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우징이다.
그는 원성 대왕의 손자인 균정 상대등(관직)의 아들이며,
희강왕의 종제이다.
예징 등이 이미 궁중을 숙청하고, 예절을 갖추어 그를 맞이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의 조부 이찬 예영[효진이라고도 한다.]을 추존하여 혜강
대왕이라 하고, 아버지를 성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진교
부인을 헌목태후라 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을 감의군사로 삼는 동시에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이홍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처자를 버리고 산림으로
도주하였으나, 왕이 기병을 보내 추격시켜 잡아 죽였다.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왕 건)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자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토지제도 ] : 전공(戰功)에 따라 지급된 식읍(食邑)과 관복무의
대가로 받은 녹읍제가 발전하였다.
* 녹읍 祿邑: 신라시대 때 관료에게 직무의 대가로 지급한 논밭
757년(경덕왕 16년) 신라는 연봉이나 월봉으로 주던 벼슬아치들의
보수를 다시 녹읍으로 주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 녹읍으로 귀족들은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게 되고, 지방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왕실의 혼란과 약화를 틈탄 귀족들의 압력에 경덕왕이 굴복한 것이다.
[ 조세제도 ] : 조세제도는 조·용·조(租庸調)에 바탕을 두었다.
이 중 조(租:田租)는 토지산물인 곡식이나 직물의 원료 등을 현물로 바쳤고, 용(庸)은 산성 축성, 궁궐 등을 짓는 일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역(賦役)의 의무로 동원되었다. 조세(調稅)는 해당 지방의 특산물을 공납하는 것이었다.
진주향교(晋州鄕校)
이 향교(鄕校)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소성왕 원년(799)에 지금의 진주(晋州)인 청주(菁州)의 노거현(老居縣)을 국학(國學)의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했다고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 쩝. 사실 식읍은 좀 더 소개해드려야 할 내용이 있는데 일단
신라 본기에서만 추려서 우선 소개해드립니다.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 그리고 열전에 아직 식읍에 관한 내용이
더 있는데 차후로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물론 고구려의 발견 등에
상세하게 나와 있기는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