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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물관
배가 지나갈 때 다리 상판을 들어올리는 부산 영도다리의 옛 모습. 국제신문DB |
- 전쟁 중 헤어진 가족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피란민들 다리로 모여…일대 점집 성행하기도
- 전국서 몰려든 피란민, 부산지역 산 곳곳에 터닦고 새로 뿌리내려 희망의 불씨 다시 태워
- 1950년대 잇단 대화재…한때 불의 도시로 악명
- 가마솥 뜻하는 한자 탓, '釜'→'富' 변경 주장도
부산은 대한민국이 다시 태어난 곳이다. 해방 후 오갈데 없는 일본과 만주지역 귀환동포를 품었고 6·25전쟁 때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8도 피란민을 끌어안았다. 부산은 '가마솥(釜)'을 뜻한다. 외국인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다. 1959년 부산 남구에 신부로 부임한 이후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평생을 바친 독일인 하 안토니오 몬시뇰(천주교의 명예 고위 성직자 칭호)은 "솥이란 먼저 밥을 짓는 그릇이다. 우리 부산 시민은 커다란 솥 안에 함께 들어있다"고 강조했다.
■만남의 광장 1호, 영도다리
도개식 영도대교 기념비. |
부산 중구와 영도구를 잇는 영도대교 위에는 국내 최초의 도개식 다리 기념비가 서있다. 현재 영도대교 복원공사로 창고에 보관 중이다. 정식 명칭은 영도대교이지만 부산 시민에게는 영도다리가 훨씬 더 친숙하다. 1934년 완공된 이 다리는 당시 상판의 일부를 80도까지 들어올려 배를 지나가게 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늘어난 교통량으로 1966년 도개가 금지됐고, 한때 철거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부산 시민들은 이 다리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부산시는 2002년 철거가 아닌 복원을 결정했다.
영도다리는 험난했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호흡하며 부산의 기억을 담고 있다. 영도다리는 피란길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피란민들의 '만남의 광장'이었다. 부산으로 몰려든 수많은 피란민들이 전쟁 중에 헤어진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 다리 밑으로 모였다. 김희재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리운 누군가를 그리는 8도민의 눈물로 부산 앞바다가 더욱더 푸르러졌을 이곳, 영도다리는 우리나라 1호 만남의 광장이었다"고 설명했다.
■"지푸리기라도 잡자" 영도다리 점집
6·25전쟁 당시 영도다리에만 가면 헤어졌던 가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피란민들이 다리 근처를 메웠다. 어떤 이는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오늘도 만나지 못한 누군가를 기다리던 많은 피란민들은 다리 밑에서 점을 치며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이산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바치골목을 찾았다.
만난 사람들보다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아서였을까. 한때 다리 밑에는 점집 50여 개 가 성행했다. 영도다리는 갖가지 사연과 눈물이 넘쳐 흐른 시대의 상징이었다.
■부산의 피와 살로 키운 희망의 불씨
광복 직후 귀환동포들이 부산항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들 상당수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부산에 정착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터졌다. 8도민들은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몰려든 8도 피란민 수는 부산에 살고 있던 인구와 맞먹었다. 1949년 47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1951년 84만 명에 달했고,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
피란민들은 부산으로 내려와 산꼭대기든, 무덤가든 누울 수 있는 곳이면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이름만큼이나 산이 많은 부산은 깊고 많은 산에 8도 사람을 품어 안았고, 부산의 산림은 베어지고 피란민의 판잣집으로 채워졌다. 생활 터전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온 피란민에게 부산은 산을 깎아 살 곳을 내주고, 항구를 열어 일거리를 준 희망의 땅이었다.
어려운 시기마다 부산은 절망의 끝에서 힘을 잃고 밀려나온 이들을 기꺼이 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희망의 불씨를 키웠다. 이것이 부산의 역사이자 정체성이다. 박재환 부산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부산에서 한솥밥을 먹은 전국의 피란민은 그 후 한국의 현대사를 이끌어온 서민의 원형"이라며 "그들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때, 부산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출신지역 차이나 빈부 구별을 넘어 함께 살아남은 '끈질긴 민중'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불의 도시 부산은 '불산'
부산은 불의 도시로 악명을 떨쳤다. 무허가로 만들어진 판자촌은 화재에 속수무책이었다. 불이 나면 대형 화재로 번졌다. 1952년 11월 27일 국제시장 대화재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3년 1월 30일 국제시장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해 2366세대가 소실되고 수많은 이재민이 생겼다. 1953년 11월 27일에는 부산역전에서 큰 불이 나 2000여 가옥이 불에 타고 3100명의 이재민을 낳았다. 급기야 1954년 12월 10일에는 용두산공원 판자촌에 대화재가 발생해 8000여 명이 엄동설한에 거리로 내몰렸다. 부산이 '불산'으로 불리거나 부산의 '釜'자가 가마솥이어서 불이 잘나므로 '富'자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부산 화재예방기도대회비
- '火'자 사방에 '水'자 새겨 1955년 부적형태로 세워…이후로는 대형화재 잠잠
부산 용두산공원 화재예방비. 곽재훈 기자 kwakjh@kookje.co.kr |
6·25전쟁을 전후해 부산에 대형 화재가 잇따르자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1955년(단기 4288년) 정월 대보름에 맞춰 화재를 막기 위해 부적 형태의 비석을 세웠다. 중구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뒷편 야산 자락에 있는 '화재예방기도대회비(사진)'가 그것.
비석은 가운데 불 '화(火)'자 주변에 물 '수(水)'자 4개가 동서남북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것이다. 비석 밑에는 경남도시자, 부산시장, 국장, 서장 등의 기관장 이름이 기록돼 있다. 향토사학자 주경업 씨는 "산꼭대기까지 닥지닥지 붙은 부산의 피란민 판자촌으로 인해 화재가 자주 발생해 시민들이 불안에 떨었다"며 "기관장들이 직접 나서 화재를 막기 위한 비석을 세운 것을 보면 시민의 삶을 책임지는 기관장으로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석을 세운 뒤에는 다행히 큰 불이 나지 않다고 한다. 비석 앞면에는 '용두산 신위'가 적혀 있다.
이 비석을 관광상품화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강석환 대표는 "이 비석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엮고 火, 水자 모양을 본 뜬 기념품을 만들어 용두산공원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에게 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부산의 대표 먹거리
- 밀가루로 만든 냉면 '밀면', 인스턴트 라면까지 진화
부산 밀면의 원조 '내호냉면'. |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인 밀면은 6·25전쟁 중 부산에서 탄생했다. 부산으로 피란온 이북 사람들이 고향 음식인 냉면을 당시 실정에 맞게 밀가루로 만든 것이다. 당시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미군에게서 배급을 받아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밀가루를 넣어 만든 것이 바로 밀면이다. 밀면은 냉면과 맛이 다른 데다 가격도 싸서 인기를 얻었다.
함경도 흥남 내호에서 냉면집을 하던 친정어머니와 함께 피란온 정한금 씨가 1952년 부산 남구 우암동에 '내호냉면' 가게를 열면서 부산의 밀면 역사가 시작됐다. 현재 가야밀면 개금밀면 국제밀면 영남밀면 등이 부산의 유명 밀면집으로 소문이 나있다. 한국야루크트는 지난해 5월 쫄깃한 면말과 매콤새콤한 육수로 '팔도가 찾아낸 부산의 별미, 부산밀면(사진)'이라는 인스턴트 라면을 선보였다.
부산 대표 음식인 돼지국밥 역시 6·25전쟁 속에서 태어났다. 피란민들이 소뼈 대신 돼지 부산물로 설렁탕을 만들어 먹은 데서 뿌리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대표음식 이야기' 2009년)
한편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수거해 끓여 파는 '꿀꿀이죽'(일명 유엔탕)은 몸이 재산인 부산항 부두노동자나 지겟꾼에게 영양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공동취재=조현영 부산대 사회학 석사과정
국제신문·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