아무도 완전히 나쁘거나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완전히 선하시고, 악마만이 완전히 나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의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화의 비결은‘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공로가 많은 것처럼 실수와 잘못, 과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곳간에 쌓이기를 원하시기에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심판보다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설령 우리 자신을 포기할지 몰라도 주님만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러진 갈대 같은 삶을 살지라도 우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매 순간 주님께 희망을 둘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율곡선생도 “선한 것이거든 그 의리를 다하고, 악한 것이거든 그 싹을 자르라.” 하셨습니다. 뿌리를 뽑으라고 하지 않고 ‘싹을 자르라.’ 하신 것은 선과 악의 뿌리가 얽혀있어서 이것을 뽑으면 저것이 함께 뽑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좋은 것 속에 나쁜 것들이 들어있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어김없는 구별’이 이루어져 좋은 것이 곳간에, 즉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거창해집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됩니다. 비록 우리가 행하는 선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그 일을 끝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가라지와 추수 때까지 함께할 수 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공로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모함하고, 빈정거리고, 험담하며 사사건건 반대합니까? 그래서 미워죽겠습니까? 속상하고, 분하고, 야속합니까? 그 사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거두어 낼까요? 뽑아버릴까요? 그들을 통해서 내 마음이 얼마나 넓고 깊으며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가를 알게 됩니다.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 휘둘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고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은총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아 주셨듯이 악인들에게도 인내롭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아 하느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밀로 머물러 곳간에 쌓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가라지로 표현되는 악한 이들도 어느 날 하늘나라 곳간에 저장되는 값진 밀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에는 체벌이 없어졌지만, 저 때만 해도 무서운 선생님께 체벌당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자율학습에 졸았다고 맞고, 반성적이 떨어졌다고 연대책임이라며 맞고, 수업 태도가 좋지 않다고 맞고, 때로는 예의 없다면서 맞는 일도 있었습니다. 체벌 도구도 다양해서 마대, 당구 큐 대, 아니면 두툼한 몽둥이 등이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20명의 학생이 10대씩 맞는 상황입니다. 20명의 학생 중에서 가장 아프게 맞은 학생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학생이 가장 아플 것 같습니다. 선생님 체력이 제일 좋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지막에 맞은 아이가 제일 아프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자기 앞 19명의 맞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불안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나쁜 감정을 극대화하기에, 불안을 자기 안에서 치워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이 사라지는 순간은 나를 지켜 줄 커다란 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자신 넘치는지 모릅니다. 평소보다 말도 잘하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합니다. 부모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나’를 지켜 준다면 어떨까요? 불안을 가질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부모보다 더 큰 힘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불안이 사라지고, 하고자 하는 용기와 의욕이 가득해질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센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악이 더 힘센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에서 묵상하게 됩니다.
우선 밀과 가라지는 모두 커서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식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구분이 되기 시작했을 때, 가라지가 보인 것입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기에 가라지가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주인은 원수가 했음을 알아챕니다. 종들은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고 묻습니다. 주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잡초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즉, 밀보다 더 탄탄하게 더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밀이 뽑힐 수도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지상에서 자라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 안에는 인내로써 견뎌야 할 악의 씨앗이 뿌려져 있음을 상기시키고, 하느님 나라의 자녀들은 악마 졸개의 기세에 눌려 고생하지만 역시 하느님의 심판은 선인들의 편임을 확신케 합니다. 최후의 승자는 악마가 아닌 선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붙어야 할까요? 가라지로 표현되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악의 힘이 하느님보다 센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우리에게 당신을 믿고 따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의 유혹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철저히 하느님 편이 되어 ‘밀’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삶이란>
마태오 13,24-43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참된 삶이란>
참된 삶이란
가라지를 뽑는 것보다
밀을 키우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어둠을 내모는 것보다
빛을 품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악을 없애는 것보다
선을 돋우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미움을 멈추는 것보다
사랑을 피우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절망을 잊는 것보다
희망을 꾸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불의를 삼가는 것보다
정의를 보듬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라
거짓을 내치는 것보다
진실을 따르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탐욕을 버리는 것보다
베풂을 누리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홀로를 벗는 것보다
함께를 입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죽임을 그치는 것보다
살림을 이루는 것입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의인입니까?>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밀과 가라지로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찌 악이 있는지, 하느님께서는 선이시고 사랑이신데 어찌 악이 있고 악인이 있는지, 이런 악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의 문제를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답하시는 겁니다.
우선 가라지 곧 악한 사람이 어떻게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잠자는 사이에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라고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수를 악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신이 따로 있다는 이원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굳이 악신이 아니라 악령이나 악의 세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얼마든지 원수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나를 악령으로 만들지 않으셨고, 우리 부모가 나를 악인으로 낳지 않으셨지만 우리의 부모가 잘못 양육하여 악하게 되고 내가 잘못하여 악하게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말에 ‘못난 놈’이니 ‘못된 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잘 못 태어난 놈이 아니라 태어난 후 성장 과정에서 잘못된 놈이라고 함이 맞을 겁니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그리고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가라지 곧 악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고 악한 사람이 된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 비유로 정작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악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그 사람을 즉시, 즉시 제거할 것인가? 그대로 놔둘 것인가? 그 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능력도 솎아낼 능력도 부족합니다.
언젠가 수도원 초자에게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라고 했더니 잡초는 놔두고 잔디를 다 뽑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지요. 우리는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까지 뽑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라지를 솎아내지 말아야 하는 더 큰 이유는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가라지이고, 앞서 봤듯이 우리가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고 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검찰 공화국이고, 더 나쁜 놈들인 검찰이 자기 입맛대로 기소하고 그래서 공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 정권에서도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솎아내려고 했고, 인간은 이토록 그럴 자격이 없는 곧 자기도 죄인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을 어떻게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 소관이고, 하느님께서는 종말까지 그 문제 해결을 유보하신다는 것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심으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너그럽게 심판하실 뿐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에 당신이 정하신 때까지 최대한 심판을 늦추십니다.
우리는 의인입니까?그렇다면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시며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감사해야 함은 물론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내가 악인들을 심판하겠다고 나대지도 말아야겠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인내와 겸손 -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참으로 늘 열려 있는 하늘 나라의 비유라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대로 우리 삶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아름다운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모습이,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 깨닫고 배웁니다.
결론하여 예수님은 늘 하늘 나라의 참삶을 사셨던 지혜로운 관상가이자 신비가이자 활동가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하늘 나라는 결코 죽은 정적靜的 현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중동靜中動의 생명의 현실, 성장과 성숙의 역동적力動的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은 제3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코로나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아가야 할 과제를 부여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깨닫는 바는 하늘 나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일도 중요하지만 공부, 특히 독서를 권합니다. 동영상도 좋지만 독서를 통한 공부는 더욱 필요하고 좋습니다. 분별의 지혜를 위해 인터넷 검색檢索이 아닌 독서를 통한 사색思索의 훈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라면 매일미사책을 통한 매일 미사전례문을 읽고 묵상할 것을 권하며, 적어도 ‘가톨릭신문’이나 ‘가톨릭평화신문’중 하나를 구독하여 읽을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어제는 강론 준비를 위해 두 신문을 대략 읽어봤는데 정말 내용이 풍부하고 유익했습니다. 광고에 나온 ‘가톨릭 조부모 학교 신앙학교’의 신앙전수법에 관한 내용도 아름다웠습니다.
“꿈꾸며 열매 맺는 인생여정의 영적 자존감, 공감과 경청의 예술로 만드는 영적우정의 대화, 저 너머를 바라보며 삶을 조각하는 동행의 말씀, 미래 세대에게 열린 하느님 사랑의 집 지구”
이대로의 노년이라면 그대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뿌리가 튼튼해야 꽃도 열매도 충실합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노년 어른들의 하늘 나라의 삶을 젊은 이들이 보고 배우니, 노년의 삶은 젊을 때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마침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이한 두봉 주교님의 한면에 걸친 인터뷰 기사도 풍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었습니다. 1929년생이니 만94세의 노인이지만 참 정정했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당부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항상 빛나는 존재입니다. 항상 ‘기쁘고 떳떳하게’ 사십시오.”
‘기쁘고 떳떳하게’ 주교님 삶의 모토입니다. 그대로 하늘 나라를 살고 계신 주교님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노년입니다. 또 하나 부탁입니다. 오늘 제3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에 대한 교황님의 담화문을 소리내어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어제 인터넷에서 전부 출력하여 정독했는데 정말 아름답고 깊고 풍부한 내용으로 영적독서에도 최고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명문이지만 젊은이들과 노인들 모두에 해당되는 한 대목만 인용합니다.
“우리 모두 앞을 바라봅시다! 타성과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를 세세대대로 벗어나게 해주시는 하느님 은총으로 우리가 빚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깁시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를 잘 들여다 보면 주인공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하느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관상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지혜서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말고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당신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의 힘이 정의의 원천입니다. 당신은 힘의 원천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 자녀들에게 안겨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주인공이 되십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 주시어 하늘 나라를 잘 깨달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성부 하느님에 대해, 제2독서 바오로의 로마서는 성령에 대해, 그리고 복음은 성자 예수님께서 주시는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모두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의 비유에서 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닮는 일이자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덕목들입니다. 어제 빛두레에서 읽은 한 대목입니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말했습니다.” 새삼 좋은 덕목의 의식적 선택과 한결같은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사람꼴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세 하늘 나라의 비유들로부터 배운 것은 셋입니다.
첫째, 희망과 기쁨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우리 삶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의 설렘이 있습니다. 문제는 가라지들인데 이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때문에 희망과 기쁨이 질식되어선 안됩니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농약이 거름이 없어도 줄기차게 자라는 잡초들, 그리하여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입니다.
참으로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잡초의 세력을 약화하고 밀세력을 상징하는 진선미眞善美의 세력을 부단히 키우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겨자씨의 성장과 성숙도 밀가루를 부풀리는 누룩도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의 표징이 됩니다.
말씀의 겨자씨도 될 수 있고 말씀의 누룩도 될 수 있습니다. 희망과 기쁨의 겨자씨, 희망과 기쁨의 누룩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 각자는 물론 우리 요셉 수도원도 겨자씨가 누룩이 됨을 깨닫지 않습니까. 설립후 만35년동안 작은 겨자씨 같은 공동체가 얼마나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한 나무로 되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들처럼 날아 와 깃들이는 지요! 26년전 1997, 3월에 쓴 ‘사랑’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정주생활의 기적입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26년전 시를 오늘 강론에 인용하다니요! 참으로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둘째, 자비와 지혜입니다.
역시 자비와 지혜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자비와 지혜로 요약되는 하느님입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자비가 바로 지혜입니다. 셋의 비유에서 배우는 바, 역시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공존공생共存共生의 자비와 지혜를, 균형과 조화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가라지 악은 원인불명의 현실입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 밀을 다칠 수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가라지 인줄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밀과 가라지는 서로 뿌리들이 엉켜있어 뿌리뽑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발본색원한다며 범죄와의 전쟁도 했지만 승리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가라지 세력의 척결을 위한 혁명도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가라지 세력은 결코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할 일이 부단한 영적훈련의 습관화로 내안의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비요 지혜입니다.
언젠가 밀로 변할 가라지도 있을 것이고 언젠가 가라지로 변할 밀도 있을 것이니 심판은 자비와 지혜의 주님께 맡기고 자비와 지혜의 마음으로 공존공생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요 부단한 자비와 지혜의 훈련과 습관화를 통해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자비와 지혜의 훈련에 소홀하면 악의 잡초세력은 선의 밀세력을 압도할 것이며 이때는 개인도 공동체도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겨자씨의 성장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잘 보살피고 거름을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불필요하게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고 잘 지켜보는 것입니다. 누룩 역시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이또한 자비와 지혜, 감사의 마음으로 묵묵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일 좋은 것은 우리 자신이 자비와 지혜의 밀이, 겨자씨가,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의 빛, 지혜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힐 것이니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셋째, 인내와 겸손입니다.
역시 인내와 겸손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사랑, 겸손한 믿음, 겸손한 사랑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바로 겸손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가라지들 속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는 지극한 인내와 겸손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께 가라지 세력의 심판을 맡기고 겸손히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라지 악의 세력을 뽑아버리려는 무모한 교만은 재앙의 뿌리가 됩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참으로 인내와 겸손의 믿음이, 사랑이 답입니다. 겨자씨로 상징되는 덕목들과 사람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과 겸손뿐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누룩이 삶을, 공동체를 부풀리게 하기 위해서도 인내의 기다림과 겸손은 필수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를 살고 싶습니까? 주님은 오늘 고맙게도 죽어서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자유롭고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인내와 겸손이 답입니다. 이 덕목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끊임없이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43)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마태,13,24-43)은 '가라지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인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 때문이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유도, 성직자의 길과 수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이유도 하느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안에 계십니까?'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가라지의 비유)는 것과 '하느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메시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드러났고, 그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복음을 가까이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져라. 낮아져라. 비워라. 내려놓아라. 죽어라.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여라.'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이 뜻이 실행되는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장 큰 걸림돌인 교만을 드러내지 말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V0wDoIyT4gY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 30)
하느님의 농사법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농사법입니다.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보게됩니다.
밀밭에는 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을
향하든
가라지가
있습니다.
뽑아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훤히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밀밭입니다.
삶이라는
밀밭에는
욕심이라는
가라지도 있고
밀이라는
평화도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의 땅에서
잠시 머물다
떠나는
우리들 삶입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이듦이라는
황혼도 있습니다.
지혜는 마음을
먹고 자랍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늙어갈수록
외롭고 아픈
우리들
모습입니다.
위로와 사랑이
서로의 품위를
지켜줍니다.
인격의 소명은
사랑이라는
참된 소명입니다.
가라지로
더한층
뚜렷해지는
밀이라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이기심이 아닌
가라지만이 아닌
진실한 밀로
진실한 사랑을
나눕시다.
우리의 삶이
참된 사랑으로
더 아름답게
더 건강하게
황혼을 맞이하는
우리의 밀밭
우리의 여정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소명에
끝까지 충실한
우리들 삶이
풍요로운 밀밭의
삶입니다.
가라지가 아닌
밀이라는
사랑을
따르는 사랑의
주일입니다.
=====================
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