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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인포스피어와 최한기의 기학(氣學)
이 성긴 연결에 좀 더 세부적인 내용을 제공할 수 있는 전근대 동아시아 학자가 있다. 한국철학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일, 19세기 학자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 1803~1877)다. 최한기는 조선의 상업특구였던 개성(開城)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서울 지역에서 생활하며 평생 독서와 저술에만 몰두한 독특한 재야의 학자였다.
가문과 사승(師承) 관계에 따라 복잡한 학맥이 작동하고 있던 19세기 조선의 지식장 안에서 특정한 학맥에 속해 있지 않았던 최한기는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인 학문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의 차별성은 단순히 특정 학맥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을 넘어 당대 조선 유학자들과는 다른 지적 자원을 통해 독자적인 학문을 구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최한기는 당시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유입되던 새로운 학술과 서적들을 과감하게 수용했고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저술에 활용한다. 최한기가 특히 몰두했던 지적 자원은 당시 중국에서 유통되던 서학서(西學書) 즉 기독교 전파를 위해 16세기 이후 중국에 들어와 당대 서양 철학과 자연학, 수학 등을 중국어로 번역했던 서양 선교사들의 번역서들이었다. 최한기는 당시 그가 접할 수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서학서를 백방으로 구해 읽고 자신의 관점에서 깊이 연구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 유학의 저술 형식과 계보를 넘어서는 독창적인 저술을 내놓았다.
당시 최한기는 이미 동양 전교의 주도권을 잡은 개신교의 활발한 중국 내 활동에 힘입어 상당히 세분화된 분야까지 새로운 과학적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최한기는 이 책들을 자신의 지적 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전통적인 유학의 가치와 이념을 월경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 서양 과학을 결합할 수 있었다. 동시대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서양 과학을 적극적으 로 수용했던 최한기는 서양의 분과 학문과 실험을 통해 ‘기’를 실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근 기(氣)의 형(形)이 모든 기계의 시험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고, 기의 신(神)이 도주(陶鑄)의 운화(運化)로 창달되었다. 질(質)에 형(形)이 있으며, 신(神)이란 어느 한 사람이 창시한 것이 아니며 천하에서 현명하고 해박한 자들이 함께 밝혀낸 것으로, (이로 인해) 체용이 겸비되고 만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한기는 단순히 기를 중심에 둔다는 의미를 넘어 기를 보편학의 차원에서 원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를 분과 학문들로 확장하려는 일종의 보편학으로서 ‘기학(氣學)’을 제안한다. 최한기가 제한하는 ‘기학’은 단순히 이기론에서 기의 차원을 강조하는 ‘기의 학’이 아니다. 최한기의 기 개념은 성리학의 전통적인 기 개념을 벗어나는 독특한 층위와 문제의식에서 발현된 개념이기 때문이지만 더 나아가 최한기 자신이 이 이름을 자신의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 보편학적 위상으로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기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는 자신의 구상을 ‘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이름에 담는다. 본래 동아시아에서 기는 인간과 사물을 모두 포괄하는, 물질이자 생명성이자 역량으로 간주되었지만 최한기가 구상한 기는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원리나 혹은 개체화된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한기는 가장 구체적인 단계의 물리적인 매커니즘에서 기의 실질을 확인하고자 했다. 따라서 기학의 기는 이기론의 기처럼 형이상학적 특성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연계의 운동과 변화에 대한 설명항을 넘어 인간의 인식과 판단 차원에도 기라는 개념을 동일하게 적용한다.
전통적으로 기는 관계이고 패턴이며 양상이자 신호였으나 최한기는 이 패턴을 최상위 수준까지 추상화한다. 정보철학에서 정보가 최상위에서 만사만물(萬事萬物)과 그 역동적 작용과 현상을 포괄하는 기준이라면 최한기의 체계에서 기가 그와 유사한 개념적 역할을 한다.
거칠지만 최한기의 이론적 기획을 정보철학과 관점과 비교하자면 기학은 인식과 수양의 주체로서 인격의 지위를 덜 강조하는 방식으로 인식의 주체-대상의 경계를 약화시켰으며 무엇보다 기를 여러 차원에서 계층화함으로써 일종의 추상화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지향점을 보인다. 무엇보다 최한기에게 기는 단순히 우주적 원리나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실증 가능한 구체적 대상이었다. 세계는 기와 물의 상호소통 과정을 통해 운행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물(物)이라 하고 볼 수 없는 것을 기라 하는데, 우주만물은 기로 시작하여 변화하여 물이 되고 물이 다시 변화하여 기가 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대체로 물은 생성되거나 없어질 때 그 기질(氣質)은 소멸하지 않으나, 다만 눈으로 기를 볼 수 없고 물질의 형태가 없어진 것만을 보고 완전히 없어졌다고 여길 뿐이다."
우주 전체를 운용하는 힘인 기를 바탕으로 인간의 층위뿐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우주까지 하나로 연결시킨다. 최한기는 세계의 구조를 대기운화(⼤氣運化), 통민운화(統民運化), 일신운화(⼀⾝運化) 등 세 층위 또는 세 단계의 장으로 설명한다.
이때 대기운화의 영역은 기의 세계관을 토대로 한 우주론이면서 동시에 실질적 기의 형질과 운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자연학의 영역이며, 통민운화는 정치와 사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련된 일종의 사회공학적 영역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일신운화는 운화기로 관통되어 있는 인체와 인식 능력을 포괄하는 인간학적 영역이다. 최한기에게 세 차원의 운동과 변화 즉 ‘운화(運化)’는 결코 위계적이지 않으며 상호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 안정성과 개방성을 가진다.
이 통합과 연결의 가장 큰 테두리를 최한기는 운화기(運化氣)라고 부른다. 운화기는 각 영역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핵심 원리이자 실질적인 힘이다. 최한기의 독특한 개념인 운화는 자생적 활력과 그로 인한 능동적 변화의 능력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기의 생명성과 운동성, 순환성과 변화성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운화기는 1과 0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비트처럼 존재하지만 비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개별자들의 양태들을 포괄한다. 운화기는 운동하고 활동하는 기로서 이미 비트이면서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운화기의 존재와 작동은 그 자체로 정보이자 정보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정보 패턴들은 일종의 추상화 단계에 따라 다르게 불릴 수 있다.
"활동운화를 가지고 공부의 조리를 분석해 본다면 ‘활(活)’이란, 추측을 존양하는 것이고, ‘동(動)’이란, 날로 새로워지는 이치를 건강하게 따르는 것이고, ‘운(運)’이란, 돌고 도는 운동성을 헤아림이고, 화(化)란, 조화롭고 원만하게 변통하는 것이니, 오직 이렇게 공부한 활동운화만이 한 몸에 본디 있는 활동운화를 통하여 대기의 활동운화를 받들어 자연과 인간이 한 곳에서 만나고 사물이 하나로 통하게 된다."
추상화의 수준은 정보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 정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플로리디는 LoA(the level of abstraction)이라는 방법을 제안한다. LoA란 한 존재 혹은 하나의 사태가 가진 다면적인 국면이나 속성을 하나의 기준에 의해 재배치, 재정렬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라는 존재에 대해 경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나머지 국면들을 배열할 수도, 안전을 기준으로 나머지를 정렬할 수도 있다. 정보는 가장 추상화된, 가장 포괄적인 LoA로서 이 안에 전통적인 윤리적 주체로서 인간 외에도 생물과 기계, 물질과 기술이 모두 포섭될 수 있다. 플로리디는 정보라는 개념을 매우 확장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분화되어 있던 각각의 경계를 통섭적으로 이해하고 모든 개별자들을 공통적인 속성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한기가 제안하는 운화의 단위들은 각각 하나의 추상화의 수준과 유사한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중력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중력장, 전기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전기장이라고 부르듯 장(場)이란 특정한 질서 혹은 패턴에 의해 포괄되는 경계를 의미한다.
최한기가 설정한 인간 차원의 일신운화, 사회와 국가 차원의 통민운화, 자연-우주적 차원의 대기운화는 일종의 수직적 모델이지만 힘과 권력에서 위계적이지 않으며 상호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 안정성과 개방성을 가진다. 이 계들은 안정적이지만 개방적인 연결을 이룬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변화의 네트워크에 가깝다.
플로리디가 제안하는 LoA의 방법론은 설정된 목적에 따라 추상화의 층위 역시 다르게 형성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각 층위들은 목적지향적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구조라면 목적에 따라 일종의 위계를 가지면서도 그 위상이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계기적이고 맥락적인 상황에 따라 존재론적 구조가 재배치되거나 재정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추상화 수준에 참여하는 개체들은 상황과 계기에 따라 위계화되지만 위계가 고정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개체의 지위나 권리는 위계화되지 않을 수 있다. 최한기가 제안하는 운화기의 층위들은 마치 LoA처럼 특정한 목적에 따라 별도로 추상화된 방법적 틀이다. 무엇보다 운화기는 가장 보편적인 차원부터 가장 세밀하고 구체적인 단위에 이르기 까지의 기를 관점, 맥락, 조건에 따라 새롭게 추상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한편 최한기의 기 해석이 다른 유학자과 다른 점은 그가 기를 계량화 하거나 계수화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최한기의 체계에서 기는 형질을 가지고 있고 그를 바탕으로 ‘운화’한다. 운화기란 운동하고 변화하는 기의 본질이자 양상을 가리키는 최한기의 용어다. 이 운화의 기는 다른 말로 신기(神氣)라고 한다. 최한기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신기는 매 우 흥미로운 개념이다. 신기란 주로 기의 가장 정미한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었지만 최한기에게서 신기는 개체에 내재된 운화하는 기의 양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인식 능력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신기는 단순히 인간의 인식 주체, 일반적으로 mind나 mental에 해당 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소통성이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최한기에게 신기는 인간을 특화시키는 종차의 구별점이 아니라 모든 지각있는 존재가 공유하는 바이다. 궁극적으로 기는 언제나 계기적으로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수준 차이가 있더라도 동 물에게도 신기가 있다.
다시 말해 신기는 한 개인의 영혼-심이 아니라 기의 투명성이 잠시 인간 안에 계류하면서 인식 활동을 하는 단계를 가리킨다. 최한기는 신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보 처리 과정을 ‘추측(推測)’이라부른다. 이때 추측은 우리의 일상어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연역적 추론과 경험적 혜량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 ‘리는 하나’이더라도 천리가 유행하는 것을 ‘유행의 리’라 하고, 과거 어느 날 견문 (⾒聞)하고 하나하나 살피는[閱歷] 것을 미루어 바야흐로 다가올 사물의 처리를 헤아리는 것을 ‘추측의 리’라고 하니, 사람이 사물을 추측하는데 천리에 어긋남이 없기는 어렵고 천리에 어긋남이 있기는 쉽다. 그 어긋나고 어긋나지 않는 이유를 추구해 보면 이것은 오직 미룸이 마땅했느냐 마땅하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고, 그 미룸의 마땅하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강구해 보면, 오직 헤아림의 양이나 정도에 달려 있으니, 인심의 추측의 리로 하여금 천도 유행의 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을 기대한다."
추측의 주체는 신기(神氣)로, 추측은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고 계측하고 판단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정보 처리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추측은 인식 주관에 의해 포착된 외부의 객관적 정보라는 의미로 한정되지 않는다. 신기는 한 개인에게서 작동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천지운화에 통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신(⼀⾝)에 국한된 기를 가지고 밖으로 천지운화의 기에 통하고 있으니 이러한 것에 관해 하루 이틀 두루 살펴나가고 1년, 2년 점차 증험하여 쌓으면 스스로 앞을 미루어 뒤를 헤아리고 이것을 미루어 저것을 헤아릴 수 있으니 이 또한 조리로서 이것을 인심추측의 리라 한다."
주체-자아가 경계면이 분명한 안과 밖을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과 외부 환경 사이에 윤곽은 희미해졌고 경계면은 보이지 않는다. 나 라는 경험,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신체 역시 고유한 단위로 변별되지 않고 윤곽은 희미해져서 미분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패턴으로 유동하고 있다
이 패턴 역시 하나의 정보일 수 있다. “세상의 범위와 배포를 통찰해 보면, 원근에 가득한 인물(⼈物)의 생식사멸(⽣息死滅)은 다 대기운화에 따라 천변만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미세한 사물이라도 이 기화(氣化)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고 말할 때 결국 이 세계는 기의 패턴으로서 정보로 이루어진 세계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기의 패턴을 정보로 보고 이를 최한기 철학의 체계로 확대할 경우 기존의 유학과 달리 최한기 철학에서는 인간 행위자가 덜 강조되고 만물의 패턴들과 수평적 차원에서의 연결성과 소통성이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기는 인간에게 고유한 변별적 능력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 공통적으로 실현되어 있는 본질이면서 사건이자 현상이자 지향성이기 때문이다.
출처 :『정보철학 관점에서 본 최한기의 기학(氣學)』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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