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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나 아영은 엄마와 마주앉아 있었다. 테이블위에는 선 볼 사람의 정보가 들어있는 봉투가 놓여있었다. 아영이 엄마와 봉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에~ 엄마는 이런 걸 왜 받아 와요. 안 본다니까.”
“이 녀석이. 네 나이가 올해 몇이야? 진짜 노처녀 귀신이라도 되려고 그래? 너 지금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첫둥이가 늦둥이야. 그걸 알아야지.”
“아니 결혼을 왜 꼭 해야 하냐고~ 엄마는 너무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딸한테 너무 강요하신다는 생각 안 하세요?”
엄마가 손을 들어 아영의 팔뚝을 톡 때리셨다.
“엄마~!”
“봐. 괜찮더라. 집안도 뭐 그렇게 못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우리가 처지게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대기업 다닌대. 직장 튼튼해. 나이도 너랑 딱 2살 위고. 사람이 서글서글해 보이는 게 딱 너랑 어울리겠어.”
“아니 그게 이상하지 않아요? 누가 봐도 괜찮은 조건의 남자가 서른 일곱이 될 때까지 결혼을 못 했다는게?”
“일만 하느라 연애 할 시간이 없었대.”
“엄마는 그런 뻥을 믿어요? 연애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어. 뭔가 하자가 있는 거지~”
엄마가 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팔을 때렸다.
“그럼, 넌! 너도 하자가 있어서 아직까지 변변한 연애도 못하고 그러고 있는 거야?”
“아파요~”
“시간 잡을 거야. 그런 줄 알아. 놓치기 아까운 자리라서 그래. 만나보고 아니면 그만 보면 되는 거야.”
“그럼, 만나기만 하는 거에요. 싫다는 데 자꾸 엮지 마세요.”
“알았어. 대신 제대로 보는 거야. 괜히 싫다고 이상한 행동 하지 말고.”
“이상한 행동?”
“아는 동생 시켜서 선 자리에 와서 마치 남자 친구 인 것처럼 깽판 놓거나, 괜히 지져분한 행동을 해서 상대방이 정내미 떨어지게 만든다던지.”
“드라마를 너무 보셨어. 너무 보셨다고~”
“제대로 보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더 이상은 말하기 없기에요.”
“알았어.”
아영은 한 숨을 내쉬며 봉투를 열었다.
“어디.. 내 맞선남 얼굴 좀 보자~”
사진을 본 아영은 입술을 살짝 내밀며 “뭐.. 인물은 괜찮네.”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봉투를 들고 오면서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은희가 선보는 걸 부러워 했던 게 엊
그제 같은데 자신이 선을 본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맞선날짜가 잡히고 그 전날 그녀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엄마가 돈을 부쳐주셨다. 이상한 옷 입고 나가지 말라고. 쌈짓돈을 보내주
셨다. 아영은 예전에 진호와 함께 돌아보았던 옷가게들을 터벅터벅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러
다가 세일하는 상품인데 괜찮은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7부 소매에 루즈 핏의 잔꽃무늬가
들어간 고운 핑크색 원피스였다.
“이거 입어 볼 수 있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사이즈가..”
아영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몸매를 많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여성스러워 보이는
타입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전체 길이도 적당했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 살펴보고 있는데 거울
에 비친 그녀 뒤로 인상을 쓰고 있는 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아영은 눈을 그에게서 떼
어내고는 점원을 보고 미소 지으며 “이걸로 할 께요.” 라고 말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다시
자신의 옷으로 입고 원피스를 들고 나가 점원에게 옷을 건네었다. 신발을 제대로 신고 가방에
서 엄마가 현금을 넣어두신 체크카드를 꺼냈다.
“결제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네. 일시불로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기 영수증과 카드 받으시고요. 여기 원피스도 받으세요. 그럼 즐거운 쇼핑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아영은 지갑에 영수증과 카드를 집어넣고 다시 가방에 지갑을 넣고 쇼핑백을 들고 매장을 나왔다. 그가 뒷짐지고 화가 난 사람으로는 최대한 점잖게 그녀를 따라왔다.
“여긴 어쩐 일이지? 선이라도 보나?”
“어떻게 아셨어요? 형규씨가 말해줬나 보네요. 맞아요. 저 선 봐요.”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다 멈칫하고는 다시 뒷짐을 지고 말했다.
“누가 선 보래! 내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 알아?”
“그러게 누가 그런 바보같은 행동을 하랬어요? 호적에서 파긴 뭘 파..”
“할머니 쓰러지시고,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누나한테 또 얻어맞고.. 그래도 난 당신이랑 같이 있으려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데, 선을 봐?”
“누가 당신한테 호적에서 빠져 나오라고 했어요? 왜 시키지도 않은 행동을 당신 마음대로 해 놓고, 누구한테 책임을 떠 넘겨요?”
“내가 부자인 게 부담스럽다면서, 우리 집에서 반대하는 게 힘들 것 같다면서. 안 그랬어?”
“그렇게 말한 것 중에 그것만 이해 하셨나봐요. 가장 중요한 것 잊으셨네요. 내가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걸요.”
“그래서, 선보는 그 놈은 당신한테 어울리는 사람인가? 대체 어떤 놈이야?”
“아~ 김도훈이라는 사람요? 실물을 봐야겠지만, 사진으로는 인물도 괜찮고, 대기업 다닌 지 3년 되었고, 모아둔 재산도 좀 있나 보더라구요. 부모님은 인상이 서글서글하다고 좋아하세요.”
“그게 현실성이 없잖아. 그렇게 괜찮은 남자가 아직 싱글이라는 게..”
“그러게요? 현실성은 없는데 있네요. 그런 사람이.”
“나이가 몇 살인데?”
“저보다 2살 많다네요. 전 개인적으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최소한 철은 들었을 것 같아서.”
“웃겨~ 나이가 많다고 철이 들었을 거란 건 도대체 어떤 근거에 의해 나온 말이지?”
“당신을 근거로 생각한 거에요. 나랑 동갑이지만 철이 안 들어, 안 들어, 이렇게 안든 남자는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결국 보겠다고?”
“그럼요. 이거 한 번에 평생 결혼하라는 말을 안 듣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꾸만 결혼해라, 아이를 낳아라 노래를 부르셔서 이 선을 보면 결과와는 상관없이 다시는 결혼얘기를 안 하신다고 약속 받고 하는 선이라고요.”
“그래?”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서 그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는 걸 본 아영이 흘겨 바라보았다.
“설마 해서 말하는 건데, 선보는 자리에 나타나 훼방 놓을 생각이라면 그 생각을 빨리 지우는 게 좋을 거에요.”
“왜? 어차피 결혼 안 할 거면서.”
“제대로 보는 게 조건이에요. 다른 사람 시켜서 훼방 놓거나, 일부러 안 좋은 인상을 주지 않는 조건으로 보는 거란 말이에요. 알았어요?”
“그럼, 난 어떻게 하라고!”
아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는 그가 옆에 오르자 문 앞에 가까이 서서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얼른 집에 가서 잘못했다고 빌고, 당신 삶을 사세요.” 라고 말하고는 문이 닫히기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보였다. 아영은 “고생을 하긴 하나보네.. 얼굴이 반쪽이네..” 라고 말하고는 몸을 돌려 에스컬
레이터로 향했다.
선을 보는 날 아침, 그녀는 원피스를 입고 구두도 신고 미리 사 놓은 가발
을 갖고 미용실로 갔다.
“언니, 오늘은 울어도 번지지 않는 마스카라로 부탁해요.”
“선 본다면서. 울 일이 있을까봐?”
“그냥 예방 차원에서요.”
“알았어. 가발도 쓸 거야?”
“네. 기왕이면 좋은 인상을 남기고 헤어져야죠.”
사실은 하필 선을 보는 호텔커피숍이 TK호텔이었다. 그가 나올 가능성이 100%라서 그녀는 최대한 예쁘게 하고 가고 싶었다. 긴 웨이브 머리에 단아하고, 정갈하게 화장을 했다.
“아영이 예쁘다.”
“그래요?”
“그래. 선 잘 보고 와.”
“네. 언니. 고마워요.”
아영은 계산을 마치고 미용실을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타고 TK호텔 커피숍으로 향했다. 화장실
에 들러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몇 번 반
복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맞선남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소짓고 있는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신아영씨.. 맞으세요?”
“네. 김도훈씨죠?”
“네. 사진이랑 많이 다르신 것 같아요. 머리가..”
“원래는 이 길이였는데, 도서관에서 어떤 아이가 장난을 치는 바람에 짧게 잘라야 했어요. 기르고 있는 중이긴 한데 선자리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제가 선은 처음 보는 거라서요. 너무 힘을 준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아닙니다. 아름다우십니다.”
“아하하하.. 감사합니다.”
아영은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문부터 하실까요?”
“네. 전 커피 주세요.”
“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가 진호보다 조금 작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사진보다 훨씬 괜찮았다. 미남이라는 소리도 아깝지 않을 외모였다. 목소리도 좋고, 그녀를 바
라보며 수줍어 하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안경이 햇빛에 반사되
어 눈동자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웠다.
“선은 처음이시라고요?”
“네. 도훈씨는 많이 보셨어요?”
“많이는 아니고요. 몇 번.. 부모님이 권하셔서 어쩔 수 없이 봤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셨고요?”
“아.. 그게 처음엔.. 이렇게 미인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사진도 대충 봤거든요. 요즘 회사일이 바빠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선은 생각 없었거든요. 마찬가지니까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되요.”
“얼굴도 예쁘신 분이 마음도 착하시고. 저는 오늘 나오길 참 잘한 것 같습니다.”
“과찬이세요.”
그가 커피잔을 들자 그녀도 커피잔을 들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한 모금 마셨다.
“도서관 일은 재미있으십니까?”
“네. 워낙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이들도 좋아하고요.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아이는 몇 명이나..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몇 명이나 낳고 싶으세요?”
“저요? 저야 뭐.. 제가 외동아들이라서 그런지 외롭더라고요. 최대한 낳을 수 있다면 많이 낳고 싶긴 하지만 제가 낳는 게 아니니까요.”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아영은 예의미소만 띄었다.
“아영씬, 몇 명을 낳고 싶으세요?”
“글세요. 저도 아이들을 좋아하니까요. 하지만 나이가..”
“아.. 그렇죠.”
한 참을 말하고 있는데 그가 잠시만이라고 말하고 잠깐 사라졌다. 아영은 불편한 자리에 한
숨을 내쉬며 커피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가 돌아와 “저녁 드시러 가시죠.” 라고 말하고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호텔 레스토
랑으로 갔다.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그가 대신 썰어주기 까지 했다. 예의는 바른데 어딘지 이
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눈동자가 생각보다 맑지 않았다. 예의바르게 행동하고는 있지만
어딘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그녀의 몸을 살피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먹고 여기에서 헤어져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고기를
씹고 있었다.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네? 왜요?”
“한 가지 더.. 확인 할 게 있어서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있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호텔방 열쇠를 꺼내들었다. 아영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잡혀 있는 그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힘주어 잡았다.
“뭘 확인하고 싶다는 거에요?”
“나이가 서른 다섯이면서.. 모른단 말입니까? 차도 마셨고, 밥도 먹으면서 겉모습이나, 생각하는 걸 알아냈으니 속궁합도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결혼생활에서 그게 제일 중요한 부분 아닙니까?”
그가 징그러운 미소를 짓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놓으세요. 전 선을 보러 온 거지, 그.. 그런 걸 확인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요즘은 선보는 것에 이런 것도 포함이 된다는 거 모르셨나봅니다.”
“부모님도 아세요? 선보러 간 자리에서 이러시는 거?”
“부모님이 아시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건 우리, 결혼할 사람들끼리만 알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뭐 그동안은 속궁합이 잘 맞는 상대를 못 찾았지만 오늘은 왠지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당신 몸이 내 취향이야..”
“됐어요. 난 당신이랑 같이 호텔방에 올라갈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이거 놓으시라고요!”
그녀가 그의 팔을 떼어내려고 소리를 지르며 팔을 흔들고, 그의 손을 잡았지만 그가 더욱 힘
주어 잡자 팔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그는 주위의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녀를 질질 끌 듯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영은 혹시 도와줄 사람이 없는지 주
위를 살폈지만 사람들이 수군거릴 뿐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이 울컥 올라오
며 입술을 깨물다가 이렇게 끌려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른 손을 들어 그를 때리기 시작했
다. 그러자 그가 손을 휘둘러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의 힘이 어찌나 센지 순간 귀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녀의 목이 아플정도로 얼굴이 돌아갔다. 그녀는 정신을 차려보려고
손을 들어 맞은 뺨을 잡고 눈을 깜박였다. 그 때 누군가 나타나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그 남
자의 팔을 내려쳤다. 그리고 그 남자와 싸우기 시작했다. 벽에 기대어 엎치락뒷치락하고 있는
두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호텔경비원들이 달려 나와 두 사람을 떼어냈다. 진호
는 그에게 맞아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정장재킷을 제대로 하고, 머리도 뒤로 쓸어넘겼
다.
“이 자식 경찰한테 넘겨. 여기 증거 자료 있으니까 함께 경찰한테 전해 줘. 언제든지 증인 진
술 할 수 있고, 절대로 합의를 볼 생각은 없다고 전해. 알았어?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내
가 누군지 알아? 내가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널 죽여버릴거야. 협박으로 들려? 경찰
한테도 그렇게 말해. 내가 협박했다고. 그래서 풀려나면 정말 죽여버릴 테니까. 알았어? 끌고
가.”
경비원들이 맞선남을 붙들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그렁그렁한 눈을 아래로 내리고 입술을 깨물었
다. 그가 고개를 내려 그녀의 발을 바라보니 언제 벗겨졌는지 구두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고
개를 돌려보니 끌려오면서 벗겨졌는지 두 개가 따로 떨어져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가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고는 그녀의 구두를 집어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 쪽 무
릎을 구부리고 앉아 그녀의 작은 발에 구두를 신겨 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가 그
녀의 손을 잡고 안에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녀가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그가 머
뭇거리듯 손을 뻗어 붉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뺨에 살짝 손가락을 댔다. 그의 턱의 근육이 단
단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괜찮아? 무서웠지.. 미안해.. 좀 더 일찍 당신을 보호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은 거야?”
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 놓고 손을 들어 그녀의 등과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최고층으로 올라간 그들
은 방안에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봉지에 담고 수건을 감싸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에 살며시 댔다. 차가운 것이 닿자 통증이 느껴져 그녀가 움찔했다. 그리고는 몸
을 살짝 움직이고 퉁퉁 부운 눈을 돌려 그가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뭘 이제 와서 내외하고 그래? 다 봤는데.. 이리 와봐.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진호가 얼음팩을 떼어내고 그녀의 턱을 살짝 쥐고 살펴보았다. 아영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그 남자의 반지에 긁혀 눈 아래 광대뼈 부근에 상채기가 나 있었다. 그의 눈썹이 꿈
틀거리며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가 꺼낸 구급약상자에서 소독약을 꺼내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미안해..하지만 살펴봐야겠어..”
그가 그 남자에게 잡혀있던 그녀의 팔을 살피려 했는데 소매가 어깨까지 올라가지 않자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영은 떨리는 손으로 앞의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손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하고 다시 시도한 끝에 겨우 한 개가 풀렸다. 그가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의 온기에 그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내 눈 좀 봐.”
아영이 퉁퉁 부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내가 당신의 원피스 단추를 풀 거야. 앞으로 세 개 더 풀어
서 오른쪽 팔을 소매에서 빼 낼거야. 그리고 상처는 없는지 살피고 다시 옷을 입혀줄게.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겠어?”
걱정으로 가득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더 긴장해
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몇 번 하고는 숨을 깊게 내쉬고는 그녀의 원피스 단추를 풀기 시작
했다. 최대한 그녀가 아무느낌을 느끼지 않도록 빠르고 정확한 동작으로 단추를 배꼽 있는데
까지 풀자 그녀의 속옷이 드러났다. 아영은 그가 있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
의 오른 팔에서 소매를 빼내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아후..”
아영은 그의 거친 한 숨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벌써 멍이 들어 검은색과
보라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가 그녀의 팔에서 시선을 돌렸다. 주먹을 쥔 그의 손
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아영은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멍이 든 곳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해요, 의사선생님?”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냉찜질부터 해야지. 잠깐만 기다려.”
그가 차가운 팩을 가져와 수건을 두르고 그녀의 팔을 감쌌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수건을 떼어내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조금 스며들때까지만 기다려 줘.”
그렇게 말한 그가 자신의 정장재킷을 덮어주어 그녀의 드러난 몸을 가려주었다. 그리고는 비
타민을 건네어 그녀가 먹게 했다. 그는 그녀 옆에 있지 않고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 밖을
바라보며 정장바지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그 사이 그녀는 얼음주머니를 눈 위에 올리고 소
파에 기대듯 누웠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 비참해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맞은 얼굴과 팔
을 욱씬거리고 아팠다. 하지만 가슴이 제일 아팠다. 그를 밀어내면서까지 한 선자리가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서른 일곱에 대기업다니고 서글서글한 남자가 다 저렇진 않아. 그런데 당신은 참.. 운이 없다.”
“그렇..네요.”
그녀가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다행히도 당신이 우리 호텔에서 선을 본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했지. 그 녀석은 처음부터 모
두 다 예약해 놓았어. 하지만 룸만은 다른 카드로 결제가 되어 있더라고. 모든 게 다 설명이
되더라고. 그래서 여기저기 카메라를 심어놓고, 녹화를 하기 시작했지. 그녀석이 화장실에서
친구와 통화하는 내용도 다 녹화되었어. 하지만.. 후회 해. 차라리 처음부터 당신이 못 오게
할걸. 오지 못하게 막을 걸.. 그랬으면 지금처럼 아파하는 당신을 보고 고통스럽진 않을테니
까.. 당신을 못 봤던 지난 시간이 나한테는 고통스러웠는데, 당신이 아픈 걸 보고 있는 지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네..”
아영은 그의 설명을 들으며 얼음주머니를 눈에서 떼어내고 몸을 일으키며 그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그에게 걸어갔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훌쩍이는 걸 보니 그가 울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다가가 그의 등에 손을 댔다. 그가 움찔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지 않고 긴장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아영은 천천히 다가가 그의 긴장한 등에 맞지 않은 볼을 댔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난.. 여기 어딘가에서 창문을 열고 저
기 아래로 떨어져서 죽었을지도 몰라요.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당신은.. 날 찾아내 줘서 고
마워요. 날 구하러 와줘서.. 고마워요. 아무것도 아닌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지만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주먹을 꼭 쥐었다. 그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은 그 이상은 만지거나 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모아 참아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를 밀어낼 자신이 없어졌다. 더 이상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힘도 없어졌다. 더 이상.. 그가 자신을 더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모
른 척 할 수 없었다. 아영은 천천히 그의 꼭 쥐고 있는 주먹을 잡았다.
“날.. 안아주면.. 좋겠는데..”
떨리는 그녀의 손을 그가 주먹을 펴고 깍지를 껴서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안았다. 부서지기라도 할까봐 꼭 안지 못하고 그저 팔만 둘러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그녀가
그의 등에 양 팔을 두르자 그의 재킷이 바닥에 떨어졌다. 더욱 힘을 주어 그를 안았다.
“겁이 나는데.. 당신을 다치게 할까봐..”
“설마.. 부러지기야 하겠어요?”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긴 가발을 한쪽으로 젖히고 옷이 없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녀의 향기를 코에, 자신의 폐에 가득 채우려는 듯
깊이 들이마셨다.
“아~~ 너무 보고 싶었어.. 아까 당신이 맞을 땐.. 내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 그 자식의 손
을 부러뜨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는데.. 당신의 팔을 보니까 부러뜨릴 걸 왜 참았나 싶어.”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그녀는 그의 결연한 표정과 목소리에 피식 힘없이 웃었다. 소파에 앉아 그녀를 자신의 무릎위
에 앉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피가 굳어 있는 그의 입술에 대었다.
“아프지 않아요?”
“꼴 사납게.. 한 대 맞았어.”
“멋있었어요.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난 왕자님처럼..”
“백마 아니야?”
“그게 중요해요? 그리고 난 흰말 탄 왕자보다 검은말을 탄 왕자가 더 멋지다고요.”
그녀가 떨리는 손가락을 내리자 그가 왼 손을 들어 차가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오른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
다. 입술이 닿으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멈추었다.
“자.. 잠깐만요.. 그 전에 할 말이 있어요.”
그가 끄응 소리를 내며 “무슨 말인지 몰라도 뽀뽀 한 번 하고 들으면 안 될까?” 라고 말했다.
“미안해요. 그 전에 들어야 해요.”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무릎위에서도 내려왔다. 연고가 어느 정도 스며든 것 같아 옷도 제대로 입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왜 그렇게 멀리 앉는 거야?”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이 이 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지금 여기에서 멈추는 게 맞아요.”
“무슨 얘긴데.. 난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무서워..”
그가 일어나 그녀 옆으로 오려고 하자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자신의 손을 마치 기도하듯 모으고 시선을 자신의 발끝으로 내리며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여자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과거? 누굴 만나, 어디까지 갔는냐.. 그 말이야?”
그녀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별로 상관없는데?”
“알았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몰랐으면 좋겠어요?”
“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래? 대학교때라던지.. 내가 모르는, 아니면 알고 있는 누구랑..”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건 아니에요.”
그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는 소리를 듣자 그녀는 마음에 벽돌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흠..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응? 뭐가?”
“내가.. 처..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요.”
그는 조용히 그녀가 설명을 더 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서.. 주로 혼자 놀았어요. 아빠, 엄마는 바쁘시고, 오빠는 어리다고 안 놀아주고.. 내가
혼자 있는 걸.. 알았나 봐요. 동네.. 얼굴을 알고 있는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는.. 지금도 그
동네에 살아요. 내가.. 무서워서 부모님한테.. 오빠한테.. 경찰한테.. 말 안 했거든요. 얼른 커
서 그 동네를 벗어나 그 사람을 안 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다행히.. 그 아저씨는 두 번은 손을
안 댔어요.”
그녀는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오늘의 충격도 만만치 않아서 였는지 눈물 없이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용한 그를 바라보려고 몇 번이나 머뭇거린 끝에 두려운
마음으로 눈을 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가 “그게.. 다야?” 라고 말했다. 그녀도 덩달아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 네.. 뭘 더 말해야 해요?”
“아... 미안. 그러니까 그 말은 어렸을 때 동네 아주 개만도 못한 놈한테 성폭행을 당했다는 뜻이잖아. 그래?”
그의 직설적인 표현에 아영의 얼굴이 붉어지고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그가 “내가 가까이 가도 돼?” 라고 물었다. 아영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
덕이자 그가 다가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얼굴
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지만, 오늘도 충분히 힘든 일을 겪었으니까 그냥 넘어갈게. 많이
힘들었지? 아무한테도 말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내가 싫지 않아요?”
“음.. 전혀~. 아마 당신이 16년 사랑이랑 어떻게 하룻밤을 지냈다면 아마 불같은 질투가 생겼
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신 잘못도 아니고, 미친 개한테 물린 사람한테는 병원에 데려가서 주사
맞게 하고, 약 발라주고, 치료해 주고 싶지. 그 이상의 감정은 못 느끼겠는데?”
“미친.. 개한테 물린 거랑.. 같은 거에요?”
“그렇지. 아! 혹시 동네아저씨라는 놈이 그 때 그 새끼 아니야? 설 명절에 내가 당신 집에 갔다가 만났던.. 맞지! 응?”
“네..”
“이런 미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느끼한 눈빛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리고 당신도 그날 이상했고.. 진작 말했으면 내가 가만히 안 뒀을 텐데.. 말을 하지~”
“그 때는 당신이랑 사귈 생각이 없었는데 그런 말을 뭐 하러 해요.”
“나는 그때도 당신이랑 사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야.. 혼자 착각한 거야?”
“착각이죠. 사귀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그래? 그렇게 이상했어? 그런데 왜 계속 만났어? 남자가 무섭고, 징그럽고, 싫었을 텐데.. 손을 잡거나 뽀뽀를 해도 그렇게 싫은 내색도 안 하고.. 내 옆에서 잠도 잘 자고.. 내가 남자같지 않았나봐. 그냥 이상한 생물체? 라고 생각한 건가?”
“훗.. 눈빛이요.”
“눈빛?”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끌어닿겨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동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줬어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
는데요. 어려서 그 일을 겪고 나서는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징그러웠거든요. 아까.. 그 남자도 그랬고.. 처음에는 햇빛이 안경에 반
사되서 눈이 잘 안 보였거든요. 저녁을 먹을 때..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얼른 먹고
헤어져야겠다고.. 그냥 중간에라도 일어났어야 했는데.. 잘못했나 봐요.”
“아니야. 잘 했어.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보호해 줄게. 걱정하지 마. 나한테 당신의 아픔을 말해줘서 고마워. 그 자식이 아니라 나한테 말해줘서 더 고맙고..”
“난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 그걸 이해하는 남자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렇대? 왜?”
“더.. 더럽다고 느껴져서..”
“그래?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겠지. 자신이 여자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순전한 숫총각이라
면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까? 여하튼.. 난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면서 여자에
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더군다나 당신같은 경우는 순결을 잃은
게 아니지. 빼앗긴 거지. 미친 놈한테..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난 지금도
여기가 이상하다고..”
그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어떻게 하지? 난 당신처럼 누구한테 빼앗긴 게 아닌데.. 내가 더럽다고 생각되어서 당신이
싫다고 하면.. 나도 당신을 보내줘야 맞는 건가? 난 그래도 당신이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는
데.. 앞으로 죽는 날까지 당신만 사랑할테니까.. 좀 봐달라고 애원해서라도 붙잡고 싶은데..”
“결혼은 안 한다고 할지도 몰라요.”
“아~ 또 그 소리.. 왜 안 해? 난 할 거야. 내가 이렇게 죽을 것처럼 가슴 아프게 사랑한 사람
은 당신이 처음이야. 진용이한테도 말해. 나한테도 당신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알았어?”
“풉.. 하지만 상처받는 게 두려워요. 나 때문에 당신이 가족들과 멀어지는 것도 싫고.. 날 반대하시는 분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도 힘들 것 같고..”
“난.. 나에게는 당신만 있으면 돼.”
“그게 안 좋은 거라고요. 봐요.. 벌써 호적에서 파라는 말이나 하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어요? 귀한 손주가, 아들이 연을 끊자고 말하는데.. 그건 당신이 잘못한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해. 할머니가 당신을 허락하실 리가 없는데..”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에요. 우리보다 오래 사실 분이 아닌데.. 마음 상하게 하면.. 당신은 마음이 편해요? 아니잖아요. 어린 사람들이 포기하는 게 맞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연애만 하자는 거야? 반대하는 어른들이 안 계실 때까지?”
“뭐.. 그렇게 하자고 해도 난 상관없어요.”
“그래?”
“네. 어차피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니까요.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아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말하려고 했어요. 괜히 결혼 후에 밝혀져서 마치 죄인처럼 살거나 이혼당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나랑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 자식하고는 안 하고 싶었고?”
“뭐..”
아영이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렇단 말이지.. 16년 사랑도 별거 아니구만! 하하하하..”
그가 가슴을 들썩이며 그녀를 더욱 안으며 웃었다. 그러다 그녀의 긴 머리를 귀뒤로 넘기고 그녀의 볼을 만졌다.
“오늘은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 안에서 지켜보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부모님께서 제대로 보라고 하셨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예쁘게 꾸밀 필요는 없잖아.”
“사실은..”
“응?”
“당신이 와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바랬어요. 드라마에서처럼 당신이 와서 훼방놓아주고 내 손을 잡고 나가주길.. 바랬어요. 당신이 왔을 때.. 예뻐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계획은 성공적이었어. 정말 숨막히게 예쁘다고 생각했어. 당장 끌고 나오고 싶었지만
당신 부모님의 얼굴도 있으니까.. 그렇게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았어. 쯧.. 그렇게 할 걸. 그랬으면 이렇게 아프고, 상처 나게 하지
않았을 텐데.. 평생 미안하게 생각할거야. 오늘의 내 행동을 말이야.”
“난 평생 감사하며 살 것 같은데요? 도대체 몇 번이나 내 생명을 구해주는 건지..”
“어느 정도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키스를 해도 화내거나 토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만큼?”
“.....”
“충격이었거든. 당신이 고통스럽게 구토하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더럽게 느껴져서 말이야.. 당신말처럼 쌩양아치가 된 것 같았어. 그래서 사실은 지금도 두려워.. 내가 당신을 지켜준다고 말 해 놓고, 오히려 상처를 주지는 않.. 읍!”
아영이 몸을 쭉 뻗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떼어냈다. 그리고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이 정도는 괜찮아요.. 깊은 키스는 잘 모르겠지만..” 이라고 말했다. 그가 손
을 뻗어 그녀의 볼을 감싸고 “알았어..” 라고 말하고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여러 번 맞추
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아~ 짧은 입맞춤에 이렇게 떨어보기는 처음이야.”
“미안해요. 다른 여자들처럼 진도를 못나가서..”
“됐어.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난 당신과 비교할만큼 대단한 여자들을 못 만났으니까.. 비교가 안 돼. 너무 예뻐서..”
“치~ 거짓말은..”
“어!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스카라가 제대로 된 걸 했네?”
“울 일이 또 생길 줄은 몰랐는데.. 결국은 그렇게 됐네요.”
“그거 알아? 당신은 눈이 정말 예뻐. 아기 같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자꾸만 생각하게 해.”
“자꾸 비행기 태워줘도 드릴 게 없네요.”
아영은 웃으며 그의 입술에 다시 짧은 입맞춤을 하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그의 재킷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가려고?”
“그럼요. 늦은 시간에 호텔방에 남자랑 단 둘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당신이 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사실은 그렇게 생각은 해. 사랑하니까 당신을 안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사랑도 하고 싶고.. 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도 결국은 하게 될 테지만 지금은 참을 수 있다는 뜻이야. 가자고.. 집까지 데려다줄게.”
스위트룸을 나오면서 아영은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어요?”
“응?”
“여기가 당신 호텔이라고.. 그렇다면 오늘 일이 당신 가족 분들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당신은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후에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자면 되는 거야. 알았어?”
“하지만..”
“쯧.. 내가 당신 만나기 전에 양아치처럼 살아서 이런 일에 크게 반응하지 않아.”
아영이 피식 웃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가 1층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나비등도 다시 달아줄게. 그건 왜 보내고 말이야.”
“당신 어머님 유품이잖아요. 앞으로 안 볼 사이인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뿐이었어. 우리 엄마가 하는 일을 소중하고, 멋지다고 생각해 주는 사람. 살아계셨다면 분명히 당신을 좋아하셨을 거야.”
“그러셨을까요?”
“응.”
그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의 손의 온기가 좋아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서.. 당신이 의사라서 환자들은 좋겠어요.”
그가 그녀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영도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니..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누구한테요?”
“우리 엄마랑.. 내 생명을 한 번 구해준 여자..”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여자가 있어요?”
“응.”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아영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취소할래요. 나도 당신 환자였던 적이 있잖아요. 당신이 의사여서 좋았던 적이 없었어요. 한 번도요.”
아영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만들고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소리내서 웃기 시작했다.
“어~어? 왜 웃어요?”
“귀여워서.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왜 안 돼? 날 사랑하는데 당연히 질투를 해야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알았어.. 아니라고 해 둘게.”
그가 그녀를 안으려고 하자 그녀가 살짝 밀었다.
“사람들이 언제 탈지도 모르는데 그냥 손만 잡고 있어요. 난 사람들 많은데서 안고 있거나 입을 맞춘다거나..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교회에 다녀야겠다. 이건 뭐.. 신앙심으로 버티지 않으면 어렵겠는데?”
“훗...”
그의 차를 타고 가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엄마. 아니에요. 안 다쳤어요. 정말요. 아.. 거기 호텔에서 지배인인가 하시는 분이
말려주셔서 괜찮았어요. 엄마가 왜.. 모르셨잖아요.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엄마 때문이라고
절대로 생각 안하니까.. 네.. 네.. 대신 약속은 지켜주셔야 해요. 다신 결혼 얘기, 아기 얘기는
꺼내시지 않는 거에요. 네.. 아니 집이에요. 이제 자려고요. 네. 네.. 네.. 주무세요. 네..”
아영이 한숨을 내쉬며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호텔지배인인가 하는 분인거야?”
“아.. 그게..”
“아니.. 내가 부끄러워? 왜 숨겨?”
“그럼 뭐라고 해요. 미안하다면서 우시는 분한테..”
“뭘 뭐라고 해,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구해줬다고 하면 되는 거지.”
“이제까지 아무 말도 안했는데 갑자기요? 그리고 당신에 대해 아시게 되면 또 시작될지도 모른다고요.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데 왜 결혼을 안 하느냐.. 네 나이가 몇 살인데 미루느냐.. 싫어요. 당분간은 조용히 있고 싶어요.”
“난 말하려고 했는데? 우리 가족들한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
“불안해 할 필요 없어.”
“미안해요.”
“그 말은 그만 해. 당신이 미안해 하면 나도 미안하다고 해야하잖아. 우린 그냥 사랑한다고 만 말하면 되는 거야. 알았어?”
“네.”
그가 그녀의 현관문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무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푹 자. 알았지? 걱정되니까 내일도 보러올게. 잘자~ 사랑해..”
“조심해서 가세요. 푹 자고.. 내일 만나요.”
“.....”
“?”
“뭐야~”
“훗.. 사랑해요.”
홍조가 오른 얼굴로 수줍게 말하는 아영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내일부터는 이거 하지 마. 당신 머리도 아니고, 예쁘긴 한데 난 당신의 짧은 머리도 마음에 들거든. 알았지?”
“알았어요.”
아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등을 현관문에 대고 가만히 서 있는데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서 가요. 밤 세울 생각이에요?”
“나도 알고 있는데.. 발이 잘 안 떨어지네. 그럼 갈게.”
“네.”
그의 구두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도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고 그가 차에 오르기 전에 그녀
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손을 들어 크게 인사를 했다. 그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차에 올라 출발했다.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아영은 창문을 잠그고 욕실로
들어갔다. 얼굴상태는 아까보단 나아진 것 같았지만 팔뚝은 더 검게 변해서 이상하게 보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진한 화장을 지우고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
영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헤어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에 그의
전화가 부재중통화로 들어와 있었고,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줘서 고마워. 내 남은 생애
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안겨줘서 고마워. 부디 나쁜 생각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행복할 날들만 상상하며 행복하게 자길 바래. 사랑해요.>
아영은 행복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에 핸드폰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잠이 들었다.
<내 생명의 은인이 당신이어서 행복해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나도.. 사랑해요.>
첫댓글 아영이가 이제는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네요
비온뒤에 땅이 굳는다고 아영이한테는 나쁜일이지만 진호랑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된것 같아 다행이에요
두 사람의 알콩달콩이 기대되요ㅋㅋㅋ
열심히 재밋게 읽고있다는 댓글을 오늘에야 남기네요~^^*
아영과 진호의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도 좋고
그들을 중심으로 나오는 주위사람들의 스토리도 다좋네요..
상처를 참 따뜻하면서도 공감할수있게 이끌어내시는 작가님도 좋고 ㅋㅋㅋㅋ
암튼 끝까지 함께 할께요!!! 성실연재감사!!!!
매일아침 인소닷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Daily로의 초대를 찾게 됩니다. 잔잔하면서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너무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영이의 상처를 꼭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뉴스를 보면서 너무 가슴아팠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소재가 괜찮을까 고민도 했었습니다만.. ^^ 그래도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추진했네요.. 좋게 봐주시고,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에 소소한 행복을 느껴요
작가님 힘내세요
끝까지 최선을 다해볼랍니다. 완결까지 마음에 드셔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작가님 꾸준히 연재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늘 기대하겠습니다. 파이팅!
네.. 오늘도 세편입니다. 즐겁게 읽어 주세요..^^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느낌.
참 오랜만이에요.
모두들 그럴거예요.
오래갈것같어요.힘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