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萬石꾼 3대
一松 韓 吉 洙
필자의 고향인 益山시 옛 함열 읍내의 咸羅 마을은 萬石꾼이 한 동네에 셋이나 있었던 곳이다. 임피 읍내나 용안 읍내 여산 읍내에도 없는 현상이었다. 어떻게 만석꾼 3명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가능했을까. 우선 호남평야의 너른 들판이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부럼이 커야 고름도 많이 나온다는 옛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만큼 벌판이 넓어 만석꾼 셋이 토지를 나눠도 충분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두 번째 이유로는 육지뿐만 아니라 금강하구로 이어지는 바닷길 교통 즉 水運이 곡물 운반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쌀만 모아서는 부자라 할 수 없으니 이를 화폐 화 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이를 대도시로 운반하여야 한다. 그래서 금강의 波市가 열리는 우리 마을 곰개에서 서울로 곡물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돈은 사람 붐비는 곳에 몰리기 마련이었다.세 번째의 이유로는 함라 마을은 풍수지리상 명당이라고 한다. 마을을 품고 있는 함라산은 장삼차림의 스님이 두 팔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그 아래 마을은 스님이 시주를 받아 짊어지고 있는 걸망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부가 쌓인다는 길지다. 이런 여건으로 인하여 부자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곳은 조선의 풍운아 허균(1569∼1618)의 유배지이다. 1611년(광해군 3년) 한글로 홍길동전을 쓴 마흔 둘의 허균은 전라도 함열(현 수동마을 어린이집 자리)로 유배를 왔다. 자유분방했던 허균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허엽의 아들인데도 사명당 등 당시 스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가 하면 서자 출신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명색이 선비인데도 염불이나 참선에 심취했다고 한다. 절에 가면 천연덕스럽게 불공을 드렸다. 남녀관계도 거리낌이 없었다. 벼슬을 할 때 임지에 기생을 데리고 가서 살림을 차렸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인데 하늘보다 아래인 성인의 뜻이 뭐가 중요하냐는 주장이었다. 이런 파계승 같은 짓을 하다가 결국 그는 2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유배 3번 파직 6번을 당했다고 하니 괴짜요 걸작이다.
그런데 부자 3대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사실이 그러 한지 하번 살펴보기로 하자.
초대 만석꾼 李培源의 집은 이배원이 1917년에 건축하였는데 건축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담장과 대문 일부만이 남아 있다. 이배원은 만석의 도조만 받은 것이 아니라 삼성 농장을 운영하는 한편 전북축산의 대주주였으며 황등산업의 이사를 맡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배원 가옥은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그는 함라면의 대표적인 부농 중 하나였다. 이씨 집 외에도 당시 함라에는 소위 만석꾼으로 일컬어지는 두 명의 부호로 김안균가와 조해영가가 있다. 이배원의 집은 세 집 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으로 김안균가와 조해영가의 모델로 작용하였으며 평면의 구성에서도 서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는 사이에 내담을 두고 복도를 설치하여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1959년 사랑채를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하면서 분리되었고 현재 대문 좌측에는 창고가 있는데 이는 아버지 오당 李承宣이 살던 초가가 있었던 집터라고 한다.
이어서 2대에 해당하는 그의 장자인 李集阡이야기로 이어진다.
이집천은 교육사업가이자 서예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다른 3부자의 집과 마찬가지로 만석꾼이면서 자선사업을 펼쳐 노불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집천은 일찍이 일본대학 법학과 전문부를 졸업하였는데 서예에 뛰어나 선전鮮展(조선 전람회)에 입선하였다. 해방 이후 함열 중학원장과 이리농대 설립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전주방직회사 사장도 했다. 그의 유묵으로 서울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의 四海白蓮과 익산 웅포 崇林寺라는 현판글씨가 남아 있다.
이집천의 아우 이집길李集吉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음악대학을 마치고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유명한 영화배우 김진규. 도금봉 등이 모두 그의 문하생이었으며 그가 출연한 영화로 “끊어진 항로” “성벽을 뚫고” “애정산맥” “열애” 등이 있다. 함열의 삼부자 집은 베푸는 데도 너그러웠다. 보릿고개나 흉년이 들 때면 전국의 걸인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는 풍각쟁이들도 들끓었다. 판소리 명창 쑥대머리의 임방울(1904∼1961)은 조해영 가옥에서 몇 달씩 머물곤 했다고 한다. 판소리단가 호남가에 ‘인심은 함열이요, 풍속은 화순’이라는 것도 소리꾼의 헛소리가 아닌 실체가 있는 사실인 것이다.
필자가 10여세 일 때 직접 듣고 목격한 일이 있다. 하루는 여름밤인데도 날씨가 너무나 더워서 신작로 가에 있는 버드나무 밑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한 50여세 되는 과객이 우리의 피서처인 버드나무 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 자리에 3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앉아 있었으나 누구하나 이 과객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소 닭 보듯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나그네가 춘향전 한 대목을 멋지게 불러 제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재청이 들어오고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었다. 그러자 이 과객은 할 수 없이 흥부 박타는 장면과 심청전에서 심봉사 눈뜨는 장면을 고수가 없는데도 구성지게 불렀다. 이렇게 되자 이 자리에 만석꾼 이집천의 마름(舍音)이 두 사람이나 앉아서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직이 하는 신삼술申三述이라고 하는 어른이 일어나서 하는 말
“ 이것은 하늘이 내린 명창이다. 내가 내일 읍내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우선 우리
집으로 가서 쉬도록 하자“고 하면서 그 과객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명창의 성함을 모르는 것이 아쉽다.
삼부자 집의 선행은 당시 동아일보에 미담기사로 게재되어 남아있다.
“익산 함열 읍내 사는 양심 있는 부자, 구차한 사람에게 삼천 원을 기부, 걸인으로 성시成市한 함열, 밥을 구하는 수백여 명의 동포, 집집마다 과객의 답지로 대 번창’(1925년 3월 3일자).
‘빈한한 동포 위하여 집중되는 각층의 同情, 백 삼십여 명에 2개월간 배식配食하는 익산 함열 3부자’(1932년 6월 24일자).“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부자 3대 안 간다는 말이 맞다.
조국이 해방이 되자 조봉암 농림부 장관의 영단으로 법으로 소작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넘겨주고 그 토지 값으로 지가증권으로 받는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였다. 그 알토란같은 토지를 소작하던 농민들에게 넘겨주고 나니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요, 날개 부러진 독수리가 되었다.
이집천은 농지개혁이후에는 지가증권으로 전주 방직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엎친 데 덮친다고 6.25 동란이 발발하자 사업에 지장이 많아 이를 운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평소 친분이 있는 삼양사 김연수 사장에게 방직공장을 넘겨주고 말았다고 한다.
다음은 만석꾼 3대 이야기를 하여야 할 차례이다.
필자의 친구인 이기영李琪榮은 이집천의 아들로 원래 서울 명륜동에서 살았는데 일제 말기에 B29 미군기의 폭격이 심해지자 지방으로 피난가라는 조선총독부의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우리 마을로 내려왔다. 이곳은 소작인들에게서 도조를 받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는 곳인데 대궐 같은 개와 집을 새로 지어서 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모든 물자가 귀하여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에 이 친구는 혜성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목구비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세비로 양복으로 교복을 만들어서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와 우리들을 부럽게 했다. 결국 이 친구는 우리들의 스타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우리들은 고무신도 못 신고 짚신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이 자는 멋진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이 친구뿐 아니라 형인 0영과 아우 성0 등도 똑 같은 패션이어서 역시 만석꾼 자재들은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실은 많이 부러웠었다. 그러다가 8.15 해방이 되고 6.25 광풍이 불어 닥치자 이 집에도 암운이 감돌았다. 그 많이 들어오던 도조가 없어지자 만석을 쌓던 그 넓은 2개동의 창고가 깨끗이 비워 홀쭉해 지니 배를 두드리며 쾌재를 부르던 쥐들이 아우성이었다. 쥐 뿐 아니다. 쌀 창고에서 인심 난다더니 하루가 다르게 이들의 모습도 초취해져갔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이 들은 울타리 밑에 호박을 심어 열심히 가꾸더니 결국에는 부황식물로 이를 활용하여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지가증권으로는 단 하루의 식량도 되지 못한다. 옛말에 “비단이 한 끼 식사꺼리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비단을 삶아 먹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들 형제는 갑자기 쪼그라지더니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몇 년 뒤에 맨 위 두0이가 필자와 같은 중학교를 같이 다녔고 그 얼마 뒤에 동창인 기영은 함라중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기영은 필자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교는 필자의 후배가 되었다.
6.25 전란 중에 그 집 비워있는 창고에 노동당 里 사무소가 되었는지 아니면 인민위원회 里 사무소가 되었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에 우리들을 모아놓고 완장을 찬 사람들이 일을 시켰다. 그 일이라는 것은 붓글씨로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 라는 표어를 쓰는 것으로 수백 장을 썼는데 어디에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그때에 친구 집의 형편을 살펴 볼 수가 있었는데 농민의 고혈을 빨아먹은 지주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납작 엎드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살면서 호박으로 풀데 죽을 끓여서 끼니를 잇고 있었으니 만석꾼 3대의 처량한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이런 참상을 완장부대들이 보았는지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부르주아라고 특별히 핍박하는 걸 보지는 못했다.
그 뒤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필자가 서울시청에 근무할 때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두0이를 만났다. 그자는 직업도 일정치 않고 뜨내기로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고 기영이는 경찰관이 되어 무주 경찰서에 근무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0이는 원동기 면허증이 있다고 해서 필자가 구의수원지 서무계장을 할 때에 이 자를 불러 겨울(12월-이듬해 2월까지) 3개월을 시한부로 채용하여 보일러실에 근무토록 해 준바 있다. 기영이는 순창경찰서에 근무할 때에 우리 내외가 그 부근을 여행하면서 한번 만난 일이 있다. 그날 여관에서 자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눈이 발목이 빠지도록 왔는데 강천산을 구경하려고 했으나 택시기사가 미끄러워서 못 들어간다고 거절을 하기에 기영이에게 전화를 하니 경찰서 경무계장이어서 직권으로 보냈는지 백차를 보내줘서 그걸 타고 강천산을 가려고 했으나 강천호수 위 강천산 입구에서 백차 바퀴가 겉돌기에 이를 포기하고 버스로 다른 곳으로 옮긴 일이 있다.
기영의 아우 0영이는 필자가 지하철 운영사업소 총무계장을 할 때에 이 자가 이리공고 기계과를 졸업했다기에 고용직으로 채용하여 지하철 공작창에 근무토록 했는데 이 자는 본처와 이혼을 하고 혼자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얼마 후에 기영이 서울로 올라와서 노량진경찰서에 근무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만난 일이 있다. 이 사람의 큰 형 0영이는 이미 작고를 했고 이 친구도 본처와 이혼을 하고 재취를 했는데 아들 하나는 장애가 심하여 집안에서 항상 누워서 지낸다는 말을 듣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친구 기영의 말로를 살펴보기 위하여 필자가 2016년 6월 30일 펴낸 낙수첩 제6집 [내 마음의 등대]에 있는 글을 옮겨 싣는다.
<초등학교 동문인 이기영은 어느 해인가 서울로 전입하여 노량진 경찰서에서 경무계장으로 근무를 하더니 경감으로 승진하여 중부 경찰서에서 과장을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다.
이 친구는 우리 동문회 총무를 7년을 맡아서 잘 해 왔는데 메르스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뒤끓고 난리를 치던 2015년 6월 16일 갑자기 귀천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떴다. 몇몇 동문들에게 연락을 했으나 메르스 때문에 두문불출 중이라고 손사래를 치기에 나 홀로 낙수첩 제5집 [가슴에 흐르는 江] 1권을 가지고 신대방동 근처에 있는 우신향 장례식장으로 가서 영정 앞에 책을 올려놓고 술 한 잔 헌작하며 명복을 빌어 마지막 모습을 보고 왔다.
동문회에서 공금으로 조의금을 전달하여야 하나 공금을 관리하던 총무가 작고했기에 내 개인으로 조의를 표했다.
사람의 한평생이 너무나 허무하다한들 이렇게 허무 할 수가 있는가? 일정 말기 우리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멋진 양복을 입고 앳된 얼굴로 우리 반에 혜성처럼 나타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승에서 저승으로 소속이 변경되고 호적이 바뀌었으니 너무나 애석하다.
오늘날 엎친 데 덮친다고 야속하게도 비가 오지 아니하여 천하가 매 말라 목이 타는 마당에 메르스라는 전대미문의 괴질이 판치는 때여서 그랬는지 총무를 맡았던 동문의 초상마당에 찬바람이 불어 허전하였다. 이 판에 동문회비 결산이나 공금이야기는 언감생심 말조차 꺼 낼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입을 봉하고 나왔다. 아무리 회비가 공금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논하는 건 결례 중의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간 회원보다도 생존하고 있는 우리들의 행과 복이 더 많다고 자위하면 마음이 편하리라.>
성0은 필자가 퇴직을 한 뒤에 동부법원 앞의 법무사 사무소에 있을 때 여러 번 찾아 왔는데 자기는 이미 지하철 공사에서 정년퇴임을 했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하는 것이 하도 이상하여 같이 근무했던 직원에게 알아보니 치매에 걸려 혼자 이야기를 하며 혼자 웃고 다닌다고 하였다.
위와 같이 선행도 많이 했고 부잣집이니 선대의 묘소도 명당에 모셨을 터인데도 지축을 울리던 만석꾼 3대가 본처와 이혼을 하고 미친 자가 있고 장애아들이 있는데다가 일찍 타계 하는 등 모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니 만석꾼 3대인 현재의 처지를 어느 누가 부러워하겠는가.
사람은 유종의 미가 중요하다. 즉 종말이 좋아야 한다는 말인데 결국에는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인생 무대의 뒤안길로 살아져 버렸으니 한심하고 처량하고 안타깝다. 훈김이 솟던 만석꾼의 끝이 이리되었으니 유구무언인지라 더 보탤 말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