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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소식을 듣고 부두에 나온 유가족들이 울부짖고 있다. |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30분경 제주도 성산포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 중이던 정기여객선 남영호(362t)가 거문도 동쪽 33마일 해상(북위 14도14분, 동경 127도 52분)에서 침몰, 319명이 목숨을 잃은 우리나라 최대의 해상참사가 일어났다.
선박회사 측은 3개의 화물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하창(荷倉)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아 실었고,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 상자를 쌓아 실어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 중심이 15도쯤 기울었으며, 만재흘수선(滿載吃水線)이 물속에 잠겨 복원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성산항에 도착하자 다시 화물을 더 실었던 것이다.
이후 남영호가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새벽 1시 20분경 전라북도 상일도 동남 28마일 해상[쓰시마섬 서쪽 1백㎞ 해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 우현 선체에 몰아치더니 갑판 위에 쌓아 놓은 감귤 상자가 갑판 좌현측으로 허물어졌다.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지면서 선체가 기울면서 중심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남영호는 이에 정상 속도인 15마일을 10마일로 줄여 계속 항진하려 했으나, 결국 전라남도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으나 해상 부근 어느 무선국에서도 이 조난 신호를 포착하지 못했다. 당시 이 남영호는 정원이 29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311명과 선원 20명 등 331명을 태워 정원보다 41명이나 초과하였고, 당시 남영호가 출항하기 전날까지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어 4일간 제주 지역에 묶여 있던 승객과 감귤 등 화물 400톤 이상을 무리하게 실은 것으로 밝혀졌다.
남영호가 1차적으로는 하중을 감당하지 못해 전복된 것으로 보이나, 내부적으로는 선장이 항해 10일 전에 바뀌어 서귀포~부산 간 항로에 경험이 부족한 을종 2등 항해사(지금의 5급 항해사) 면허를 가진 강태수씨가 선장 임무를 맡았던 사실 또한 이 같은 참사를 있게 한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침몰 사고 당시 이 부근을 순시 항해하던 일본 해상안전부 제7관구 소속 ‘구사가키’ 순시선이 승객 최옥화씨 등 4명을 구조하였고, 뒤늦게 출동한 우리나라 경비정과 해군 함정에 의해 강봉수씨 등 8명이 구조됨으로써 남자 6명, 여자 6명 등 총 12명만 살아남고, 319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서귀항에는 임시대책본부가 설치되어 유족 1천 여 명의 애끓는 통곡 소리로 평화롭던 서귀포 지역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남영호가 떠났던 자리에는 위령탑을 세워 그 날의 원혼을 달래었고, 위령탑은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개설로 인해 서귀포시 돈내코 법성사 인근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남영호 침몰 사건은 어선 조난사고로 오인한 치안 당국의 구조작업이 늦어지면서 319명이 숨지고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는,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를 기록되었고, 이 사고로 임검 경찰관 4명이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되고 서귀포경찰서장이 입건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 최대의 해난사고로 기록될 만큼 끔찍했던 남영호 침몰 사건 이후 정부 당국에서도 해상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여객선이 대형화되고 레이더 등 안전 장비가 갖추어지면서 해상사고가 크게 줄어드는 계기를 만들었고, 해상 구조 또한 신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총 60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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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 폐암 투병 중견배우 박광정 사망 |
2004년 | 북한 개성공단 첫 제품 생산 |
2000년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영구 폐쇄 |
2000년 | 동아일보 국내최초로 신문박물관(Presseum) 개관 |
2000년 | IMT-2000 사업자에 SK텔레콤과 한국통신 선정 |
1999년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2000 프로페셔널-윈도 2000 서버- 윈도 2000 어드밴스드 서버 운영시스템 제품군 생산 |
1998년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북한방문(~17일) |
1995년 | 한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교 수립 |
1995년 |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북한과 대북 경수로공급을 위한 협정에 서명(워싱턴) |
1993년 | 영국 및 아일랜드, 북아일앤드의 평화정착을 위한 공동선언에 합의 |
1993년 |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
1989년 | 파트리시오 아일윈, 칠레 민선 대통령에 당선 |
1987년 |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서울로 이송 |
1982년 | 미국 상원, MX미사일 생산에 승인 |
1982년 | 서울서 무선호출서비스 시작 |
1981년 | 국회, 통금해제건의안 통과 |
1981년 | 폴란드 파업 전국 확산 |
1980년 | 징집연령 19세로 인하 |
1979년 | 국제사법재판소, 이란 미대사관 인질 즉각석방촉구 판결 |
1978년 | 미국-중국 국교정상화 발표 |
1973년 | 정부,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親)아랍성명 발표 |
1972년 |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 |
1966년 | 월트 디즈니 사망 |
1965년 | 동파키스탄에 태풍과 해일(약 2,000명 사망) |
1965년 | 국제 자동가입 전신(텔렉스) 업무 개시 |
1965년 | 제미니 6호ㆍ7호, 첫 랑데부 성공 |
1963년 | 일본 프로레슬러 역도산 칼에 맞고(8일) 사망 |
1962년 | NATO, 재래식 군사력 증강에 합의 |
1962년 | 영왕 이은 국적 회복 |
1961년 | 체코, 헝가리와 단교 |
1961년 | 유태인 학살범 아이히만,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 선고 |
1959년 | 나토이사회 개막. 유럽 핵전략군 창설 결의 |
1958년 |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파울리 사망 -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발견해 194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955년 | 유엔총회, 유엔군묘지 한국내 설치를 건의 |
1955년 | 국회 무소속구락부, 헌정동지회로 발족 |
1954년 | 기독교방송 개국 |
1953년 | 중앙아프리카연방 제1회 총선(18일 연방정부 성립) |
1953년 | 제1 야전군사령부 창설 |
1951년 | 미국 국무성 고문 덜레스 방한 |
1950년 | 유엔 한국휴전3인위원회, 유엔군사령부대표와 협의 |
1948년 | 중국군 북경 입성 |
1939년 | 총동원물자사용수용령 공포 |
1932년 | 멕시코, 국제연맹 탈퇴 |
1928년 | 구세군 자선냄비, 한국에 첫 등장 |
1927년 | 방글라데시에 폭풍으로 1만명 사망 |
1927년 | 중국, 소련과 단교 |
1921년 | 특허법시행령, 특허등록령 공포(1922.1.11 시행) |
1921년 | 워싱턴회의서 미국-영국-일본 해군감축 결정(미국5, 영국5, 일본3. 주력함 보유율) |
1918년 | 손병희 등 천도교 인사 상춘원에서 독립운동 밀의 |
1913년 | 한강철교 복선화 완공 |
1910년 | 일제 범죄즉결령 공포 |
1907년 | 영왕 이은, 이등박문에 끌려 일본도착 |
1902년 | 프랑스 식물학자 피에르 알렉시스 미야르데 사망 |
1890년 | 인디언 수우족 대추장 시팅불 피살 |
1887년 |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출생 |
1859년 | 에스페란토어 창시자 자멘호프 출생 |
1852년 | 방사능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헨리 베크렐 출생 |
1832년 | 프랑스 건축가 에펠 출생 |
1423년 | 충청도 청주 지진 발생 |
37년 | 로마제국 제5대 황제 네로 출생 |
[출처] 본 게시물은 조선닷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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