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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은총
시편 19:1-1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길 빈다.
창조절 여섯째 주일이다. 참 좋은 가을이다. 한국의 가을은 명품이지만, 이번에 경함한 미국의 가을도 한국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창조의 하늘은 빛난다.
늘 뉴스에서 만난 미국은 정치와 분쟁, 전쟁이 이슈였는데, 이번 여행 중에는 한 번도 그런 사나운 뉴스를 듣지 못하였다. TV를 켜기는 커녕 유튜브와도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이다. 가을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사는 것도 좋을 듯하였다.
다만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뉴욕의 후러싱, 뉴저지의 버겐 카운티를 방문하였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다 어슷비슷하다. 실은 자연보다 사람에게서 가을을 느낀다. 나는 어떤 모습의 가을인가?
어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어서가 아니다. 성숙하고, 열매를 맺으며,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일 것이다.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내가 견디고, 누려온 여름 때문에 가능하다. 일용할 은총을 누린 사람이 맞는 인생의 계절은 그만큼 아름답고, 귀한 법이다.
1)
성경은 우리에게 날마다 맞는 은총을 말씀하신다. 날마다 마주하는 아침과 날마다 나를 향해 비추는 햇빛 앞에서 새로운 창조와 감사를 느낀다.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도 날마다 지고, 일용할 양식도 날마다 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 은총도 매일매일 필요하다. 한마디로 ‘일용할 은총’이다.
본문인 시편 19편은 특별한 구조를 갖고 있다. 크게 3등분으로 나뉘어 첫 부분은 창조이야기(1-6), 둘째 부분은 계명이야기(7-10), 셋째 부분은 이 두 가지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응답(11-14)을 다룬다.
하나님의 계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이다. ‘창조와 계명’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두 가지 방법이다.
자연과 창조질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을 일반계시라고 한다. 자크 마리땡의 말이다. “이 자연에는 무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훔쳐보는 것은 예술가의 하는 일이다.” 마틴 루터는 날마다, 모두에게로 확대한다. “하나님은 성경에만 복음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들, 꽃들, 구름들, 별들에도 기록하셨다”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직접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가장 큰 특별계시는 바로 이 땅에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보여주셨다. 이제는 인간이 응답할 차례이다. 이 시의 세 번째 부분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응답할 수 있는가를 말한다. 미리 그 결론을 말하면 이렇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14).
그 응답의 결론은 한 마디로 ‘은총의 햇빛’을 누리라는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창조하라, 발견하라, 감사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 ‘은총의 햇빛’을 맛보고 산다. 그런 삶을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창조와 자연 속에서 드러난다. 어떻게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을까? 일찍이 창조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셨고, 또한 계명과 증거를 통해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시편 19편 1-6절에 따르면 시인은 보통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고 있다. 시인은 소리 없는 소리를 예민한 감성으로 느낀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우리에게 신비한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우주의 소리를 듣는다. 밤과 낮이 이야기하는 소리, 하루 해가 뜨고 지는 소리, 그 말, 그 소리, 그 일, 그 이야기를 보고, 듣고 그는 알아차린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사실 우리가 보지 않기에 안 보일 뿐, 진정 보려는 사람들은 창조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낀다.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하나님의 기운을 맛본다. 이 땅의 어느 공간, 어느 시간, 어느 자취,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곳은 없다.
하늘을 쳐다본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사람의 귀에 들리는 소리도 아니라고 한다. 성경은 다만 하나님의 옷자락과 같은 영광을 보고, 들을 뿐이라고 한다. 시인은 말하기를 그 소리는 낮에도 밤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이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2-4).
특히 시인은 해(태양)에게 초점을 맞춘다. 태양은 창조의 절정이고, 만물의 생존을 가능케하는 에너지이다. 해는 만물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늘, 궁창, 해, 이것은 서로 관계하면서 밤과 낮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이어간다.
한마디로 ‘은총의 햇빛’이다.
2)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가 있다. 이제 일생을 다 보낸 후 황혼에 접어든 큰아들이 검은발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강에서 낚시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회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글자를 주신 이후 성서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우리에게 글자가 없을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시냇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창조와 율법의 관계’,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잘 설명하고 있다. 특별계시의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시 19편 7-10절은 마치 시편 119편의 축소판이라고 부른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을 크게 여섯 가지로 요약한다. 그 여섯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 증거, 교훈, 계명, 도, 법’라는 것이다.
창조의 메시지가 말없이, 언어가 없이, 소리가 없이 선포된 반면에, 성경은 문자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
증거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사랑과 구원을 베푸신다는 바로 그 증거이다. 이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여 우둔한 사람에게조차 지혜를 갖게 한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8).
교훈은 하나님의 지시의 내용이다. 이 지시는 인간에게 바른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교훈은 기쁨을 준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8).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해서, 또 사람을 대해서 지켜야할 말씀을 조목조목 밝힌 것이다. 이 계명은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지와 그 과정을 환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비추듯,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0)고 노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말씀의 능력 앞에서 별로 감동도, 긴장도, 충격도 받지 않는다. 어느 예언자가 온들, 무슨 다급한 말을 한들, 약발이 서지 않는다. 우리 마음이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산다.
인도선교사 스탠리 존슨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내 처지에 대해 말하는 구절을 만날 때마다 퀘이커 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그 구절에 입을 맞추었다. 그게 내 습관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 말씀의 음성 앞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말씀의 교훈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은총의 햇빛을 여는 길이다.
3)
이번에 미국 방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사람이었다. 자연에 순종하고, 계명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나 존재하였다.
오늘 칼럼 ‘필그림’에 그 소감을 적어 보았다. 나는 특히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다. 미국에서 뉴욕 변두리 후러싱과 뉴저지 버겐 카운티에는 한인타운이 형성되었다. 그곳에 가장 많은 것은 한인 음식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와 연결되어 살고 있었다.
시편 19편의 세 번째 부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길과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인간의 두려움과 은총을 사모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자신을 가리켜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11)라고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순종하고, 굴복하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온다.
먼저 기도자는 자기도 모르게 잘못을 저지를까 걱정한다. 이러한 숨은 허물은 사람이 최선을 다해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2).
또 시인은 자신의 숨은 허물과 고의로 지은 죄 때문에 탄식한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숨은 허물이든, 고의로 저지른 죄든,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예외가 없다.
시편 19편을 다시 보라. 우리가 하늘의 소리와 꿀보다 더 단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 나오도록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고, 용납하시는 그 은총을 사모해야 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을 통해 나를 돌아보니 결국 인간이 할 일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뿐이라는 실토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이 유명한 복음성가는 이런 결론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창조를 통한 계시와 말씀을 통한 계시’, 이렇듯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두 가지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은총의 햇빛’이다.
이민자들의 삶은 고달프다. ‘일용할 은총’없이는 살기 어렵다. 독일에서 목회할 때 경험한 일이다.
어느 집사님 가정이 부퍼탈 시에서 식당을 재개업하며 예배를 요청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궁금하였다. 오래도록 부퍼탈에서 자리잡은 그 형이 갑작스레 식당을 자기에게 넘기고, 태권도장도 처분하여 갑자기 호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그 형은 얼마 전에 호주로 모처럼 휴가를 다녀왔는데, 그곳 날씨에 반했다는 것이다. 며칠씩 계속되는 눈부신 태양, 맑은 하늘, 자기가 이십 년 이상 살아온 독일 부퍼탈의 날씨와는 정반대였다. 그곳은 이름 ‘탈’(tal)에서 느끼듯 계곡 지역에 위치한 부퍼탈은 유난히 비가 많고, 날씨가 궂었다. 그는 오랜 이민생활로 건강이 안 좋고, 매일 몸도 고달팠다.
휴가를 다녀온 후 “그래, 인생 뭐 있나, 호주에 가서 살자”고 결심한 그는 독일을 떠났다. 그런데 일 년 만에 큰 손해를 무릅쓰고 다시 독일로 되돌아왔다.
처음에는 다 좋았다. 눈부신 태양, 맑은 하늘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일 년 내내 해가 떴다. 어떻게 365일, 해만 뜨는가? 그래서 지쳤다. 일 년 내내 햇빛만 비치니 도저히 못살겠다며, 견딜 수 없어 비가 오는 독일이 그리워 결국 돌아왔다고 하더라.
‘일용할 은총’은 365일 양지바른 볕은 아닐 것이다. 그 햇빛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쉽게 흔들고, 변덕스럽게 하는 그런 태양이 아닌 ‘일용할 은총’을 사모해야 한다. 내가 선 자리에서 그 은총을 발견하라.
인생은 누구나 각자가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이 계심을 기억하라.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제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막다른 벽 앞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갈망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총의 햇빛으로 우리를 비춰 주신다. 주님을 믿고, 의미하며, 찾는 이들에게 ‘일용할 은총’을 베푸신다. 그러니 날마다 은총의 햇빛을 사모하라.
‘일용할 양식’처럼 ‘일용할 은총’과 ‘일용할 평화’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 내 삶의 중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일용할 은총이 언제나 여러분의 삶 위에 따듯하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