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로즈의 반지 written by takatosaya ,translated by naki
프롤로그.....
설마, 내가 다시 눈을 뜨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수십 년만에 눈을 뜬 직후,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이 든 그 마지막 순간에 이번에는 정말로 승천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이렇게 깨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의 빛이 역력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아직도 이 어둠에 둘러싸여 자고 싶었다.
눈을 뜬 이유는 알고 있었다.
주위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마녀, 당분간은 얌전하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어디의 어떤 녀석이 맘에 들었던 걸까?"
그는 그 흑발마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눈썹을 찌뿌렸다. 이 성을 지배하고 있는 자는 인간미 없는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마녀. 그녀가 다시 움직이려는 듯 했다.
아무런 사실도 모른 채 이 성으로 들어오는 자의 얼굴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 자가 누구든지 간에 만나게 되면 충고해 줄 것이다.
'네가 발을 들인 이 장소는 마의 소굴이다'라고.
그때까지는 이 어두운 곳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다.
아직 만나지 못한 자여.
네가 평화를 원한다면 이 성만은 오지 마라.
그것이 네 자신을 위한 길이다.
제 1장 저스틴의 새로운 가족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천애고아라고 생각했던 저스틴의 앞에 숙모의 대리인이 나타난 것이다. 갈색 머리카락에 역시 같은 색의 탐스러운 수염을 기른 신사는 화려한
마차에서 내려왔다.
바깥에서 나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무슨 일이 났나, 하고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온 저스틴을 향해서 그는 말했다.
"저스틴 에이드 다레인. 난 케이드 다리네드. 네 숙모님의 대리인이다."
저녁식사시간에 오늘의 저녁메뉴인 호박죽을 홀짝홀짝 먹고 있던 차에 갑자기 뛰쳐나왔기 때문에 손에는 호박죽이 묻은 스푼이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수...숙모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아마 이럴 때를 두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겉이 번지르르한 말일수록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 16년동안 저스틴이 살아오면서 체득한 진리다. 그래서 그녀는 의심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숙모님이 있다는 소리 들어 본적도 없어요."
그녀의 머리 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돌아가고 있었다.
'말해 두지만, 나를 속여도 아무런 득도 없어요! 아무리 그래봤자 난무일푼이나 다름없으니까.'
사실 그날 저녁식사도 처음이자 마지막 남은 끼니였다. 오늘은 이웃에 사는 야채가게의 아주머니가 저스틴에게 호박을 줘서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안그랬으면 지금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집은 8년 전 부모가 한꺼번에 죽고 나서 고아가 된 저스틴을 불쌍하게 여긴 후덕한 집주인이 그대로 빌려주었기 때문에- 사실은 저스틴이 '여기에서 쫓겨나면 길바닥에서 객사할지도 몰라요' 라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기 때문에 쫓겨나진 않았다-집 문제는 잘 해결 되었지만 하루 세끼를 책임지기엔 그녀가 어렸다. 16살의 소녀가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나 무정했던 것이다.
'아, 그치만 아무리 무일푼이라도 해도 나한테는 이 튼튼한 몸이 있잖아. 그
래, 이런 나라고 해도 사창가에 팔리면 분명 나름대로 가치가 있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아직 깨끗한 몸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스틴은 당장 숙모의 대리인을 향해 말했다.
"저, 케이드 다리네드씨. 나를 사창가에 팔려는 생각이라면 버리는 게 좋아요. 나한테 그런 직업은 안 맞아요. 난 원래 솔직해서 거짓말하고 아부하는 특기도 없고, 춤을 추면 손과 발이 같이 나가는 성격입니다. 아마 옆사람이
크게 다칠 거예요."
숙모의 대리인은 저스틴의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을 나는 멧돼지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저스틴 에이드 다레인."
그는 이마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어쩐지 너와 우리들 사이에는 넓고 깊은 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구나. 우선 그 강을 넘기 위해서 서로 대화를 하는 게 좋겠다. 들어가도 되겠지?"
저스틴은 마지못해서 승낙했다. 솔직히 사람을 사고 팔 것 같은 위험한 인물을 무방비로 집안에 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자인 듯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숙이고 나오는데 매정하게도 할 수 없었다.
곧이어, 집안에서 그 부자인 듯한 신사에게 호박죽을 내놓던 그녀는 지금까지의 인생이 확 바뀔만큼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귀족의 딸?'
눈알이 튀어나올만큼 놀라운 이야기였다.
눈앞에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친구들이 흑흑 대며 울고 있었다.
"잘 가, 저스틴. 몸 조심해."
"이제 정말로 만날 수 없는 거야? 저스틴이 없으면 굉장히 심심할 거야."
"공작인지, 백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자친척이 생겨서 부러워. 행복해야해, 저스틴."
"신분이 달라졌어도 우리들을 잊으면 안돼, 약속했지?"
저스틴과 달리 고아는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가난한 소년소녀들이었다. 가장 연장자인 저스틴은 그들의 대장으로 빈민가 악동들의 위에서 군림했다.
저스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태로 그 슬픈 이별의 분위기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알았어. 내가 여기를 잊을 리가 없잖아. 이 마을은 내 앞마당과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너희들과 지낸 매일매일은 나한테 있어 보석과도 같았어. 앞으로 무슨일이 있어도 결코 잊지 않을게."
이 마을을 좋아했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섞여있는 이 마을을 좋아했다. 겉도 속도 좋아하는 곳도 싫어하는 곳도 전부 저스틴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이 마을을 떠날줄은 생각도 못했다. 큰 도시 안에서도 유달리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 빈민촌이라고 불리는 이 곳에서 저스틴은 평생 살아갈 생각이었다.
"안녕, 내 고향."
그녀는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에 익숙한 마을풍경. 익숙한 사람들.
이런 식으로 마을을 다시 돌아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는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말 좋아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슬프지만 저스틴한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이제부터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의 여동생. 한번도 보지 못했던 숙모와 만나는 것이다. 이제부터 저스틴한테는 새로운 생활과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저스틴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의 창문으로 길게 몸을 내밀고 외쳤다.
"모두, 건강해요.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어도 절대 잊지 않을게요!"
그렇게 외치고 저스틴은 크게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좋아했던 마을에서 떨어져 수도의 큰 관문을 통과할 쯤,
"케이드 다리네드씨."
저스틴은 정색하고 숙모님의 대리인을 똑바로 향했다.
"케이드라고 불러도 된다. 나는 네 먼 친척이 되니까."
저스틴은 놀랐다.
"제 친척이란 말이예요?"
"먼 친척이란다. 네 혈통은 굉장히 오래되어서 몇대를 거슬러올라가야 하지. 그렇게 따져보면 나 같은 친척은 산만큼 많단다."
"다 좋아요. 난 아빠와 엄마한테 그런 친척들이 있다는 소리 못 들었어요. 그래서 먼 친척이라도 다 좋아요."
숙모의 대리인은 온화한 눈빛을 띄었다. 저스틴과 처음 대면했을 때는 그녀의 언동에 놀랐지만 그것은 그녀가 너무 솔직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저스틴의 질문에 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제 숙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오랜 침묵 끝에 케이드 다리네드는 대답했다.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다."
"정말요! 그럼 빨리 만나보고 싶어요. 그치만 제가 듣고 싶은 건 얼굴이 아니라 성격이예요. 얼굴보다는 성격이 먼저죠. 난 숙모님의 얼굴이 괴물 같아도 괜찮아요. 특별히 착한 분이 아니어도 상관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하나 둘씩은 있는 법이니까요. 저도 성질 급하고 마음 약하고, 또 수전노라든가, 빈민성으로 뭉쳤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하지만 이제부터 같이 살아가려면 서로를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숙모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요."
저스틴의 입은 잘도 떠들어댔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또래들 안에서도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해서 한번 말을 꺼내면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케이드 다리네드는 그녀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꽤나 활달한 아이다. 거기다 머리도 좋은 것 같고.'
가끔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몇 마디의 말을 들어본 결과, 저스틴이 가정교육이 나쁜 아이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웃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그녀는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는 말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 가정교육을 못 받은 아이에게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예절이다. 누구한테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옮긴 것이리라.
그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그녀 자신이 하기 나름이었다.
적어도 저스틴의 새로운 숙모는 저스틴이 원하는 인물은 아니었고,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드 다리네드는 솔직히 이 약간 별난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단 한마디는 해 줄 생각이었다.
"아름답지만, 조금 특이한 분이시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렴. 나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구나."
저스틴은 어렴풋이 불안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표정을 다시 원래대로 하고 한번 더 물었다.
"숙모님은 저를 좋아해 주실까요?"
조금 걱정이 되는지 저스틴은 등 뒤로 흘러내린 윤기있는 긴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붉은 머리카락.
아마 어디 가서도 눈에 띌 만큼의 색조다. 저스틴의 눈동자는 평범한 른
색이었지만 머리카락의 색깔은 너무 강렬했다.
"붉은 머리의 여자 아이를 숙모님은 좋아해 주실까?"
그말에 대해서 케이드 다리네드는 그냥 웃어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