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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묵상글 (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보는 것을 보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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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보는 것을 보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옛 예언자들은 제자들이 보고 있는 당신을 보고자 하였지만
보지 못한 것에 비해 제자들은 그들이 못 본 당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가 보는 것을 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지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는데 요즘의 나는 무엇을 보나?!
이번 대림절을 앞두고 대림절의 실천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같이 사는 형제가 이번 대림절엔 술을 끊겠다고 한 것에 자극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저는 술을 줄이기는 해도 끊을 생각이 없고,
오히려 유튜브 보는 것을, 더 정확히 얘기하면
시사 토론 유튜브 보는 것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지 않았었고,
오히려 무슨 수도자가 유튜브를 보냐며 언짢게 생각했으며,
유튜브 중독인 사람들을 일종의 맹인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었지요.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봐야 할 눈으로 특정 유튜브만 보면서
복음적인 시각은 잃고 그 유튜브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튜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유튜브도 많은데 특정 유튜브에 세뇌되는 것이 나쁘고,
특정 유튜브도 복음과 거리가 먼 유튜브가 나쁜 것입니다.
늘 기도하셔서 제가 존경했던 수사님,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수사님이 돌아가시기 2년 전부터
유일하게 보시던 뉴스마저 끊어버리고 기도만 하셨지요.
저와 결핵환자들을 돕다가 전염된 결핵이 나이 드시자
재발하여 돌아가시게 된 것인데 약을 드시라고 해도
약을 드시면 졸려서 기도할 수 없다고 드시지 않으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관구장의 명이라며 약을 드시게 하였지만,
어쨌거나 그 정도로 온전히 기도에 몰두코자 하셨는데,
저는 나이 먹을수록 끊어야 할 유튜브를 오히려
안 보다가 보고 있으니 제가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 대림절에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내가 보는 것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대림절에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내 눈이 썩은 동태 눈은 아닌지 점검하고,
얼른 성령의 눈을 지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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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기쁨과 감사를 지녀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로 그 뜻을 우리가 모른다 할지라도 그 뜻이 선하신 것만을 믿으며 의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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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을 떠야 하고 귀가 열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이면 꼭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꼭 들어야 할 말을 듣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 입니다. 세상의 지혜나 율법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느님만을 의지 하여 그분의 보살핌을 바라는 철부지는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는데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는가!”(김정원신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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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부족한 지혜와 경륜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것을 뜻합니다. 신부님들의 좋은 강론을 듣는 것은 제게는 ‘타산지석’의 기쁨입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심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동양인 대학생과 서양인 대학생을 상대로 ‘장점’을 칭찬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서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신의 장점을 자신 있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별 것 아닌 것처럼 겸양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하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할지라도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독일인들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가 확실하게 되니 깨끗하게 인정하면서 전쟁을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패배가 확실했음에도 ‘옥쇄’ 작전을 펼치면서 연합군을 당황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를 연구한 책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입니다. 서양의 문화와 역사의 근간이 되었던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은 어떤 사상적인 바탕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종의 비유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은 동양적인 사상과 더 친밀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김재덕 신부님의 ‘예수님과 만난 여인들’ 중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또한 제게는 ‘타산지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방법이 아닌 것으로, 은총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사제의 바람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좋은 성적으로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더욱 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유학 갔다 온 모든 사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미 같은 과목의 신부님이 신학교에 있는 경우도 있고, 신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실망하기 보다는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했던 그 일들이 나중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커다란 자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작은 성당에서 기쁘게 살았고, 최선을 다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나중에 교구청에서 지낼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는 몹시 아팠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청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은총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믿음은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빠가 죽어서 원망스러울지라도 지켜가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우선 될 수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끝까지 지키고, 간직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다른 것과 바꾸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정말 은총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얻은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을 하찮은 것들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믿음은 항구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상처를 받아서. 미워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일지라도 소처럼 우직하게 믿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유 없는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이 클수록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매 미사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을 보시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십니다. 나의 기도를 보시고 누군가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보시고 죄인을 구하십니다. 나의 기도가 누군가를 살린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기도와 믿음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인들의 통공을 청하며,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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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과연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 안에서 기쁨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쁨 때문에 감사와 찬미가 연신 쏟아져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즐거움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는 물이 아닌 언제든 제 안에서 솟아오르는 샘물 같은 것임을 저는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복음에서의 ‘성령 안에서의 즐거움’이 그런 것이라면 저는 주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와 어둠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던 인간을 다시 하늘나라로 받아들이기로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끝없는 죄는 끝없는 용서로.
끝없는 미움은 끝없는 사랑으로
끝없는 교만은 끝없는 겸손으로
그리고 이러한 용서와 사랑과 겸손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찬미하십니다. 다시 하늘나라를 열어주심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의 열림을,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하늘나라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우리 앞에서도 팔을 벌려 십자 나무 위에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불평불만을 하기보다는….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것이 주어졌다.
나에게 어떤 것이 없는지 생각하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헬렌 켈러-
그대에게는 많은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따뜻함이 주어져 있습니다.
친절함이 주어져 있습니다.
희생하는 마음이 주어져 있으며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정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늘 그렇지는 않겠지만.
늘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주어져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주어져 있는 것을 더 예쁘게 가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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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흥미로운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문에서 한 사람을 맞이하면서 말합니다.
“자, 이제부터 당신이 살면서 행한 착한 일들을 모두 말해 보시오. 그리고 점수를 합산해 봅시다. 합산한 점수가 1,000점이 넘으면 즉시 하늘나라에 갈 것이오.”
“저는 15살 때부터 매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큰 계산기를 꺼낸 베드로는 “이것은 0.5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저는 묵주기도를 자주 바쳤습니다. 10만 단쯤 될 겁니다.” “이것은 0.75점입니다.” 또 말 했지요. “성찰하면서 회초리로 제 등을 수없이 매질했습니다.” “0.8점 주겠습니다.” “성인전을 읽었습니다.” “0.9점 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선행을 베드로 앞에서 고백했지만, 점수 얻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5시간 내내 말한 뒤에 얻은 점수는 고작 20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아이고, 이건 정말 불가능하잖아요. 당신이 저를 하늘 나라에 집어넣어 주시지 않으면, 제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바로 그 순간 종소리가 울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000점 받았습니다. 이제 하늘 나라에 들어가시오.”
주님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자기 공적만으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철부지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를 통해서 또 본인의 열심한 생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별것 아닌 철부지의 모습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넓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우리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 사랑의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을 믿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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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오류로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진실에 이르는 길은 단 하나이다(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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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성령님
-행복한 사람들이여, 성령께 마음을 열라!-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
위로자신이여, 주님 찾는 슬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맘의 위로자여”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오소서 성령이여”, 성가 142장 1절이었습니다. 이어 7절까지 성령 칠은을 청원하는 내용이 계속됩니다. 위 1절의 1.주님 찾는 슬기에, 2.맑은 지력, 3.바른 의견, 4.굳센 의지, 5.깊은 지식, 6.타는 효성, 7.두려움의 은혜등 성령칠은 얼마나 좋습니까! 시간 되는대로 성가 142장 7절까지 불러 보려합니다. 수도원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 서원식때 주로 전 공동체가 부르는 성가입니다. 새삼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 살아야함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성탄 밤미사때 독서의 기도때 독서자가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성령에 감도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흘러나오는 참 아름다운 고백이요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위에 선물처럼 하사되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 의 영이 머루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용맹의 영”
가톨릭 교회는 여기에 일곱 번째로 “자비의 영”을 추가하니 비로소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 목록이 이뤄집니다. 참 좋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선물중의 선물이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사랑, 우리의 희망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령의 은총선물뿐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에 따른 성령 충만한 삶이요 참으로 간절히 청할바 성령칠은의 은총의 선물이니, 늘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초겨울이 되면 떠오르는 “겨울나무”라는 자작시입니다. 흡사 하늘 향해, 성령께 활짝 마음을 연 가난한 영혼을 상징하는 기도하는 겨울나무같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참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떠나자
떠나 보내자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아름답게
나 늘 푸른 사철나무보다
잎들 다 떠나 보낸 겨울나무가 좋다
가난한 겨울나무앞에 서면,
왜 이리 마음 저릴까
왜 이리 부끄러워질까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무수한 나뭇가지들
참 간절한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觸手)들!
그대로 침묵의 기도하는 겨울나무로구나
하늘 님 향해 쭉쭉뻗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내 그리움의, 기다림의 무수한 촉수(觸手)들!
나도 그대로 한 그루
기도하는 겨울나무로구나
나도 그대로 그리움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구나
다시 배우는 침묵의 기도, 기도하는 겨울나무가 된다
나는!”-2000.11.29.
23년이 지난 지금도 초겨울 배밭을 지날 때마다 마음 저리게 와닿은 겨울나무라는 시입니다. 겨울되면 하늘 성령님께 활짝 마음을 연 가난한 겨울나무가 되어 살고 싶은 것은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들 누구나의 간절한 꿈이자 소망일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여 바치는 이사야의, 주님의 종의 시가, 노래가, 평화의 꿈이 참 마음 설레게 합니다. 어제 봉사자 피정지도시 배밭봉사 세 자매들에게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하늘 안 배나무들 가지들 마다 봄에 흰봉지에 배열매의 무수한 흰별들을 달았다가, 가을에 익은 흰별들을 딴 자매님들! 감사드리며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자매님들은 수도원 배나무의 어머니들입니다.”
평화의 혁명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아마도 하늘 나라를 꿈꿨던 우리 예수님께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이사야서 시 전문(이사11,6-9)을 인용합니다. 이사야같은 예언자는 부단히 하늘나라를 꿈꿨던 꿈의 사람이자 불세출의 시인이요 신비가이자 영성가임을 깨닫습니다. 대림시기 우리가 부단히 꿈꾸고 실현시켜야 할 평화의 하늘나라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 아이가 그를 몰고 다니니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이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유토피아 이상향인지요! 완전히 실현된 평화의 왕국, 하늘나라를 상징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젖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대목에서 보다시피 창세기에서 시작된 인간과 뱀의 적대관계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대림시기를 맞이하여 성령충만한 삶을 원하는 우리 내면의 평화를 상징하는 참 아름다운 예언적 영감들로 가득한 시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이 은총의 대림시기, 여기서 참으로 하늘나라의 평화의 꿈을 실현하며 살도록 합시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우리 주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성공적인 복음선포의 보고를 듣고 성령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칩니다. 21절은 공관복음에 전해오는 단 하나의 예수님의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듯 이루어졌습니다.”
제1독서의 주님의 종, 이사야와 쌍벽을 이루는 성령충만한 사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의 참 좋은 아버지가 되는 하느님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이 우리 역시 참으로 천상 지혜를 가득 지닌 철부지들, 순수한 영혼들로 살게 합니다.
대우(大愚)가 대지(大智)이니 그대로 역설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크게 어리석은 듯 하나 크게 지혜로운, 참 거룩한 바보가 성령충만한 철부지들이요 은총의 대림시기 이렇게 살도록 성령의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날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은총의 대림시기를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께서 주시는 다음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심기일전, 용기백배하여 다시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시니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ㄴ-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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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5.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거짓 살길에서 참 살길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살길을 가지고
그러그러 살아가니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살길들이 얽히고 얽혀
사람 사는 세상 이루지요
누군가의 살길이
모든 이에게 살길이라면
참으로 좋으련만
안타깝지만 너무 흔히
누군가의 살길이
누군가에게는 죽을길이네요
누군가에게 죽을길이
누군가의 살길이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 살길에만 눈이 멀어
저로 말미암은 죽을길 보지 않네요
어차피 이리 된 세상
나도 그대도 덩달아서
제 살길만 보고 갈까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우린 안 그럴 거잖아요
홀로라도 제 살길 찾는 이의
손가락질에 짓이겨져서
힘없이 쓰러지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죽을길인
저만을 위한 거짓 살길을
우리 먼저 끊어야지요
다른 이의 죽을길 마다 않는 이의
비웃음에 누더기가 되어
더 이상 나갈 수 없다하더라도
누군가의 죽을길마저 살려낼
모두를 위한 참 살길로
우리 먼저 나서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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