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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르코 10장 46-52절
꽃거지
수난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지나가십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습니다.
헤로데는 온난한 기후의 이 도시를 유흥과 환락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리코에는 부자들의 호화주택들이 즐비했고 그들을 위한 극장과 경마장, 수영장 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보로 약 30분정도 걸리는 예리코 시내를 거쳐 가셨습니다.
당시 예리코는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객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었습니다.
거지들 입장에서 볼 때 예리코는 물좋고 목좋은 자리였던 것입니다.
한 눈먼 거지가 예리코 대로변에 앉아서 순례자들을 향해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였습니다.
통상 복음서에 거지의 이름까지 명기하는 법이 없는데 복음사가들이 바르티매오의 이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는 당시 거지 중의 유명한 거지였습니다.
특별히 잘 나서 돈벌이를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기로 유명했던 거지였습니다.
요즘도 그러하겠지만 당시 거지에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우선 건강해야지 기동력이나 상황판단력을 보유해 ‘고객 확보’도 잘 할 수 있고 수입도 많이 올려 시쳇말로 ‘꽃거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우선 시각장애우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다보니 여러모로 불리했고 다른 건강한 거지에 비해 우선 경쟁력이 떨어졌습니다.
그저 ‘착한 고객’의 동정심과 자비심에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재수 좋으면 한푼 벌어 한끼 때우고 그렇지 않은 날은 쫄쫄 굶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당시 거지 중의 상거지 가장 등급이 낮은 거지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뒹굴던 바르티매오였습니다.
삶의 가장 막장, 극단적 처지까지 몰린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황 극복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절대자 하느님, 크신 자비의 하느님 손길만이 자신을 구하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바르티매오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메시아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기적같이 삶이 환해지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바르티매오의 인생 역전은 그냥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르티매오의 마음은 새 삶을 향한 절박함, 간절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체면도 뒷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만을 신뢰하며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뿐만 아닙니다.
“그를 불러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르티매오는 입고 있던 겉옷을 던져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보면 꼬질꼬질한 냄새가 풍기는 변변치 않은 겉옷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 입장에서 보면 거의 전재산, 아니 분신같은 겉옷이었습니다.
노숙할 때 때로 추위도 막아주고 때로 이불역할도 하던 소중한 삶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새로운 가치관이자 새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과거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것입니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크게 버려야 함을 바르티매오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바르티매오는 평생에 걸쳐 준비해왔던 대답을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육체의 빛, 세상의 빛만을 되돌려주신 것이 아니라 더 가치 있는 빛, 초자연적인 빛, 영적인 빛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은총의 놀라운 빛을 선물로 받은 바르티매오는 곧바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믿음의 수준은 무엇까지 희망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자비를 청한다는 말은 이미 자비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희망하는 능력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희망한다고 다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육체와 머리의 생각보다 더 강력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위협이나 나의 생각이 그 희망을 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목숨을 걸 수 없으면 희망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희망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그 희망이 곧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이 브라유는 세 살 때 사고로 실명을 하였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과 빛을 가져다 준 인물입니다.
그의 삶과 점자 발명의 과정은 희망과 인내의 진정한 본보기입니다. 루이 브라유는 1809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쿠브레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구를 만드는 가죽 장인이었고, 루이는 종종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놀곤 했습니다.
그러나 세 살 때, 루이는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가죽 송곳에 찔리는 사고를 당하여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염이 반대쪽 눈으로 퍼져 결국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루이의 부모와 본당 신부는 루이를 보통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루이도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학교에서 안 받아들여 줬지만, 루이는 결국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로얄 인스티튜트 포 블라인드 유스(Royal Institute for Blind Youth)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학습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은 글자가 양각으로 되어 있어 한 손으로만 읽어야 했고, 크고 무거워서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루이는 이러한 한계를 느끼며 시각장애인들도 효율적으로 읽고 쓰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1821년, 프랑스를 방문한 군인 찰스 바비에(Charles Barbier)는 야간 전투 중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던 ‘야간 문자(night writing)’라는 체계를 루이의 학교에 소개했습니다.
바비에의 체계는 12개의 점을 이용하여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나, 복잡하고 사용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루이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더욱 단순하고 효율적인 점자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는 바비에의 체계를 개선하여 6개의 점으로 구성된 점자를 고안해냈습니다. 이 점자는 각 문자를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1824년, 15살의 나이에 루이는 자신의 점자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점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루이는 자신의 발명을 널리 알리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점자 체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음악 기호와 수학 기호도 개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점자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독립적으로 학습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점자 체계는 결국 1854년, 루이가 사망한 지 2년 후에야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루이 브라유는 두 눈을 잃고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꿈을 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 자비의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랑의 행위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믿음과 희망이라는 두 날개로 위로 솟아오릅니다. 구원은 무엇에 의해 이뤄질까요?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생존하려고 선악과를 바치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백성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더 위대하고 영적인 것을 갈망하라고 말합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순수한 젖이란 엄마의 살과 피입니다. 곧 우리에겐 성체성사가 됩니다. 하느님의 진짜 자녀, 곧 자신도 하느님이기에 불가능이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이는 마치 넬슨 만델라처럼, 아니면 위 루이 브라유처럼 절망의 상황에서도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매일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넬슨 만델라는 희망을 위해 27년간을 쉬지 않고 준비했다고 말합니다. 매일 운동하고 공부하였습니다. 우리 하루하루의 삶도 믿음이 있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0,46-52: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경 바르티매오라는 걸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바르티매오는 큰 영화를 누리다가 몰락한 가문의 사람으로, 눈이 먼 채 주저앉아 구걸까지 해야 하는 거지가 되어 버린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눈먼 바르티매오는 타락한 인류의 비참하고 무력한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바르티매오는 예리코의 북쪽 문 곁에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나 군중에게는 그 소리가 방해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렬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 인도되고 치유를 받는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자신들도 그러한 광경을 보고 또 기회가 되면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기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한 자세로 주님께 다가갔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 없다. 그렇기에 소경이 떠드는 것이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달랐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고, 필사적인 결단과 행동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갈 때 발에 걸리는 겉옷까지 벗어버렸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소경은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갖는 사람만이 용감히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분을 따라나서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은총은 우리의 응답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초대와 약속은 인간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여하에 따라 생명이나 죽음이냐가 갈라진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것이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주님의 명령은 눈을 밝혀 주었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잘 보지 못했던 우리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을 잘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힘을 받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어두운 정신에 빛을 주시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신 분을 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제 눈의 안개처럼 시각을 방해하는 어둠인 우리의 묵은 나를 떨쳐버리고 빛을 선택하여 빛이신 그분을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인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며 시련의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선사 시대에 인간은 정말로 최약체 동물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빠르게 달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속에서 살 수도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약함으로 인해 지금 인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을 형성했던 공룡, 맘모스 등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고통과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류의 발전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통이 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통을 싫어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마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자기 안의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이 생각이 가까운 사람에게도 확장되어서, “내 아이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고통이 없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요? 고통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집착하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고통과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건강검진 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운동하지 않았지만, 건강을 위해 하루 1시간 만이라도 운동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첫째 날 운동하기가 쉬웠을까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둘째 날, 온몸이 뻐근하고 힘듭니다. 그래도 버텨서 해 봅니다. 셋째 날, 작심삼일을 떠올리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 선생님께서 운동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으니까요.
힘들어도 목표가 있으면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처음에는 멀고 힘들어도 점차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고통과 시련도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목표를 갖게 되면서, 고통과 시련 너머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그때 거부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닌, 우리의 목표인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스탕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것을 갈망하십시오.”(1베드 2,2)
아직 갓난아이인
우리에게는
영적이고 순수한 젖이
필요하다네.
그러므로 우리는
단 꿀 같은 영혼의 젖인
성령의 젖을
늘 갈망해야 한다네.
그 젖이
넘쳐흐르는 곳이
하느님의 품안이며
지상의 낙원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을 마음과 맞닿게 해 줍니다.
자비가 있으면 바로 행동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자비가 없으면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자비는 내 마음과 정신,
전 존재로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행동 안에서 드러나기에
우리는 행동 안에서 자비를 관상할 수 있습니다.
자비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는
머리로 이해타산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실리를 먼저 따져 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관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하루도 눈먼 사제인 제가
주님께 겸손되이 자비를 청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고스란히 베풀어
사람을 살리는 사제가 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복음말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