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 시인은 임지의 변주에 뛰어난 시인이다. 그가 바라보는 사물이 모두 저마다의 색채와 화음을 가지고 그의 시안에 자리 잡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그의 시적 재능과 시심이 특히 사물의 다채로운 이미지에 강한 집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언어는 허공을 흘러가는 달빛이나 햇살처럼 쉽사리 포착되지 않지만 여운과 울림이 크면서도 섬세한 결을 지니고 있다.”고 김춘식 문학평론가는 말하고 있다
5월에는 장옥관 시인의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문학동네, 2013)를 만나고자 한다.
모든 종류의 언어 안에 담긴 시공간적 분기의 운동, 그 리듬을 그린 시편들!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문학동네시인선」 제36권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는, 198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해 《황금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등의 시집과 동시집 《내 배꼽을 만져보았다》를 펴내고 김달진문학상, 일연문학상 등을 수상한 장옥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여기에는 인식의 상투성을 깨부수고 대상의 본질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아주 오래된 풍경에서 스며나는 비린내와 그 너덜너덜해진 질감의 흔적들에 배어든 아우성으로 그득한 총 55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죽음이 참 깨끗했다’,‘거울 앞에서’,‘마르지 않는 샘’,‘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지만’,‘나도 모르게 낳은’ 등의 언어가 아닌 몸짓이나 삶의 흔적, 사물의 모습 그 자체가 지닌 또 다른 언어의 힘을 다시 시의 언어로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담긴 시편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시인이 아끼는 시들, 1부에서 7편, 2부에서 2편, 3부에서 1편 모두 10편을 만나게 된다.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의 비의를 진지한 언어로 성찰한 깊이가 있는 시집이다. 일상의 세목들에서 그것을 그만큼의 빛깔로 건져 올리는 장인적 솜씨가 높은 시집이라고 이종암 시인은 말하고 있다.
장옥관 시인의 북벽은 청춘의 가려움에서 도망한 영혼의 극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종이는 또 다른 북벽, 영혼의 피난처라고 했으니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운명적인 조우를 이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봄의 마지막 달 5월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시낭송회에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일시 : 2015년 5월 7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 떡 본가/대구 달서구 두류공원로 130(달서구 성당동 118-4번지)/053-655-6500
-회비 : 없음. 음식은 직접 구매하셔야 합니다.
-제공 : 시하늘 봄호, 시낭송용 작은 시집
-장옥관 시인의 시세계 해설 : 엄원태 시인
-음악 : 박정호 님(오카리나 연주)
-연락처 : 가우 010-3818-9604/ 찬솔 010-9358-5594
보리향 010-2422-6796 / 김양미 010-2824-8346
*장옥관 시인 약력
ㅡ경북 선산 출생.
ㅡ1987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ㅡ시집 『황금 연못』,『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등 몇 권의 시집과
ㅡ동시집 『내 배꼽을 만져보았다』,
ㅡ시 해설서 『현대시 새겨 읽기』를 펴냄.
ㅡ현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붉은 꽃
ㅡ장옥관
거짓말 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이 있다 난생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하는 여학생도 있다
비언어적 누설이다
겹겹 밀봉해도 새어나오는 김치 냄새처럼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것, 몸이 흘리는 말이다
누이가 쑤셔 박은 농짝 뒤 어둠, 이사할 때 끌려나온 무명천에 핀 검붉은 꽃
몽정한 아들 팬티를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등
개꼬리는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핏물 노을 밭에서 흔들리는
수크령
대지가 흘리는 비언어적 누설이다
공중
ㅡ장옥관
공중은 어디서부터 공중인가
경계는 목을 최대치로 젖히는 순간 그어진다 실은 어둠이다 캄캄한 곳이다
나 없었고 나 없을 가없는 시간
빛이여, 기쁨이여
태양이 공중을 채우는 순간만이 생이 아니다
짧음이여, 빛의 빛이여
그러므로 이 빛은 幻, 환이 늘 공중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 아파 자리에 누워 보니
누운 자리가 바로 공중이었다 죽음이 평등이듯 어둠이 평등이었다
공중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지나간다
빛이 환이듯 구름도 환,
부딪칠 것 없이는 저를 드러낼 수 없는
바람만 채우는 곳
환의 공중이다
꽃 찢고 열매 나오듯
ㅡ장옥관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리고 있었다
시렁에 매달린 메주가 익어가던 안방 아랫목에는 갓 탯줄 끊은 동생이 포대기에 싸인 채 고구마처럼 새근거리고 있었다
비릿한 배내옷에 코를 박으며 나는 물었다
―엄마, 나는 어디서 왔나요
웅얼웅얼 말이 나오기 전에 쩡, 쩡 마을 못이 몸 트는 소리 들려왔다
천년 전에 죽은 내가 물었다
―꽃 찢고 열매 나오듯이 여기 왔나요 사슴 삼킨 사자 아가리 찢고 나는 여기 왔나요
입술을 채 떼기 전에 마당에 묻어놓은 김장독 배 부푸는 소리 들려왔다
말라붙은 빈 젖을 움켜쥐며 천년 뒤에 태어날 내가 말했다
―얼어붙은 못물이 새를 삼키는 걸 봤어요 메아리가 메아리를 잡아먹는 소리 나는 들었어요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미역줄기 같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야, 두려워마라 저 소리는 항아리에 든 아기가 익어가는 소리란다
휘익, 휘익 호랑지빠귀 그림자가 마당을 뒤덮고 대청 기둥이 부푼 배 안고 식은땀 흘리던 그 동짓밤
썰물이 빠져나간 어머니의 음문으로
묵은 밤을 찢은
새해의 빛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춤
ㅡ장옥관
흰 비닐봉지 하나
담벼락에 달라붙어 춤추고 있다
죽었는가 하면 살아나고
떠올랐는가 싶으면 가라앉는다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가 따로
춤추는 것 같다
제 그림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것이
지금 춤추고 있다 죽도록 얻어맞고
엎어져 있다가 히히 고개 드는 바보
허공에 힘껏 내지르는 발길질 같다
저 혼자서는 저를 드러낼 수 없는
공기가 춤을 추는 것이다
소리가 있어야 드러나는 한숨처럼
돌이 있어야 물살 만드는 시냇물처럼
몸 없는 것들이 서로 기대어
춤추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할퀴는
사랑이여 불안이여
오, 내 머릿속
헛것의 춤
죽음이 참 깨끗했다
ㅡ장옥관
죽은 매미를 주웠다
죽음이 참 깨끗했다 소리만 없을 뿐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했다 얼마나 머물다 간 걸까 내 귓바퀴 속
소리의 무덤을 만들고 사라진
찰나를 향한 여백뿐인 삶
그래서 그 가파른 울음소리, 짝퉁 비아그라 사서 박카스 아줌마 만나는 노인들처럼 갈급했던 걸까 돌아보니
벚나무 둥치에 소복하게 달라붙은 허물들
벗어놓은 몸이 고스란하다
그 아래 배터리 다 된 시계처럼
초침 멎은 검은 시간들
우듬지엔 아직도 푸른 불길 치솟는 울음소리
저 울음 그치면 울던 그 자세 그대로 툭 굴러떨어질 것이다 플러그 뽑은 티브이처럼 깨끗한 죽음
무밭에 서리 내리듯 녀석의 성(性)은 사그라질 게다
여운도 없이 여음도 없이 칼로 벤 자리
나도 따라 바라본다
녀석이 마지막 눈길 던졌던 그곳을
새
ㅡ장옥관
손버릇 나쁜 아이처럼 까치가 딴전부리며 힐끔거린다
가까이 다가가도 잔걸음으로만 움직일 뿐
기름 자르르 흐르는 검은 정장에 흰색 보타이 매고 저놈이 왜 저러는 걸까 이 이른 아침 콜라텍을 가려는 건지,
둘러보니 토사물
간밤의 취객이 게워놓은 벌건 거품 밥알들 혹시라도 빼앗길까 봐
푸줏간 앞 개처럼 자릴 뜨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배 속에서 반쯤 삭혀진 저 밥알, 그 힘으로 새는 날아오를 것이다
땅을 디디던 두 발 몸속에 감추고
하늘로 떠오를 것이다
게거품 게우듯 흰 꽃 뱉어내는 쥐똥나무의 오월도
덩달아 환한 햇빛 속
나사못 박듯 송두리째
ㅡ장옥관
강변에 줄지어 선 미루나무
언젠가 도색잡지에서 본 무성한 음모처럼
빽빽한 잎 달고 휘청휘청
온몸을 흔들고 있다 십자드라이버 돌리듯
흔들릴 때마다 한 뼘씩
거꾸로 땅에 박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펌프질
지맥 속 흐르는 물을 곧추세워 우듬지까지
보내기 위한 움직임인 것
바닥에 남은 포도주스를 스트로로 빨아 당기듯
세차게 빠는 동작이다
그래서일까 포르노 테이프의 저 벌거벗은 사람
서로 몸 끼워넣고
한사코 펌프질이다 나사못 박듯 송두리째
저를 쑤셔 박고 몸속에 고인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 당기려는 듯
시궁창 곁 봄풀이 유난히 짙푸르듯이
두두룩한 불두덩 털이 더 기름지고 무성한
까닭은 시도 때도 없이 퍼올리는
펌프질 때문이다
아무리 구경 큰 소방호스로 쏘아대도
저 초록 불길은 끌 수가 없다
둥근 돌
ㅡ장옥관
백담계곡에서 안고 온 둥근 돌 하나 욕조에 담가놓고 들여다보니 큰아이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데려와 눕혀놓았을 때가 생각난다 딸아, 딸아 넌 어디서 왔니? 둥근 그곳에 보름달이 들어 있나 불덩이가 들어 있나 손바닥으로 쓰다듬는 아랫배의 비밀이 궁금하기만 한데 돌 하나 업어온 날 밤에는 나 모르게 태어난 아이와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손잡고 걸어와 내 집 대문을 두드릴 것만 같다 먼 은하의 별에서 발 부르트도록 걸어와 내 얼굴 들여다보며 검은 눈물 닦아줄 것만 같다
죽음에 뚫린 구멍
ㅡ장옥관
벌초 간 어머니 묘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다 검게 아가리 벌린 그 구멍은 죽음에 뚫은 문, 산토끼의 집이다 하필이면 왜 그곳에 제 집을 판 것일까 젖가슴처럼 봉곳한 봉분을 파고들며 토끼는 아찔하게 검은 젖을 빨았을까 구멍을 드나든다고 죽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우리 어머니 다시 돌아오시는 건 더욱 아니겠지만, 죽음과 삶이 한통속, 바람벽에 달아놓은 거울처럼 구멍이 갑자기 환하다 입구에는 누군가 기다리다 돌아간 듯 잔디가 동그랗게 눌려 있다
낮달
ㅡ장옥관
재취 간 엄마 찾아간 철없는 딸처럼, 시누이 몰래 지전 쥐어주고 콧물 닦아주는 어미처럼
나와서는 안 되는 대낮에
물끄러미 떠있다
떠올라서는 안 되는 얼굴이, 밝아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어도 없는 듯 지워져야 할
얼굴이 떠있다
화장 지워진 채, 마스카라가 번진 채
여우비 그친 하늘에
성긴 눈썹처럼, 종일 달인 국솥에
삐죽이 솟은 흰 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