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6.
질투
오후 8시45분.
한동안 소식 없던 고리아니마가 오드리헤어에 나타났다.
삐가리치킨카페에서 미스터 양에게 불륜현장으로 오인 받은 지 꼭 7일만이었다.
한상애가 반갑게 맞았다.
“얘, 어떻게 된 일이야? 전화도 안 받고?”
수척한 모습으로 고리아니마가 대답했다.
“사는 게 싫어졌어.”
“또 무슨 일 있었니?”
방금 앞 손님의 머리커팅을 끝낸 자리에 고리아니마를 앉히며 한영애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너, 그일 아직도 못 털었구나. 그 사람이 자살한 건 말 못할 개인비사가 있었던 거지. 설마 연체 때문에 자살했겠어?”
고리아니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일은 벌써 잊었어.”
“다행이다. 그런데 왜 다 죽어 가는 상이니?”
“지난 세월 돌아보니 무슨 맛으로 살았는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한상애가 가위질을 멈추고 고리아니마를 쳐다봤다.
“얘, 남편 일찍 여윈 건 안타깝지만, 돈 있는데 뭐가 부족해서 그러니?”
“넌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아.”
“배부른 소리 하지 마.”
고리아니마는 몹시 서운한 표정으로 한상애를 쳐다봤다.
“난들 왜 돈 욕심 없겠어. 허지만 돈에 얽매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이러다 안 되겠다 싶더라. 가령 식탐 많은 사람이 병원에서 말기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일까? 돈일까? 연명일까? 허지만 때는 늦어버린 거잖아?”
한상애가 웃었다.
“그래도 난 너처럼 돈 많아 봤으면 좋겠다. 어머? 속 머리가 너무 거칠다. 트리트먼트 좀 해줄게.”
한상애는 고리아니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머리에 영양제를 듬뿍 발랐다.
비닐커버를 씌우며 말했다.
“어쨌든 딴 생각 말고 영양 스며들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잡지나 봐.”
대기용 소파로 옮긴 고리아니마는 말없이 잡지를 뒤적였다.
한참 잡지를 뒤적이던 고리아니마가 잡지 속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어쩌면 이렇게 어려 보일까?”
잡지 속 그림을 건너보며 한상애가 말했다.
“스타일을 비교해봐. 머리만 잘 잘라도 10년은 젊어 보인다고 그토록 일렀건만, 넌 항상 똑 같은 스타일이지? 그건 고수가 아니야. 어리석은 고집이지.”
잡지를 이리 저리 돌려보던 고리아니마가 불쑥 물었다.
“나 오늘 머리 쇼트커트하고 염색해볼까?”
한상애가 말했다.
“웬일이야? 죽으나 사나 파마만 고집하던 사람이?”
고리아니마가 빙그레 웃었다.
“네가 그랬잖아? 심란할 때 머리만 바꿔도 인생이 달라져 보인다고.”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해?”
“자라는 게 머린데 뭘 걱정이야?”
“영양하기 전에 진작 말하지.”
한상애가 고리아니마의 머리에 씌웠던 비닐커버를 벗기며 물었다.
“염색은?”
“빨강?”
한상애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미쳤어?”
고리아니마가 진심으로 말했다.
“변신할 바엔 완전히 바꿀래.”
“네 나이에 그게 말이라고 해?”
“왜? 내 나이가 어때서?”
“너 진짜 제정신이야?”
한상애의 만류에도 고리아니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커트를 한 후, 염색하기 전 한상애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빨간색 타?”
“내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어.”
한상애는 더 만류하지 않고 붉은 염색약을 타서 고리아니마의 짧게 자른 머리에 염색약을 발랐다.
15분 후.
머리를 거울에 비추며 고리아니마가 물었다.
“어떠니?”
한상애는 말없이 고리아니마를 지켜보기만 했다.
거울에 이리저리 헤어스타일을 비춰보던 고리아니마가 긍정적으로 말했다.
“어쩜 이게 내 참모습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사별하고 이런 기분 처음이야.”
억지로 웃어 보이며 한상애가 대답했다.
“내가 해놓고도 난 어색해 보이는데 네가 좋다니 다행이다.”
드라이를 하는 한상애에게 고리아니마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너는 모든 사람을 바꿔버리는 재주가 있는데 난 나 자신도 못 바꾸고 살았으니 이게 뭔지 모르겠다.”
“무슨 말이니?”
고리아니마가 푸념했다.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것이 버림받은 사람이라던데, 버림받은 거 보다 더 슬픈 게 뭔지 알았다는 뜻이야.”
갑자기 한상애가 마감 질하던 손을 멈추었다.
뚫어지게 고리아니마를 쳐다봤다.
“너 혹시 남자 생긴 거 아냐?”
대답대신 고리아니마는 묘하게 웃었다.
“어쩐지. 연하남?”
“연하남?”
고리아니마가 반문했다.
한상애가 눈을 반쯤 흘기며 말했다.
“연하남이면 어때. 어차피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면 그게 훨씬 부담 없지.”
“내가 지금 연애하는 줄 알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네 나이에 짝사랑이라도 한단 말이야?”
한상애는 여고 동창인 고리아니마가 사랑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한상애의 거듭되는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고리아니마는 별 생각 없이 일주일 전 있었던 삐가리치킨카페 해프닝을 털어놓았다.
한상애의 표정이 변해가는 줄도 모르고 고리아니마는 그날 벌어졌던 상황을 실토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일어나는 나를 막으려다 삐가리사장이 나를 안았지.”
한상애가 곱지 않은 눈으로 물었다.
“기분이 어땠는데?”
고리아니마가 머리를 흔들었다.
“기분? 그런 소리하지 마. 모든 건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어. 모르지, 내가 젊었다면.”
한상애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한번 달라고 그래보지 그랬니?”
고리아니마는 한상애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고 싶더라. 허지만.”
고리아니마기 말을 흐리자 한상애의 눈에서 360V스파이크가 일어났다.
두 관자놀이에서 어금니자국도 불록하게 돋아났다.
한상애가 고리아니마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다. 헤어스타일도 바꾼 김에 한번 놀아봐.”
한상애의 지글거리는 눈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리아니마는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엉뚱하게 대답했다.
“역시 네 말이 맞다. 내가 봐도 몇 살은 어려 보인다. 안 그래?”
“절묘하군.”
“절묘하다니?”
“그런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하는 저의가 뭐니?”
고리아니마가 웃었다.
“얜, 별소리 다하구나. 저의는 무슨 저의니? 친구니까 하는 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는 고리아니마의 말에 한상애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갑자기 헤어스타일 바꾸는 것은 강달구를 위한 것이라고 지례 짐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아닌데, 그런데도 오기가 치밀어 분노를 조절 할 수 없었다.
한상애가 고리아니마에게 거울을 통해 야릇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그날 네가 좀 늦게 왔더라면 우리 동서될 뻔했구나.”
고리아니마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동서라니?”
한상애는 다혈질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동서 몰라? 한배에 두 놈이 타도 동서지간이고, 두 배에 한 놈이 타도 동서다.”
고리아니마는 너무 어이없어 멀거니 한상애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상애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너와 나, 동서 안 된 게 천만다행이지만, 두 연놈들이 무슨 지랄을 했던 내 앞에서는 더 이상 지껄이지 마.”
고리아니마가 두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어머! 어머!”
부들부들 떠는 고리아니마를 노려보며 한상애는 연거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편안밤 되세요
네~ 멋진 날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