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청부살인
최 부장이 나가고 난 후 뒤따라 호텔을 나온 순범의 머리는 무거
울 대로 무거워져 있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전혀 판
단이 서지 않았다.
순범은 시경의 기자실로 출근했다. 헌데 평소 보이던 각 언론사
의 조장급 기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없던 일이라 순범은 마침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른 신문의
후배 기자에게 물어보았다.
다들 해장술이나 마시러 간 건가? 왜 이렇게 아무도 없어?
아니 권 선배 모르고 있었어요?
무얼?
모두 현장에들 나갔어요.
현장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났단 말인가?
조직폭력배의 두목이 형무소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오늘 새벽 발
생했어요.
뭐라고, 형무소에서 살해당해?
그래요. 저는 여기서 속보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중인데 아무
래도 본사로 직접 날아갈 것 같아요.
무슨 형무손데?
청주교도소요.
순간 순범의 머리는 망치로 거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울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후배 기자의 어깨를 거머잡으며 내뱉듯이 물었다.
이름이 뭐야?
이름은 박 뭐랬는데 하여간 잔나비파 두목이란 것 같았어요.
후배 기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순범은 전화기를 들었다. 검
찰청의 최 검사를 찾았으나 그는 부재중이었다. 전화를 끊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보려는데 막 걸려오는 전화를 후배 기자가 넘겨줬다,
최 부장이었다.
권 기자, 나요. 얘기들었소?
지금 막 전화를 하고 있는 참입니다.
나는 지금 막 인터체인지로 들어서고 있소. 청주로 내려가는 길
인데 권 기자도 바로 내려오시오.
알았습니다.
순범은 전화를 끊고는 바로 뛰어나가려다 말고 다시 한 군데 전
화를 했다.
박준기 형사 바러줘요.
조금 있다 상대가 나오자 순범은 숨넘어가는 소리로 외쳐댔다.
여느 때 같으면 한마디 변죽이라도 울렸을 개코는 역시 베테랑답게
순범의 목소리만 듣고도 비상상황임을 알아차렸다. 순범도 이것저
것 얘기할 새도 없이 경찰서 정문 앞에 나와 있으란 말만 던지고는
바로 주차장으로 뛰었다.
박성길이가 피살되었다고? 그것도 교도소 안에서? 아니 그럴수가 있는 거야?
그렇대. 최 부장도 지금 내려가고 있는 중이야.
세상에 ! 형사생활 십칠 년에 폭력단 두목이 교도소에서 피살되는 경우는
처음보네. 근데 도대체 어떤 놈들 소행이란 말이야?
알 수 없지. 내려가봐야 뭐라도 알 수 있겠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순범의 머리는 도대체 누구의 소행일까하
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의 우발적 사고일까 아
니면 박성길에게 원한이 있는 다른 조직의 보복일까? 그것도 아니
면 이 박사 사건에 대한 입막음으로 누군가가 살해한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떠올랐다. 일단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전조등을 켜고 비상등을 깜빡
이며 무서운 속도로 내닫는 순범의 차를 보고 다들 길을 비켜줬다.
그러나 워낙 오래된 차라 최고 속도로 달리자 금방 엔진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속도를 조금 줄이지 그래.
옆좌석에서 근심스레 계기판을 보고 있던 개코가 한마디했다. 불
안한 모양이었다. 순범이 조금 속도를 줄이자 옆으로 비켜 섰던 다
른 차들이 곧 순범의 차를 추월했다. 추월하면서 다들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달리지도 못하는 차를 가지고 웬 소란을 떠
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았다,
순범의 차가 청주교도소 정문에 도착했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
었고 교위를 조장으로 한 교도대원들이 철문 앞에 늘어서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수고 많군. 책임자 오라고해.
일견 간간한 성격으로 보이는 의경은 순범의 당당한 태도에 약간
기가 죽는 듯했으나 이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신분증 제시야
말로 근무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사람을 판별하는 유일한 근
거였다.
철문 앞에서 차를 제지당하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은 순범은 갑
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책임자 오라고 했잖아. 우린 서울시경 감식전문가들이야. 퉤진
놈 피가 마르기 전에 빨리 혈청검사를 해야 한단 말이야. 사정사
정해서 없는 시간에 내려왔더니, 왜 이렇게 귀찮게 해, 금방 봐주
고 빨리 올라가야 한단 말이야.
이때 개코가 옆에 있다가 슬며시 경찰신분증을 내보이고는 다시
집써넣었다.
서울시경 감식전문가들이라고 합니다. 신분증은 확인했습니다.
바쁘다고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내려와 달라고 사정해서 왔는데
금방 다시 올라가야 한답니다.
통과시켜.
현장은 이미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정황이 너무도 분명한 사
건이라 감식을 한다든지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순범은 잠시 형
사로 행세하며 눈에 띄는 교도관들에게 상황에 대해 필요한 질문을
해서 몇 마디 듣고는 바로 교도소장실로 갔다.
소장은 풀이 죽은 얼굴로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고 그 앞의 소파
에는 최 부장이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질문을 하고 있다가 순범을
보자 반색을 했다,
권 기자, 어서 오시오. 이리 앉으시오.
일料 도착한 모양이군요. 여기는 박준기 형사입니다.
박 형사, 얘기는 들었소. 같이 앉으시오.
어떻게 된 사건입니까?
나보다 여기 이 목격자들에게 듣는 것이 낫겠지. 자, 다시 처음부터
설명을 해보시오.
최 부장의 지목을 받은 교도관은 잔뜩 주눅 든 표정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건의 자초지정을 털어놓았다.
아침 기상나팔이 울림과 거의 동시에 5사 7방에서 복역수들의
고함이 들려 뛰어가보니, 이미 박성길은 엎어져 있었고, 강두칠이
박성길을 올라타고 미친 듯이 박성길의 숨골을 찔러대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뛰어온 동료들과 함께 문을 열고 강두칠을 붙잡
았습니다. 강두칠은 끌려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고 박성
길을 찔러대길래 제가 발로 차서 쓰러뜨렸숱니다. 박성길을 뒤집
어보니 이미 죽어 있었어요.
설명은 아주 간단했다. 이어서 같은 방에서 복역하던 사십대 남
자가 최 부장의 눈짓을 받고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진술했다,
기상시간이 되어 눈을 뜨고 있었죠. 이때 평소에는 맨 늦게 일
어나던 빨간명찰이 옆에서 부시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요. 저는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농담이라도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 며칠 간
그놈이 지독한 저기압인 것을 생각하고 그냥 있었어요.
근데 이놈이 박 사장님 쪽으로 걸어가더니 손에 들고 있던 흉기로
곤히 자고 있는 박 사장님의 목을 확 찔러버려요. 외마디 비명소리가
꼭 하고 들렸는데 이놈이 그 다음부터는 목과 숨골만 죽어라고 내려찍더군요.
어찌나 기세가 살벌한지 깬 사람들이 고함만쳐댔을 뿐 감히 말리지 못했어요.
평소에 두 사람의 사이는 어땠나요?
별 문제 없었어요. 빨간명찰은 늘 조용하게 지내는 편이었습니다.
박 사장님은 여기서 왕놀음 했죠. 이 방에서 뿐만 아니라 이 빵간 전체에서 왕이죠.
우리 방은 참 재미있었어요. 평소 싸움 한번 안 나고, 박 사장님한테
들어오는 거 많아서 다들 사이좋게 나눠 먹고, 옛날에 잘 나가던 얘기들 해가면서
참 재미있게들 지냈어요. 빨간명찰도 박 사장님에게는 고분고분했고,
또 박 사장님도 빨간명 찰에게는 사형수 대우를 해줬어요. 처음 박사장님이
들어왔을 때 약간 충돌이 있을 뻔했으나 박 사장님이 사고 안 나게 하면서도
멋있게 휘어잡더군요. 빨간명찰도 나중에는 형님, 형님하며
박 사장님을 따랐지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어요.
평소 박성길이가 하던 얘기 중에 뭐 특별한 것은 없었나요?
늘 가벼운 얘기만 하곤 했어요. 누군가가 옛날 주먹 쓰던 얘기를
해달라고 하면 몹시 싫어했어요. 박 사장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고들 얘기하더군요.
강두칠의 죄목은 무엇입니까?
순범은 서류철을 가지고 옆에 앉아 있는 당직 계장에게 물었다.
존속살해입니다.
누구를 살해했습니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어머니는 있습니까?
예, 어머니와 동생 셋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면회온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처남이 온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 왔었습니까?
그저께 오후에 왔었습니다.
대화내용 중에 특이한 것이 있었습니까?
별다른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박성길의 면회 상황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좀 오는 편이었는데 박성길이가 오는 사람마다 앞으로는
오지 말라고 꾸짖듯이 얘기하곤 했습니다.
무슨 서신 연락 같은 것도 하지 않았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흉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칫솔을 갈아서 뾰족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순범은 다시 동료 복역수에게 물었다.
강두칠은 언제부터 이 뽀족한 칫솔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보통 때는 가지고 있지 않던 물건이었는데 그저께 저녁부터 갈기 시작했습니다.
사형수에 대해서는 무슨 일을 하던 일체 간섭도 아는 체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보고만 있었습니다. 박 사장님이, 두칠이 너 머땀시 그라냐라고 하자,
이놈이 싱긋이 웃으면서, 심심해서요라고 대답한 것이, 요 며칠 새
그놈이 한 말의 전부였어요. 박 사장님인들 그놈의 칫솔에 찔려 죽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박성길이 평소 감방에서 처신을 잘했는지 동료 복역수는 박성길을
무척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평소 부르던 것이 습관이 됐는지
이 사람은 죽은 박성길에게도 꼭 (님)자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순범도 박성길을 만나는 동안 꽤 정이 든 것 같았다. 예전에는 어땐는지 몰라도
근래에 순범이 만날 때에는, 이 박사를 살해한 것에 대하여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박성길이었다. 순범은 거의 울먹이다시피 범인을 잡아달라고 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쓰려왔다.
이 박사의 일로 인하여 마음이 크게 상해 있지 않았다면 상대가
아무리 표독하게 달려들었다고 해도 칫솔 따위에 젤려 죽을 박성길
은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의 삶을 거의 포기한 상태로 지내
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와 하며 문이 열리더니 대여섯 명의 형사가 강두칠을
데리고 들어왔다. 최 부장이 연락을 해서 일단 청주경찰서로 압송
되어 갔던 강두칠을 다시 데려온 모양이었다. 수갑이 채이고 포승
으로 꽁롱 묶였으나, 강두칠은 들어오면서부터 악을 쓰며 욕을 하
고 이리저리 몸부림을 쳐댔다. 어차피 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중이
라 그런지 그는 조금도 겁먹거나 질리지 않고 방안에 있는 모든 사
람을 향해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뱉어댔다.
도저히 못 봐주겠는지 최 부장이 갑자기 일어나 강두칠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강력부와 특수부를 돌며 많은 폭력두목들과 아웅
다웅하는 사이, 원한도 생기고 정도 든 그에게 박성길의 피살은 충
격적이었을 것이었다, 料다가 살인범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꼴을 부하직원들처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룻이었을 거였다.
불시에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강두칠이 섬뜩한 눈길로 최 부장을
노려보자, 이번에는 담당간수가 일어나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쳐
서 쓰러뜨렸다. 강두칠은 터진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오자 혓바닥으
로 껏으면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땅바닥에 피섞인 침을 뱉고는 독
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 죽여라, 이 씨팔새끼들아. 저승에 갈때 그냥갈줄아냐?
이 말을 듣고 형사들 중 하나가 강두칠의 머리카락을 뒤에서 움
켜잡으며 목을 제끼고는 주먹으로 내려치려는 찰나, 최 부장과 순
범이 거의 동시에 만류를 했다. 형사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떤
서 최 부장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영감님, 이런 짐승 같은 놈을 구태여 교수형을 시킬 필요가 있
습니까? 이 자리에서 때려 죽이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형사는 마음으로부터 울분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최 부장을 향한 태도는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순범은 권력의 힘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개코를 슬쩍 돌아봤더니 개코도 빙긋
웃었다.
강두칠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독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어차
피 죽을 목숨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두려울 것이란 없는 듯했다.
강두칠의 독기어린 발악을 지켜보던 순범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최 부장에게 눈짓을 해보이고는 강두칠을 사람들과 몇 발자국 떨어
진 곳으로 데려갔다, 순범이 강두칠의 귀에다 대고 몇 마디 속삭이
자, 강두칠은 거짓말처럼 온순해졌다. 순범은 개코를 쳐다보며, 한
번 씩 웃더니 최 부장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다시 연락드리죠.
왜? 지금 올라가려고?
가면서 박성길의 방에 잠시 들렀다 가면 됩니다, 사물을 한 번
보고 가려고요.
이때 당직 계장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박성길의 사물은 다 여기에 가져왔습니다. 별다른 것은 없던데
요
당직 계장이 가리키는 책상 위에는 책이며 몇 가지 물건과 수건,
칫솔, 치약, 비누 등의 사소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레지
않고 다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순범이 이것저것 살펴봐도 별로 특
별한 것은 없었다. 소설책 몇 권과 며칠 전 것으로 보이는 신문 한
장 그리고 염주와 내의 몇 벌이 고작이었다, 박성길은 의외로 검소
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개코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순범의 곁에 앉아
일체 말이 없었다, 순범도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고 있었다, 개코
는 순범이 숨넘어가듯 서둘러 청주로 내려오면서 그 바쁜 중에도
자신을 불러준 데 대하여 매우 흐뭇했었다. 뭇 촌형사들의 존경어
린 눈길 속에서 노련한 서을 강력계 베테랑의 솜씨를 과시하며, 전
국구 폭력배인 박성길이 사건은 나 같은 사람이 다루는 것이란 걸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내려와보니 자신의 할 일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민생합수부장인 최영수 부장검사가 있어 의견 한마디 제시
할 상황이 되지 않았던 것이 못내 떨떠름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경찰도 아닌 기자신분의 순범이 최 부장의 암중 지원으로 마
치 수사관처럼 혼자 설치며 관계자들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것에 비
위가 상할 대로 상해버렸던 것이다. 전부를 양보하여 이것까지 받
아들인다 하더라도 마치 수사관처럼 혼자 설친 순범이 한 조사의
전부라는 것이, 말 몇 마디 물어보고 사물 한 번 훌터보고 범행을
저지른 강두칠에게는, 아예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은 채 귓속말 한
마디 하고는 획 나와버린 것이었다,
십칠 년간의 형사생활을 거쳐 개코가 체득한 살인사건의 수사라
는 것은, 우선 살인범을 독방에 잡아넣고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팬 다음, 점잖고 인정있어 보이는 형사가 들어가 피도 닦아주고 담
배도 권하고 설렁탕도 한 그룻 시켜주면서, 많이 괴롭지. 언제든 마
음 편할 때 내게 얘기해, 나는 자네 마음 다 이해해라고 해야 되는
것이었다. 좀 독한 놈일 경우에는 이런 과정을 한두 번 더 반복하면
되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저 권 기자의 하는 꼴이란, 문자
그대로 개코의 눈에는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잔뜩 부어 올라가던 개코는,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맹탕 같은 권 기자가 그토록 사납게 날뛰던 강두칠
을 어떻게 해서 귓속말 한마디로 조용히 잠재웠을까 하는 것이었
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강두칠은, 무섭게 두
들겨 맞아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어야 겨우 조용해질 것으로 보
였는데, 도대체 귀에 대고 무슨 아양을 떨었기에 순한 양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매우 궁금한 것이었다,
이봐, 수사반장.
개코는 순범을 비아냥조로 불렀다. 개코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남의 의견을 솔직히 구
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래?
수사결과가 어때?
지금 생각중이야.
조사한 거나 뭐 있다고 생각중이야? 생각중이긴?
별로 많이 조사할 것은 없는 일이잖아, 단 한 가지의 핵심적인
것 외에는,,,,,,.
단 한 가지의 핵심적인 것行
그렇지. 누가 사주했느냐는 것.
그래 그것을 알아냈어?
지금 생각중이라고 그랬랴아.
개코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이 친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는데 이 친구는 무
엇을 저리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아까 그 살인범 말이야, 권 기자가 뭐라고 했기에 갑자기 그럴
게 수그러들었지?
뭐라고 했을 것 같아?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그게 다 관련이 있는 얘기야. 그 친구는 마음이 무척 괴로운 상태라
일부러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이었어. 실컷 두들겨 맞기라도
하고 싶었던 거지, 그 이유란 게 뭐겠어?
난 아무 판단도 서지 않는데.
그는 박성길하고 아무런 원한도 없었던 거야. 오히려 어떤 면에
서는 좋아하기도 했을 것 같아. 어쨌거나 아무런 원한도 없는 박
성길을 죽이고는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르고 매라도 맞고 싶었던
거지.
강두칠이가 다른 폭력조직의 일원이었을 가능성도 많지 않겠
어? 아무래도 박성길의 죽음을 보는데 있어서, 폭력조직간의 원
한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어?
강두칠은 조직폭력배가 아니야. 그의 죄명은 존속살해니까. 조
직폭력배는 아예 부모를 잊어버리지 부모 때문에 괴로워하다 살
해하거나 하진 않아. 강두칠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에 결국
은 아버지를 살해했던 거야. 다른 가족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다고 생각했겠지.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나行
어머니와 누이가 가끔 면회를 온다지 않아? 패륜아 같으면 아무
도 면회를 오지 않지.
그렇다면 자네의 결론은?
물론 청부살인이지. 아까 내가 강두칠의 귀에다 대고 한 말은
당신 처지를 가엾게 여겨 가족에게 넘어간 돈에 대하여는 모른
체 해줄 테니 조용히 하라고 했지. 그렇지 않으면 그 돈을 압수하
겠다고 했어.
귀신이구먼 ?
개코는 진정 탄복하고 있었다. 이 권 기자라는 자는 얼마나 머리
가 빠른 자인가?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이런 사정을 모두 꿰뚫을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비하면 후려 패고 설렁탕 사주는 식의 수사
방법은 얼마나 한심한 방법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개코는 민망할
뿐이었다.
권 기자 미안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권 기자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
거든. 이제 보니 모두 내가 못난 탓이잖아.
원, 사람도 참. 왜 그렇게 싱거워.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어.
뭔데卜
왜 박성길을 죽였을까 하는 거야.
누가 죽였는데?
누가 죽였든 앞으로 십오 년을 교도소에 있어야 하는 박성길을
죽일 이유라는 것이 있을 수 없잖아.
그렇군, 교도소에 있는 사람을 청부까지 해가면서 죽인다는 것
은 이상한 일이군.
아까부터 그것을 생각하고 있던 중인데 아무래도 나의 생각으로
는 이 박사를 죽인 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원한이 있다고 해서 장장 십오 년이나 교도소에서 썩을 사람을
청부해서 죽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 점은 이 박사를 죽인 자들도 마찬가지야. 박성길이 형무소에
서 이 박사에 대하여 떠벌린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박성길이
자신이 그들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박성길을 죽
일 필요는 전혀 없잖아.
강두칠을 면회왔다는 그 처남이라는 자를 만나봐야 할 것 같지 않아?
물론 그 자가 키를 쥐고 있지. 그러나 그 자는 없는 자야.
없는 자라니?
만날 수 없는 자란 뜻이지.
강두칠의 처남이랬잖아.
오늘은 우리 개코가 감기라도 걸렸나봐. 통 냄새를 못 맡으니.
이봐, 교도소에 면회를 하려면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면회가 안된다는 규정이 있잖아. 그럼 친구나 일 관계로 면회가는 사람들이
늘 써먹는 촌수가 뭐야? 친척이긴 친척인데 성이 다른 만만한 친척이 뭐 있어?
처남 아냐, 처남. 그렇담 이 처남이란 자도 가짜가 분명하단 얘기지.
그런건 검찰에서 조사할테니까 우리는 나중에 결과나 보자구.
진짜 처남일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대화를 끝내면서도 순범의 머리 속은 이 박사를 죽인 자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교도소 안의 박성길을 죽였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코를 종로경찰서 앞에 내려주고 시경으로 돌아오자 바로 최 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최 부장은 오후에 청주를 출발할 거라면서 저녁에 리버사이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회사에 보낼기사를 작성하여 후배 기자에게 넘겨주고
순범은 최 부장을 만나러갔다.
살인을 청부한 놈들은 이 박사를 살해한 놈들과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아.
다른 원한관계 같은 것은 드러나는 게 없더군.
게다가 원한관계 같은 걸로 형무소에서 십오 년이나 살 사람을
청부살해하는 경우는 없어. 그리고 조사해보니 강두칠에겐 처남은 없더구먼.
그러니 처남이라고 면회하고 갔던 놈이 사건을 청부한 놈임에 분명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았어요?
강두칠이가 얘기한 거요.
쉽게 얘기해요?
권 기자가 귀에다 대고 몇 마디 한 후로는 아주 고분고분해. 그런데 도대체
뭐라고 한 거요?
최 부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법대로 처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을 뿐인데.
그래서 그렇게 겁을 집어먹었나.
그런데 어째서 형무소에 있는 박성길을 굳이 죽이려 했을까요?
글쎄, 비밀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했겠지. 그러나 박성길은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는데 형무소에 있는 박성길이가 정체를 캐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박성길이가 나와 권 기자 말고는 아무에게도 이 박사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도 없단 말이오. 나도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 권 기자와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어요. 혹시 권 기자가 누구에게라도 얘기한 건
아니겠지?
순간 순범의 뇌리에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그 여자 말고는 아무에게도 박성길에 대한 얘기를 한적이 없지 않은가?
물론 개코는 예외로 치더라도,,,,,,
순범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신윤미였다. 이 박사의 죽음을 그리도 슬퍼하며
이 박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윤미에게, 박성길의 고백을
얘기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단 말인가? 순범은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자신이 판단하는 한 신윤미는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박성길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윤미 말고는 의심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혹시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순범이 약간 멈칫 하는 것을 본 최 부장이 다시 물었다.
왜, 누구 얘기한 사람이라도 있단 말이오?
아, 아니. 아니오. 얘기한 사람은 없어요.
거참 이상한 일이군. 아무에게도 얘기를 안 했다면 어째서 박성길이
노출되었을까?
최 부장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순범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가 지워지곤 했다 이치로 봐서는 박성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신윤미를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만 순범은 자신의 눈도 믿고 싶었다.
(그 여자 조심하시오. 세상에는 구미호라는 게 있다지 않소?)
최 부장은 까닭없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윤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어쩌면 자신을 눈먼 장님으로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순범은 차에서 내려 삼원각의 다이얼을 돌렸다. 윤미를 찾아 시내로 급히 나오라고
얘기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자신이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윤미에 대한 미움이
가슴속으로부터 꿈틀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제 오셨어요?
생각에 잠겨 있는 순범의 앞에서 윤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윤미의 얼굴이 발그스레 했다. 이미 술을 마신듯한 얼굴이었다.
순간 순범의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던 미움의 감정이 고개를 쳐드는 듯했다.
술을 마신 모양이군...?
약간, 일찍 오신 손님이 있어서요.
손님이 오면 항상 술을 마시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윤미는 무엇인가 평소와는 다른 기분을 느꼈는지 대답을 흐리며
순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이 여자는 술집의 마담에 불과한 여자이다, 손님이 오면 술을 마시고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짓는,,,,,,. 이런 여자에게 내가 사랑을 느끼고
범죄까지 덮어주려고 노심초사한다는 것은, 환상이요 착각이다.
이런 여자를 위해 내가 박성길의 얘기를 해주고, 이 박사의 죽음을
파헤치려는 최 부장을 속였단 말인가?)
박성길이 얘기를 누구에게 한 적이 있나요?
거칠고 딱딱하게 내뱉는 순범의 질문이 윤미를 놀라게 만든 모양이었다.
윤미는 조심스레 순범의 기색을 살피는 듯했다.
박성길이라는 사람이 누군데요?
시침을 례는 것이오? 아니면 정말 몰라서 이러는 것이오?
윤미에게 한마디 쏘아붙인 순범의 머리속에 최 부장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권 기자, 조심하시오, 그 여자에게는 총각 한둘 보내는 건 문제도 아닐 거요.
옛날부터 워낙 세게 놀았던 여자거든. 세상에는 구미호라는 게 있다지 않소?)
일전에 내가 윤미씨 집에서 일러주던 게 생각나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 그때 박사님을 살해한 폭력두목이라던 사람 말이군요.
그 사람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런 얘기를 누구에게 하겠어요?
이쯤 되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무엇을 더 물어본다는 것도
추궁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 박성길이가 교도소에서 피살되었는데 박성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란
나와 개코 형사. 그리고 최 부장과 당신뿐입니다.
그래서 저를 의심한단 말이지요? 그러나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때 권 기자님에게 말씀드렸잖아요. 박사님에 관련된 것은
지난 십삼 년간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다구요.
지금 상황은 아무도 당신의 그런 말을 믿어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대화는 평행선이었다. 느긋한 성격의 순범도 이렇게 되자 화가 치밀어올랐다.
자신이 끝까지 보호해주기 위하여 진실을 들으려 하였으나 이 여자는 철두철미
자신을 속이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박사는 왜 그날밤 삼원각으로 가려고 했었습니까?
무슨 술자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삼원각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은,
윤미씨를 만나러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박성길 일당이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것은 이 박사 스스로의 결정은 아니었단
말이 됩니다. 그러면 당시 대통령과의 술자리가 없는데도 그 시간에
이 박사를 삼원각으로 부를 사람이 누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단 한 사람.
바로 신윤미, 당신뿐입니다.
내가 지난번에 박성길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은 최 부장이 윤미 씨를
이 박사 피살사건에 연루된 공범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조심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는데, 그 말을 한후 삼 일 만에 박성길이 살해됐습니다.
지금 최 부장은 범인이 죽은 박성길이가 이 박사의 죽음에 대해 고백을 한 것을
아는 사람 중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윤미는 이 말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꼿꼿한 자세로 순범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듣고 있었다. 마치
윤미 자신이 순범의 말 속에서 무슨 단서라도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말씀을 드리려 하다가 그만 둔 얘기를 오늘은 해야겠군요. 그날 저는
박사님이 오실 것이라는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어요. 박사님이 오실 때는
며칠 전,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하더라도 최소한 몇 시간 전에는 제게 연락이 오는데
그날은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이 박사가 삼원각으로 간 것은 윤미 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인가요?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가 삼원각으로 가던 중이었다면 누군가가 이 박사를
속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그렇다면 누가 이 박사를 속였을까요?
이렇게 물으면서도 순범의 마음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박사님을 삼원각으로 오도록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란 각하 외에는
두 사람밖에 없어요.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이죠.
윤미의 얘기는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했다. 이 박사가 삼원각에
가는 중이었다 하더라도 윤미에게 사전 연락이 없었다면, 그리고 윤미가
이 박사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 박사의죽음은 의외로 박 대통령의
측근에 의해 저질러졌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불시에 이 박사에게 연락해서 삼원각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바로 박 대통령의 왼팔과 오른팔인 경호실장과 정보부장뿐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얘긴가? 순범의 뇌리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만약에 이 박사와 박 대통령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겨 이 박사
가 미국으로 돌아가려 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면, 박 대통령
이 그냥 보낼 수 있었을까? 극비로 해야 하는 핵개발 같은 것이
모두 노출되고 말 텐데.)
그러나 박 대통령의 초빙에 의해 귀국한 이 박사와 박 대통령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는 얘긴가? 곰곰 생각하던 순범의 뇌리에
불현듯 박 대통령의 독재가 떠올랐다. 숱한 학생들의 희생을 불러왔던
박 대통령의 독재를 이 박사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면... 박 대통령이
아무리 이 박사를 아끼고 존경했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독재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이 박사를 예정도 없이 삼원각으로 오라고 하여 박성길 일당을 시켜서 살해하고는,
개코의 말대로 국림묘지에 매장하여 청와대의 행위를 위장한다. 만약에 윤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순범은 윤미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박성길의 죽음을 놓고 보면,
윤미밖에는 용의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개코는 자기가 사건에 끌어넣은 사람이고
최 부장은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이다. 만약에 그에게 박성길을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알리고 죽일 필요란 없는 것이었다.
미심쩍은 사람은 오직 윤미뿐이라는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말을 어쩐지 믿고 싶었다. 이것은 사건기자로서
지금까지 살아온 순범의 육감이었다. 논리를 믿을 것인가 육감을 믿을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순범이 택한 것은 결국 육감이었다.
일단 이렇게 마음을 결정하자 순범은 조금 전 자신이 윤미를 파
했던 태도가 부끄럼게 느껴졌다, 설사 윤미가 박성길의 죽음에 관
련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태도는 지나친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
면 윤미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 윤미에게 느꼈던 미
움의 감정이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순범이 망
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윤미는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거예요.
순범은 윤미의 작고 기다란 손을 와락 쥐었다, 사과를 하지 않고
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저히 그냥 헤어져서는 잠이 들 수 있
을 것 같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분노와 윤미에 대한 미안함, 그리
고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무언지 모를 강렬한 감정이 순범을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일어나시죠.
어디로 가시게요?
오늘밤은 도저히 그냥 헤어질 수 없을 것 같군요.
윤미는 이 말을 듣자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참, 미국에 가신다면서요?
네. 모레 갑니다.
좀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윤미 씨와 함께 있는 게 좋습니다.
윤미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는 오랜 세월을 홀로 지낸 여자의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