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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대청봉(1,708m)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내려온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으로 방향을 돌려 남설악 한계령을 넘어 점봉산(1,424m)을 솟아 올리고 계속 남하하여, 조침령-갈전곡봉을 지나 56번국도(홍천-양양)가 지나가는 구룡령(九龍嶺)을 넘어 약수산-응복산-만월산을 경유하여 오대산(두로봉)으로 이어진다.
☆… 방태산(芳台山)은 사방으로 긴 능선과 깊은 골을 안고 있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 소재한 거대한 영역의 토산(土山)이다. 그 산체가 워낙 방대하고 높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으므로 수많은 골을 안고 있다. 깊은 계곡에는 항상 청정한 물이 흘러넘친다. ‘3둔 4가리’가 바로 그것이다. 살둔, 월둔, 달둔, 연가리, 아침가리, 결가리, 적가리의 비경(秘境)을 품고 있다. 맑디 맑은 이 물들이 모두 ‘내린천’으로 흘러내리는데, 방태산은 계곡의 청랑한 풍광도 아름답지만, 사시 수량이 풍부하여 날씨가 아무리 가물어도 계곡에는 늘 많은 물이 흘러내린다. 방태산을 중심으로, 그 남쪽의 산곡에서 발원하는 미선계곡의 물과 그 북쪽에서 내려오는 방동계곡의 물이 현리에서 합류하여 ‘내린천’을 이룬다. 이렇게 방태산에서 발원한 골골의 물들은 내린천이 이루어 북으로 흐르다가 인제읍 합강(合江)에서 진부령과 내설악과 한계령에서 흘러오는 소양강의 본류에 유입된다. 그리고 이 물은 소양호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방태산의 내린천의 계곡물들은 한강의 원류(源流)인 것이다.
특히 방태산은 여름철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수림과 차가운 계곡물 때문에 계곡 피서지로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산악회>에서는 이미 두어 차례 ‘아침가리[조경동]’ 계곡을 트레킹하면서 그 청정한 물맛을 온몸으로 맛보기도 했고, 구룡령-갈전곡봉-가칠봉을 종주하고 난 후 ‘삼봉약수’에서 목을 축이기도 했고, 주억봉 서쪽의 깃대봉-배달은석 산행을 한 후, ‘개인약수’로 내려와 그 특유의 물맛을 보기도 했다.
* [북상하는 태풍 15호 ‘다나스’] — 중부·강원 영서 지방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
필리핀 인근에서 발생한 제5호 태풍 ‘다나스’가 북상하고 있다. 어제 제주도 한라산과 남해안·지리산 등지에 엄청난 폭우기 내렸다는 보도이다. 그리고 오늘 태풍은 낮에는 남해를 통과하여 동해로 빠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상청은 오늘 일요일 아침 태풍 ‘다나스’가 열대 저압부로 약화되어, 전국이 흐리고 비가 내리겠고 이날 서울·경기도·강원 영서지방에 5∼40㎜가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강원 영서와 충북은 밤까지 이어지겠다는 것이다.
* [산으로 가는 길] — 비오는 날, 강원도 영서 방태산 깊은 계곡을 찾아서
이미 예정된 산행일, 서울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려도 우리들의 산행은 예정된 것이었다. 오늘의 산행은 당초 가평의 화악산으로 잡았으나, 인제의 방태산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방태산은 산역이 방대하고 울창한 원시림 속에서 흘러내리는 청정한 계곡물이 언제나 풍부하기 때문이다. 오늘 태풍의 영향으로 비록 비가 오지만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우천불구(雨天不拘) 산행에 나선 것이다.
오늘 우리 산악회 202차 산행에는 김준섭 회장을 위시하여 한영옥·장태임 부회장, 민창우 기획위원, 박은배 총무, 김재철·유형상 산행대장을 비롯하여, 호산아 오상수 고문·남정균 고문, 김의락 자문, 오수정·허향희 님, 안상규·강재훈 님, 강완식·신시호·홍완섭 님, 율목 권순식 님과 류경 님, 바람처럼 김정출 님, 문점식 님과 그 지기 분들, 꽃구름 지기 이달호 님, 그리고 이명자·이경숙 님, 지평의 지기 강우신 님, 문리버의 지기 이인권 님, 그리고 홍완섭 님의 지기 이재무 님, 지난 달에 이어 이달에도 나오신 금태호 님 일행 네 분 등 30 여명의 대원들이 참석하였다. 특히 지난 해 9월 설악산 산행 이후 오랜만에 나온 ‘바람처럼’,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나오신 탄탄한 몸매의 산악인 이재무 님과 성동고동문산악회 회장인 이인권 님이 함께하여 반가웠다.
오전 7시 40분, 우리의 버스는 서울의 군자역(능동)을 출발했다. 서울은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호대교를 건넌 우리의 금강고속버스(권영길 님)는 미사리에서 서울-양양간 고속도로를 타고 질주한다. 산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교통 사정은 아주 원활했다. 고속도로 ‘홍천휴계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계속해서 동진하다가 ‘내린천휴게소’가 있는 인제I.C에서 31번 국도로 내려섰다. 31번 도로는 홍천에서 내린천을 따라 인제로 가는 도로이다. 국도에 내려서면 바로 오늘의 산행 기점인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현리 ‘용포’마을이다. 특히 오늘 우리가 탐방하는 ‘매화동 계곡’은 방태산 깃대봉 서남쪽에 있는 산곡으로, 그러므로 이곳 용포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방태산 깃대봉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산행 들머리 ;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용포’ 마을] — ‘현리전투위령비’ 안내판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행 들머리에 ‘현리전투위령비’(→300m)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인제군 상남면 ‘현리’, 여기가 어디인가. 6·25 전쟁 중 엄청나게 많은 아군이 처절하게 죽음을 당했던 패전(敗戰)의 현장이다. 말로만 듣던 현리지구 전투의 현장인 것이다. 이른바, 우리 역사상 3대 패전 중의 하나인 ‘현리지구전투’이다.
▶ '현리지구전투'는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0일까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과 중국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인제에 주둔하던 국군 제3군단이 중국군에 퇴로가 끊기고 포위되자, 우왕좌왕하다가 험준한 방태산의 타고 평창의 하진부리(下珍富里)까지 무력하게 퇴각했고, 그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사상자가 19,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는 한국전쟁 기간 중 최악의 패전(敗戰)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군 제3군단이 해체되고 육군본부가 작전권을 미군에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현리지구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 자상하게 소개할까 한다.
* [빗속에서 감행하는 산행] — 용포 마을을 지나 매화골로 들어가다
오전 9시 40분, 우리는 방태산 매화골 산행에 돌입했다. 빗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두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일부 대원은 우의를 차려입고 일부 대원은 우산을 들고 포장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산으로 가는 길목 주변의 밭에는 감자, 고추 등 여름작물이 싱싱하게 자라고, 띄엄띄엄 지어진 정갈한 집들이 보인다. 주변을 바라보면 방태산 권역의 첩첩청산이다. 어디를 보아도 울창한 삼림이다. 비오는 날, 동네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고즈넉한 산간 마을, 여기가 수많은 젊은 목숨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전장이었다고 생각하니, 순간 예리한 칼끝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아, 이 땅의 푸른 목숨들이여!!
그렇게 20분 정도 올라가니 도로에 차량 출입을 통제하는 차단기를 설치해 놓았다. 그 오른쪽으로 가는 길, 개울의 다리 건너 숲속에 ‘물소리팬션’이 있다. 차단기를 넘어 그대로 산길로 들어갔다.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길은 계속되었다. 도로의 끝, 너른 마당에 별장 같은 산뜻한 집 한 채가 있다. 거기에서 조금 올라가 계곡을 건넌다. 계곡은 명경지수의 맑은 물, 은은하고 고즈넉한 정취를 안겨주었다. 개울을 건너서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은 사람의 키보다 높은 나무들이 울창하여 한 몸이 지나가기가 아주 불편하였다. 물먹은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리니 아주 불편한 숲길이다.
* [비가 내리는 원시림의 좁은 숲길에서] — 떠오른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 좁은 숲길을 걷노라면 젖은 나뭇가지와 잎들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린다. 당시 현리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처참하게 살상을 당하거나 이 험악한 방태산으로 도주한 병사들의 아픔이 차오른다.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하다가, 문득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가 떠올랐다. 오늘의 우중 산행 중에 68년 전에 이 방태산 계곡에 죽어간 젊은 영령들이 생각난 것이다. 진혼곡 삼아 시편을 올린다. 고독과 죽음의 현장에서 새로운 용기를 다잡는 내용이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제2연
이 시(詩)를 지은 고정희도 비가 쏟아지는 계곡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는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뱀사골 계곡에서 폭우를 만나, 급류에 휩쓸려 44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고정희는 지난 1980년대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를 가슴앓이 하며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다. 이러한 그에게 해마다 찾는 지리산 등반은 ‘연중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지리산은 신성한 산이었다. 그에게 지리산은 자연으로서의 산을 넘어 역사성이 담긴 산이었고 그는 이 산을 오름으로써 스스로 역사적 인간으로 재무장했던 것이다. 민족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리산을 통하여 그는 온몸으로 앓다가 그 곳에서 제 육신의 허물마저 벗어 버렸다.
* [청정한 매화골 게곡 산행] — 비를 맞기로 작정하면 마음이 당당해진다
이곳은 방태산의 서남쪽에 위치한 매화골 계곡이다. 방태산의 주 등산로가 아니어서 평소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 오늘 비가 내리니 산길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계곡을 왼쪽에 끼고 물에 젖은 숲을 해치고 산길을 올라간다. 도로에서 우산을 쓰고 오던 대원들도 우산을 접었다. 우의를 입은 대원도 있지만, 배낭에 방수 커버를 씌우고 그냥 비를 맞기로 작정한다. 이미 이래저래 옷은 다 젖어버렸다. 산길을 걷는 사이 몸에 열기가 솟아난다. 더운 몸에 비를 맞기로 작정하였으니 마음이 편하고 여간 시원하지 않다.
다시 계곡을 건넌다. 크고 작은 바위가 너덜지대를 이루고 있는 험한 계곡, 물이 세차게 흘러넘친다. 요즘 가뭄으로 모든 산골짜기에 물이 말라 있는데, 이곳은 수량이 풍부했다. 오늘 비가 내려서 불어난 물이 아니다. 원래 방태산은 물이 맑고 풍부하기로 이름난 명산이다. 이른바, ‘3둔4가리’가 바로 그것이다. 워낙 방대하고 높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으므로 수많은 골을 안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매화골도 청정한 물이 흘러넘친다. 오늘 계곡 트레킹을 예상하여 수륙 양용의 트레킹화를 신고 왔으므로, 그냥 계곡의 물 속을 신나게 걷는다.
* [험하고 미끄러운 산길] — 물기를 흠뻑 머금은 야생화가 청초하다
이제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올라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산록, 좁은 숲길이다.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세찬 물소리를 쏟아낸다. 길은 벼랑이고 물기를 먹은 흙길은 미끄러웠다. 한참을 가다보니 거대한 소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쓰러져 있다. 그 높이가 허리에 찬다. 곤혹스럽지만 가랑이를 걸치고 타고 넘어야 한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껍질이 완전히 벗겨져 있어 아주 미끄럽다.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원시림의 산행, 바위 밑에 하얀 야생화가 피어 환하게 길을 밝힌다. 그리고 가녀린 대궁위에 주홍빛 나리꽃이 하늘거린다. 모두 여름에 피는 꽃이다. 물이 콸콸콸 흐르는 계곡, 하늘이 환하게 열린 곳에서 대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잠시 뜨거운 숨을 골랐다. 대원들이 다 모인 기회를 잡아 단체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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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푸른 숲길과 계곡을 넘다들며] —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폭포
다시 산행이 이어진다. 좁은 길에 다양한 원색의 대원들이 열을 지어 걷는다. 울창한 숲길이다. 한참을 가다가 길은 다시 계곡을 건넌다. 이제 계곡의 오른쪽 산기슭을 타고 걷는 것이다. 얼마가지 않아 다시 또 계곡을 건넌다. 큰 바위가 아무렇게 뒤엉겨 있는 계곡, 물먹은 바위가 미끄럽다.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 걷은 것이 안전하고 편하다. 이미 바지가 다 젖었으므로 거리낄 것이 없다. 작은 폭포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쏟아지고 그 아래 작은 소(沼)에 물이 고여 맴돈다. 싱그러운 엽록소 수림 사이로 보이는 계곡의 풍경이 정결하고 아름답다. 물기를 머금어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별모양의 단풍나무 잎들이 아주 싱그럽다.
* [시원하게 쏟아지는 계곡의 물] — 가슴을 씻어 내리며 청정한 물소리
얼마를 올라갔을까. 계곡에 세찬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뜨거운 가슴을 씻어 내리는 청정한 물소리다. 눈길을 돌려, 돌아보니 규모가 큰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폭포 아래에는 맑은 물이 고여 소용돌이 치고 있다. 어떤 대원은 더운 기운에 그냥 물속에 들어가 포즈를 취한다. 비가 내린다. 다행이 폭우가 아니라,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그대로 하늘이 시원한 은총을 내리는 듯하였다. 좁은 길목에는 물기를 머금은 산죽이 생기를 더하고, 사방으로 줄기를 활짝 펼친 관중의 자태가 산뜻하다.
* [비가 내리는 계곡의 가장자리에서] — 불편하지만 정겨운 점심식사
정오가 가까운 시각, 앞서가던 지평 대장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계곡의 이쯤에서 식사를 하고 여기 계곡에 머물러 쉬었다가 하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오늘은 당초부터 계곡을 탐방하는 것만으로 계획을 하였으므로 방태산의 정상부[깃대봉]에는 오르지 않기로 했었다. 계곡 탐방으로 선유(仙游)를 즐기다가 원점 회귀를 하는 것이다. 마침 빗줄기가 아주 미약하여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계곡으로 내려가 너른 돌밭에 자리를 잡아 식사를 했다.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내어 놓고 환담을 나누며 식사를 했다. 간간히 비가 내려 불편하지만 정겹고 따뜻한 자리였다. 기꺼이 고통을 함께 하며 산행을 하고, 그리고 정성어린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다 보면, 오늘 같이 빗속의 산행도 행복한 시간이 된다.
* [산행, 사서 하는 고생] — 그러나 순수한 생명감으로 충만한 시간
산을 오르는 것은 보통 사람의 문법으로 말하면 ‘사서 하는 고생(苦生)’이다. 사실 산행은 힘들고 불편한 고행(苦行)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체감하는 즐거움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청정한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이 그 자연과 하나가 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하늘은 순결한 에너지로 충만하고, 산(山)은 청정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 정결한 하늘과 땅의 기운이 내 몸을 통하여 맑은 숨을 쉰다. 순수한 생명력이 심신을 감싸오는 시간이다.
문명(文明)의 도시는 이른바 ‘사람다운 삶’을 위하여 끊임없이 욕망(慾望)의 바벨탑을 쌓아 올린다. 이념과 물질이 결합하여 움직이는 세상은 아주 치밀하게 발전하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항상 ‘능력’을 발휘해야 하고 늘 ‘관계’가 살아있어야 하고, 언제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낙오자가 된다. 문명은 늘 긴장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자존감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욕망은 치열하게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반작용(反作用) 또한 적지 않다. 자연과 멀어지는 인간의 문명으로 인하여 자연과 인간성은 무참하게 훼손되고,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정치지도자는 위선(僞善)으로 분을 바르고 사람들은 서로 경쟁의 날을 세운다.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하늘'로 대표되는 자연은 한결같이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지만 문명은 결국 인간 소외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대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모든 전쟁과 고통은 지도자의 무능과 정치적 욕망이 초래한 재앙이다. 지난 세기의 일제 강점기가 그렇고, 6·25 전쟁이 그렇다. 안타깝게도 시대의 제물이 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디. 살아남은 자는 그 생채기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고정희는 그 <상처 받은 영혼을 위하여> 따뜻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68년 전, 퇴로가 없는 전장에서 무참히 쓰러져 간 젊은 영혼을 위하여 뜨거운 추모의 마음을 바친다.
* [점심식사 후의 계곡 탐방] — 원시림의 산을 깊고 물은 철철 흘러넘쳤다
점심식사를 하고 나니 오후 1시, 빗줄기도 많이 약해졌다. 오늘은 원점 회귀의 하산 지점[용포마을]에 집결시간을 4시로 정했으므로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일군의 대원들은 계곡의 상류로 더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로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비가 오는 산은 아득하게 높고, 계곡은 올라갈수록 더욱 깊다. 앞서 지평과 강우신 님은 식사도 하지 않고 산으로 올라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김준섭 회장을 비롯하여 류경 님, 호산아 고문, 유형상 대장, 김재철 대장과 이경숙 님, 이명자 님, 그리고 강재훈 님이 함께 상류의 계곡을 치고 올라갔다. 그렇게 원시림의 산을 깊고 물은 철철 흘러넘쳤다. 기차게 쏟아지는 폭포와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이 더운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린다. 물먹은 수목들이 싱그럽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올라갔다. 산의 8부 능선 가까이 올라간 것 같다. 거기에는 맑은 물이 힘차게 쏟아지고 깊은 숲속에 맑은 물이 크고 작은 소(沼)를 이루어 장관을 보여주었다. 싱그러운 원시림, 깊은 산의 정취가 청정한 숨결을 느끼게 했다. 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미 온몸은 비에 젖었으므로 비가 오나 비가 그치나 우리들의 산행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감내하기로 작정하면 마음이 편한 법이다.
필자는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고산지대의 오지(奧地)에 사는 네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낙천성과 행복감을 만나서 받은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난하고 힘들지만 그들은 언제나 ‘노플라블럼’[아무 문제 없다]이다. 느긋하고 여유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마음이 착하고 순수하다. 영악한 문명의 때가 없다.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자연과 하나 된 마음의 발로이다. 어른이든 아이들이든 누구를 만나도 ‘나마스테!’하고 손을 모아 인사를 한다. 네팔이나 부탄 같은 나라는 행복지수가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 ‘나마스테!’는 네팔·인도 등지에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로 ‘안녕하세요!’하는 뜻인데, 원래는 산스크리트어로 ‘당신 안에 있는 신(神)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하산 길] — 폭포의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다
오후 2시, 하산을 시작했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와 맑은 물인 고인 계곡에서 한참을 노닐었다. 올라온 길을 내려가는 것은 훨씬 수월했다. 시간적이 여유가 많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면서 걸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숲속의 오솔길을 타고 내리고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넜다. 비는 거의 그친 상태였다. 그렇게 내려오는 중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가 시야에 들어왔다. 폭포 아래 소용돌이치는 깊은 웅덩이가 있다.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우리 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므로 일행은 그냥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배낭을 벗어놓고 옷은 입은 채로였다. 방태산 매화골, 그 청정한 물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철없는 아이들처럼 환호하기도 했다. 비에 젖고 땀에 젖은 옷을 입은 채, ‘동심으로 돌아가’ 노닐었다. 햇볕이 내리는 날씨라면 더욱 빛나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물속에서 또는 물가에서 오래 동안 머물면서 청정한 계곡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방태산 ‘매화골’ 탐방을 마치고] — ‘한국역사의 3대 패전’과 ‘현리전투’의 실상
오후 3시 30분, 모든 대원들이 용포마을에 하산을 완료했다. 다시 ‘현리전투위령비’의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6·25 당시, ‘현리전투’ 상황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것이 ‘우리 역사의 3대 패전’ 중의 하나라고 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가슴 먹먹한 ‘현리전투’의 참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 역사상 ‘3대 패전’은, 일반적으로 정유재란 때 ‘칠전량전투’, 병자호란 때의 ‘쌍령전투’, 그리고 한국전쟁 때의 ‘현리지구전투’를 꼽는다.
▶ ‘칠전량전투’는 임진왜란 해전 가운데 유일한 패전이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이 승승장구하다가 조명연합군의 반격과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밀리자, 몇 달 만에 전쟁 양상은 명나라와 왜군의 지루한 협상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왜군은 조선 각지에 성을 쌓고 웅거하면서 사람과 물자를 약탈했다. 왜군이 전력을 정비하여 다시 공세에 나선 것이 1597년 정유재란이다. ‘칠천량 패전’은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왜의 수군에게 궤멸당한 전투이다.
▶ 병자호란 때의 ‘쌍령전투’는 대규모 조선군이 소수의 청나라 기병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전투였다. 인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으로 망해가는 조선을 살렸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켰다. 하지만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1636년 청(淸) 태종 홍타이지는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청군이 열흘 만에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했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삼남에서 모인 조선 근왕군(勤王軍) 4만여 명이 쌍령(경기도 광주부근)에 집결했다. 쌍령전투에서 우리 역사상 최악의 졸전으로 조선군 4만 명은 청군 300여 명의 기병에게 전멸을 당했다. 그리하여 버틸 힘이 없는 인조는 삼전도에 내려와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겪었다.
▶ 오늘 우리가 찾은 현리지구전투(縣里地區戰鬪)는, 서두에서 말한 대로, 한국전쟁 중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중공군과 인민군에 의해 국군 3군단의 병력이 포위당하여 수많은 장병들이 무참하게 살상당한 패전을 가리킨다.
* [‘현리 전투’의 배경과 실상] — 전사·실종·포로가 된 장병은 19,000여 명이라
현리전투의 배경과 원인은 다음과 같다. … 펑더화이[彭德懷]를 사령관으로 하는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북한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오산·장호원·제천·삼척 등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1월 9일부터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해서 3월 14일에 다시 서울을 되찾았다. 그리고 3월 24일에는 38선 인근의 문산·연천·화천·양구·간성 등의 지역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중국군은 병력을 충원해서 1951년 4월부터는 서부전선에서, 5월부터는 중·동부전선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당시 중국군은 이곳 인제 지역에서, 예상을 깨고 국군 5사단과 7사단 작전 지역 사이를 뚫고 밤새 엄청난 행군 속도로 일부 부대가 오미재와 5km 후방의 집결지였던 ‘침교’ 일대까지 확보하며 국군의 퇴로를 막았다. 속초와 원통을 잇는 긴 전선(戰線)에서부터 종심 50km를 돌파 당하자, 국군 3군단 예하 3사단과 9사단의 병사들을 옥죈 것은 적의 총탄이 아니라 앞뒤로 갇혔다는 공포감이었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부대 진영은 와해되었다.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방태산 방향으로 산개했다. 인근의 내린천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인 것을 몰랐던 여러 무리의 병사들은 천변을 따라 후퇴하려고 하다가 북한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 중 일부는 북한군으로 차출되어 전우에게 총을 겨누어야 했다.
68년 전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지금도 오미재 정상부에는 한적한 길가에 넓적한 비석이 서 있다. “이 전투의 패배를 교훈으로 삼고 당시 이름 없이 몸 바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고자” 인근 부대에서 세운 비(碑)이다. ‘전쟁의 경과·결과·자취 등을 기록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에서’ 아군의 무훈을 기념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적비라면 이 비석은 오늘날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7일간 계속된 중국군의 6번째이자 마지막 대규모 공세 중 일어났다. 북한군 5군단 예하 3개 사단과 중국군 9병단 예하 6개 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진지를 구축한 국군·미군 작전 지역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국군 3군단은 동해안에서 설악산 지구를 맡은 제1군단과 인제 서쪽과 양구 지구를 맡은 미군 제10군단 사이 작전 지역을 할당 받았다. 3군단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오미재에 부대를 파견하여 첫 번째 후퇴 집결지인 현리에 이어 필요할지도 모를 2차 퇴로를 미리 확보하려고 했지만, 미군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E. Almond)는 그곳은 자신들의 관할이라며 이를 거부했으며 추가 병력을 파견하지도 않았다.이런 상황에서 쉽게 뚫려 버린 오미재와 침교는 아군의 후방에서 그들을 겨누는 ‘칼’이 되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3군단은 현리에 모였지만 사단과 군단의 지휘부는 이 사태를 적극적으로 수습하지 못했고, 헬기를 다시 타고 군단사령부가 있는 70km 후방의 평창 하진부리로 돌아가는 군단장을 보며 병사들은 마지막 전의(戰意)마저 상실했다. 식량 없이 흩어진 병사들은 중장비와 중화기를 버리거나 숨기며 무작정 후퇴했으며, 포로로 잡힐 것을 두려워 해 스스로 계급장도 떼버리는 장교들 틈으로 소총과 실탄까지 버리는 병사들도 보였다. 중국군의 감시를 피해 인적이 드문 산 중턱을 돌아 걸으며 퇴각했던 병사들은 곳곳에 널린 시체를 보며 삶의 의지를 되새겼다. 겨우 며칠 만에 군단본부가 있는 하진부리에 살아서 도착한 패잔병들은 자신들을 마치 ‘마라톤 골인 지점에 도착한 선수들처럼 박수로 맞이하는 지휘관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3군단은 패퇴한 부대를 재수습했지만 병력의 30%, 장비의 70%가 사라진 뒤였다. 당시 현리전투에서 전사·실종·포로가 된 장병은 19,000여 명이라고 한다.
‘현리전투’ 이후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흔히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오해되는 자신들의 특기, 즉 38선 인근까지 내려오며 효과적이었던 ‘대규모 기동포위전’이 더 이상 미군의 강한 화력과 물량공세를 뚫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1.4후퇴’를 겪은 유엔군도 1951년 봄부터는 현재의 휴전선 인근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현리전투는 이후의 전황이 38선 인근에서 교착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분기점이 되었다. 늦여름의 ‘인천상륙작전’이 한국전쟁 흐름에서 제2막의 서장이었고, 늦가을에 시작된 ‘중국군 개입’이 전쟁의 판도를 다시 바꾼 제3막의 전주곡이었다면, 현리전투는 지루한 정전회담과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반복되는 전쟁 후반부로 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현리전투는 환수되지 않는 전작권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나 국군의 불완전한 군사적 자율성을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치욕’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 패배는 지휘부의 무능과 무책임뿐만 아니라 허약한 국군을 파고든 중국군의 과감한 전술과 국군-미군의 일원화되지 않은 통제체계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25,000명 병력의 국군 3군단 자체가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국군의 독자적인 지휘권은 미8군에 완전히 귀속되어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다. <교수신문(http://www.kyosu.net/)>
지금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에서 1991년 11월 20일에 세운 <현리지구전투위령비>에 그 건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략(前略)> … ‘우리 후배 장병들은 당시의 처절한 전투에서 패배의 아픔을 뼈아픈 교훈으로 상기하고 초개와 같이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자, 현리지구에서 희생이 가장 많았고 선배전우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바로 이 자리에 군단 전 장병과 지역 주민들의 뜻을 모아 1991년 11월 20일 위령비를 건립한 후 매년 주요 행사시 참배하면서 당시의 쓰라린 전훈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아픔을 교훈으로 삼아, 다가오는 미래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지난 날의 비극은 언제든지 되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의 시련의 역사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하여 숨기려 하기보다는 이를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어떠한 적의 도발도 반드시 격퇴할 수 있는 군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합니다.’
현재 이곳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현리 용포마을에 세워진 ‘현리전투위령비’는 그때에 희생된 수많은 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젊은 영령들을 위하여 깊은 애도를 표하며,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참화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문제는 정치다. <프롤로그>에서 기술했지만, 지금 이 나라의 위기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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