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성문
Outside East Gate, Seoul. Note trolley tracks, 1899.
모펫의 사진은 하나 하나가 모두 구한말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들입니다.
위의 사진은 1899년 동대문의 바깥쪽 풍경을 찍은 것입니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옹성 출입구를 지나면 동대문의 출입문이 보입니다. 이 사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동대문 앞으로 깔려 있는 전차가 다니는 레일입니다. 이 사진으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당시 한양에는 이미 전차가 운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습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의거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 도성의 동쪽 대문입니다. 인(仁)은 동쪽에 해당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자를 붙었고,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달리 이름이 네 자인 것은 한양 동쪽 산인 타락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하나 더 더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고 하였는데, 동쪽의 타락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북악산이 이에 해당합니다.
Inside the East Gate, Seoul
사진은 동대문 안쪽 거리 모습으로, 기다랗게 난 길을 따라 초가집과 기와집이 뒤섞여 있습니다. 지금 위치로 어디쯤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동대문은 한양의 다른 성문들과 함께 조선 태조 때인 1398년(태조 7년)에 세워졌습니다. 도성의 성문답게 석문을 쌓고, 그 위에 이층 문루를 세웠습니다. 또 이 대문은 한양의 사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甕城)을 만든 성문으로, 당시 조선이 동쪽의 방어에 크게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53년(단종 원년)에 고쳐 지었고, 1869년(고종 6년)에 새로 세워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West Gate, Seoul
서대문의 모습입니다.
돈의문(敦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 흔히들 서대문이라 부릅니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고, 한양 도성의 4대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난를 겪었습니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이 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은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세종 4년(1422년)에 도성을 새로 고칠 때 다시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세종 이후의 돈의문을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단지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4대문의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북문과 동문 사이에 혜화문(惠化門-東小門), 동문과 남문 사이에 광희문(光熙門-水口門)을, 남문과 서문 사이에 소의문(昭義門-西小門), 서문과 북문 사이에 창의문(彰義門)을 두었습니다.
서소문이라 부르는 소의문(昭義門)은 소덕문(昭德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이 문은 지금의 서소문동 큰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이 문 역시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어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입니다.
South Gate, Seoul
이제는 불타버린 숭례문(남대문)의 옛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세로로 쓴 '숭례문(崇禮門)'이라 쓴 현판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우진각지붕의 누각형 2층 건물입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도 합니다.
이 성문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방화로 불타기전에는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며, 태조 4년(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년)에 완성하였습니다. 그 후 세종 29년(1447년)에 고쳐 지었고, 성종 10년(1479년)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Little North Gate in Seoul, circa 1890
서북문인 창의문(彰義門)의 모습입니다.
창의문(彰義門)은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태종 16년(1416년)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년)에 다시 열었다고 합니다.
인조반정(1623년)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합니다. 이런 사연으로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Water Gate, Seoul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문(五間水門)의 모습입니다.
사진에는 홍지문을 중심으로 오간수문과 한양 도성과 연결된 탕춘대성(蕩春臺城)이 보이고 짐을 실은 말들도 보입니다. 이 당시 산 능선에는 나무가 그다지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탓입니다. 이 당시엔 취사와 난방을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거지역 가까이 있는 산들 대부분이 이처럼 천둥벌거숭이였습니다. 1921년 8월 홍수로 오간수문이 무너졌는데, 이 일도 이 같은 산림벌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홍지문을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문은 인왕산 뒤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이 문루와 함께 설치되었던 오간수문은 1921년 8월의 홍수로 붕괴되었던 것을 1977년 무지개 모양의 다리인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습니다. 이곳은 세검정 홍제천을 끼고 있으며, 주위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이 있습니다.(펌)
첫댓글
감사합니다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산수호님
감사합니다
건행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