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워 준 느티나무
어느 늦은 봄날 퇴근길이었다. 반포천 옆길을 걷는데, 물가를 따라 가지를 길게 드리운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둣빛 잎들을 바라보는 순간, 오래전 속리골의 그 느티나무가 떠올랐다. 숨바꼭질을 하며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나와 친구들의 모습도 함께.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추억이라는 길을 걷는다고 한다. 나에게는 느티나무가 바로 그 길이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다시 어린 시절 속리골로 돌아간다.
나는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3학년까지 고향 속리골에서 살았다.
아랫집 길호네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얼마나 컸던지 우리들 서너 명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무기둥에는 누군가 오래전에 박아 놓은 큰못 하나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못을 디딤돌 삼아 거대한 나무 위로 오르곤 했다.
느티나무는 커다란 줄기가 늘어져 땅에 거의 닿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나무에 올라 길게 뻗은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어린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스릴 넘치고 신나는 미끄럼 놀이였다.
한여름이면 느티나무는 왕매미 울음소리로 가득 찬 시원한 오케스트라 홀이 되었다. 온 마을이 푸른 여름 속에 잠긴 듯한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나뭇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고,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둥지를 틀었다. 그 느티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었다. 우리의 숨바꼭질 영토였고, 땀을 식혀주던 쉼터이자, 유년의 꿈을 품어주던 커다란 품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사십 대가 되어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간 그 자리엔 느티나무 대신 베어진 그루터기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쓸쓸했다. 단순히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 푸른 그늘 아래서 뛰놀던 우리들의 웃음소리와, 반짝이던 시간 한 조각이 통째로 잘려 나간 듯했다.
하지만 오늘 퇴근길에 마주한 또 다른 느티나무를 보며 나는 깨닫는다.
고향의 나무는 베어졌어도, 길게 뻗은 가지, 시원한 그늘, 매미 소리, 그리고 친구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까지. 그 푸른 기억만큼은 내 마음속 느티나무 아래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어쩌면 그 느티나무는... 단순히 한 그루 나무가 아니라,
어린 나를 키워 준 또 하나의 따뜻한 고향이었다.
첫댓글 속리산 아래서 어린시절을 보낸 고든님.추억이 아주 새롭겠습니다. 청주서 초등학교 교장을 한 큰처남이 퇴직후 위암.식도암수술을 받고 속리산 문화주택으로 이사하여 17년간 투병생활하다 2년전 별세했죠. 그동안 문병차 속리산을 엄청 다녔지요.
수술 후 5년이면 완치라고 하는데 열심히 투병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안타깝습니다. 감사합니다.
속리골 느티나무가,
고든님의 어린시절과 함께 합니다.
기어오르고
가지를 타고 내리고
함께 했던 친구
해맑은 웃음들...
지금쯤이면
푸른잎 무성하여 반짝이고 있을텐데요.
이은상 시 '옛동산에 올라'를 읊어 봅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이부분이 흥얼거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지나가고 사라진 것들은 그 자리에만 없지, 함께한 모든 이의 기억 속에 각기 다른 모습들로 자리잡고 있더군요.
그렇게 우리들이 자랐었지요.
저는 도시 변두리에서 자라 느티나무는 가까이 없었고, 아이들 웃음소리로 꽉 차던 골목이 느티나무 대신이었습니다.
그렇지요? 각자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겠지요~ 고맙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만큼
큰 나무가 시댁 앞 마당 건너에
있었는데
언젠가 보았더니
링거를 맞고 있었습니다.
당산나무라 했었는데
모양이 사진의 느티나무랑
같아 보여서 옛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으시군요. 싱그러운 계절입니다. 건강하세요~
품이 커다란 어른 나무,
할배가 맞겠습니다.
키워준 나무가 맞네요.
읽으면서 좀 울컥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울컥...
생각나는 사연이 있으신가?
감사합니다.
느티나무 한 그루가
어린 시절의 놀이터이자 쉼터이고,
또 하나의 고향이었네요.
나무는 베어져 사라졌지만
그 그늘 아래 뛰놀던 웃음소리와
매미 소리까지는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린 나를 키워 준 따뜻한 고향”이라는 말이
오래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인님.
고든님의 나무는 느티나무 였네요.
저는 어렷을때 담장옆에 미류나무를 심었어요.
심었다기 보다 곶아 놓은것이었지요 .
굵게 자리는것을 보다가 그 집에서 이사를 하고
다시는 가 보질 못했는데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
저는 고든님이 느티나무를 닮았다고 느껴집니다 .
어렸을 때 버스를 타고 누나네집을 가든가 하면 버스 다니는 길가에 쭉 쭉 뻗은 미류나무가 많이 있었지요.
님이 심은 미류나무 잘 자라고 있길 바랍니다.
제가 미류나무 같다고 하니 기분 좋습니다.
@고든 아니요 .
느티나무를 닮은것 같다고 했어요 .ㅎㅎ
@아녜스 마법이네. 분명히 느티나무로 적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